시효 1년도 안 남았는데…강제수용 기록 없어 피해입증 험난
- 과거사정리법 의거한 임시조직
- ‘진화위’ 진상규명 조사만 공인
- 법 규정상 내년 5월 해체 예정
- 사회적 인식 때문에 숨기거나
- 몰라서 시기 놓친 피해자 다수
- 널리 알려진 형제복지원만 해도
- 수용인원 못 미치는 490명 공인
- 영화숙·재생원은 자료확보 난항
- 恨 풀 기회 잃은 피해생존자들
- “진화위 조사기간 연장 위해 투쟁”
‘상기인은 서기 1979년 9월 5일 부산시 남구청에서 의뢰되어 당원에 일시보호수용되었다가 보호수용 중 서기 1979년 11월 7일 뇌졸중으로 부산시립병원에 긴급입원시켜 가료했으나 서기 1979년 11월 29일 병원에서 사망하였사오니 내원하셔서 처리하여 주시옵기를 통지합니다. 사회복지법인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두 달 만에 숨진 아버지
44년 만에 전해진 선친의 ‘부고’였다. 막내아들 이동희(57) 씨는 아버지 이상복(1935년~1979년) 씨의 말년을 들어본 적 없었다. 집안 모두가 아버지의 죽음을 쉬쉬해왔다. 그런 시절이었다. 통보문 속 아버지는 부랑인으로 낙인찍힌 채 생을 마감했다. 집안으로선 감추고 싶은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집안 사람들은 이 통보문을 간직해왔다. 그의 삶이 어떠했든, 이 씨의 사인은 석연치 못했다. 언젠가는 이 서류가 그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밝혀줄 계기가 될 거라 여겼다. 그렇게 큰아버지와 두 누나가 40여 년을 보관해 오다 석 달 전 동희 씨에게 넘겨졌다.
확실히 아버지의 죽음은 수상쩍었다. 형제복지원 수용 당시 아버지는 44세였다. 생전 술을 가까이에 뒀고, 이 때문에 가정불화가 커 어릴 적부터 떨어져 살았다지만 아버지가 건강 이상을 호소한 기억은 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시설에 갇힌 지 두 달 만에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로부터 3주 뒤에는 목숨까지 잃었다.
사인으로 지목된 뇌졸중은 특히나 믿기 어려웠다. 이 병에 걸리는 평균 나이는 62세 전후다. 아버지 나이와는 격차가 컸다. 무엇보다도, 1975~1987년 형제복지원에서 유명을 달리한 515명 중 뇌졸중으로 숨진 이가 109명(21.2%)에 이르렀다. 전문가들은 형제복지원이 구타·가혹행위로 인한 수용인 사망의 ‘뒤탈’을 방지하고자 ‘뇌졸중 때문에 죽었다’고 사인을 둔갑시키는 방법을 자주 활용했다고 설명해 줬다. 아버지가 형제복지원에서 모종의 봉변을 당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로서, 동희 씨는 아버지가 왜 그곳에서 생을 끝내야 했는지 알고 싶었다. 억울하게 죽임당한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문제는 진상규명에도 시효가 있다는 점이었다. 집단수용시설 인권침해 사건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사한다. 이곳의 조사만이 공인받는다. 그런데 진화위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정리법)’에 의한 임시 조직이다. 이 법의 규정상 내년 5월이면 해체될 예정이다. 게다가 형제복지원 사건은 2022년 8월부터 지난 1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진상규명이 이뤄졌다. 다른 사건이 산적했는데 또 형제복지원을 다루긴 어렵다는 게 진화위 입장이었다.
집단수용시설 인권침해 사건은 오늘날에야 수면 위로 떠 올랐다. 그마저도 거대한 빙산이 몸체를 숨긴 채 그 일각만을 내보인 실정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인 형제복지원만 해도 공인된 피해자는 490명에 불과하다. 형제복지원 수용인은 한 해에만 3000명이 넘었다. 동희 씨는 “사회적인 인식 때문에 조사 신청을 주저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저희처럼 진상규명 조사를 접수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분들 또한 상당수 계실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문제에 시효가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며 고개를 저었다.
▮위로받을 길 차단된 피해자들
“2020년인가, TV에 형제복지원 재판 관련한 게 나오데요. 과거사 조사 관련해 사람들이 설명하는 것도 봤어요. 부산 쪽으론 쳐다보기도 싫고, 피붙이 누나는 보고 싶고, 혼자 마음이 힘들고 외로웠던 옛날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하필 그 무렵에 다리 수술을 받았어요. 제가 다리가 조금 장애가 있어서 잘 뛰지를 못하는데 넘어져 버렸거든요. 병원에서 한 달 동안 지냈어요. 거기다가 코로나19로 완전 비상이 걸렸잖아요. (그렇게 시간을 한참 보내고) 지난해 (진화위에) 전화했어요. ‘이미 조사가 끝나버렸다’고 하더라고요. 참 나….”
전희석(60) 씨는 억울했다. 죄 없이 지옥에 던져졌다는 사실을 입증받는 데도 시효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양산 물금읍이 고향인 그는 국민학교 무렵 부모님을 여의고 두 살 터울 작은누나와 살았다. 중학교에 다니던 열다섯 때 부산으로 이사 간 친구를 만나러 부산역으로 나갔다가 이유도 없이 붙들렸다. “처음 와보는 곳이라 길을 물었는데, 잠깐만 기다려 보라 하더니 30~40분 뒤에 탑차가 왔어요. ‘빨리 타, 시간 없다’며 차에 싣더니 뒷문을 잠가요. ‘아저씨, 어디 갑니까?’ 물어보니 주례동(형제복지원 소재지)에 간대요. 집에 보내 달래도 안 보내줘요.”
‘개새끼야, 가만히 안 있어?’ 형제복지원에 도착하자마자 욕설과 몽둥이세례가 쏟아졌다. 시키는 대로 이름과 나이 등을 신상기록카드에 적으니 소대로 보내졌다. 전 씨는 소대장에게 읍소했다. “나는 학생입니다.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는데, 집에 좀 보내 달라고 울었습니다. 그러니 소대장이 중대장에게 전화를 걸어요. 중대장이 와선 ‘어떤 새끼야. 꿇어앉아’ 소리쳐요. 발길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고 귓방망이 날려요.” 1980년 7월, 전 씨의 인생은 느닷없이 바닥 아래로 떨어졌다. 그곳에서 2년 4개월을 고문 버티듯 살았다.
그는 주로 ‘노가다’에 투입됐다. 시멘트용 자갈 모래를 나르고, 산 정상부터 건물 앞까지 ‘공구리’를 쳐(콘크리트 타설) 평탄화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채 소대에 복귀하면 얻어맞아야 했다. 고강도 육체노동과 가혹한 소대 생활이 하루의 전부였다. 이런 끔찍한 일과는 새벽 4시 찬송가와 함께 시작됐다. “찬송가를 2시간씩 부릅니다. 아침에 밥을 먹으면 곧바로 일하러 나가야 해요. 우리가 있는 곳이 죄짓고 감방 가는 거보다 더 힘들다잖아요. 그 말 그대로였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0대 소년들이 매질 당하며 노역했다. 가축보다 못한 취급이었다. 현대판 노예였다. 전 씨는 4남매의 막내이자 외동아들이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하나 있는 아들에게 갖은 정성을 기울였다. 그러다 누구 하나 의지할 곳 없는 공간에 갇혀 혼자 두려움에 떨었다. 그가 수용됐던 동안 누나들은 전 씨가 형제복지원에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 무렵 집을 이사한 통에 형제복지원의 통보문이 제대로 송달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사실을 안 작은누나가 동생을 데리러 왔을 때, 전 씨 몸과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지옥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왔지만, 전 씨는 삶의 의욕을 상실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매형의 소개로 울산의 한 국숫집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이내 관뒀다. “그렇게 죽다시피 마구 두들겨 맞고 나왔는데, 일할 마음이 안 생기죠. 그 당시 누나의 시댁 식구와 살았는데, 그 집 사람들과 같이 지낼 마음도 없고 몸 상태도 좋지 못했어요.” 그렇게 전 씨는 집과 가족을 떠나 전국을 떠돌았다. 타지에서 죽 혼자 살았다. 이름도 ‘전석환’이란 가명을 썼다. 서울 안양 청주 등으로 옮겨 다니며 마음속 괴로움을 이겨내려 했다.
전 씨는 지금이나마 그 시절 자신이 처해야 했던 삶을 호소하려 한다. 어린아이를 인간 이하로 취급했던 시설과 국가에 사과받고 싶었다. 그러나 국가는 더 이상 전 씨와 같은 이를 위한 진상 조사에 나서려 하지 않는다. 그의 수중에는 형제복지원 입소 사실을 증명할 기록도 없다. 그나마 1984년 객지에서의 처지를 하소연하며 작은누나에게 ‘형제원’을 언급하며 부친 편지 정도가 남았다. “아무 잘못 없는 어린 학생을 잡아가는 건 절대 해선 안 되는 일 아닙니까. 앞으로 이런 일이 없어지려면 국가가 조처해야 하지 않습니까? 왜 움직이지 않습니까.”
▮속만 태우는 피해생존자들
집단수용시설 피해생존자 절대다수의 현실이다. 조사 시기를 놓쳐 한을 풀 기회가 상실된 이가 부지기수다. 조사가 진행됐으나 수용 사실을 입증할 자료가 발견되지 못한 사례 역시 적지 않다. 덜 알려진 시설이라서, 공론화가 늦게 된 시설이라서 단 한 차례 조사조차 받아보지 못한 피해생존자는 이보다도 많다. 40~60년 묵은 억울함을 생애 말미에 이르러서도 풀 수 없게 됐다. 그러니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간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사건은 다소 늦은 공론화로 진상규명이 봉착된 대표적 경우다. 1958년 세워진 이곳은 당대 최초의 대형 공립 아동 시설이었다. 서울지역에서 붙잡힌 아동을 부산 영화숙·재생원이나 경기 선감학원 등 타지의 집단수용시설로 전원시키는 거점이기도 했다. 부랑아 단속이 국가 정책으로 부상했던 1960년대 초중반에는 수용 인원이 최대 2300여 명에 이르렀다. 1975년 마리아수녀회가 서울시로부터 시설을 인수하기 전까지 잔혹한 아동 인권 유린이 발생한 악몽의 장소다. 이곳 아동에겐 ‘대발랑’ 등 중간관리자의 학대, 밤낮 없는 폭력, 끝없는 강제노역의 굴레가 씌워졌다.
이 사건이 본격적으로 언급된 건 2021년 전후다. 그 무렵부터 시설의 존재와 운영 양상을 연구한 논문이나 언론 기사가 나왔다. 그러나 형제복지원·선감학원과는 달리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 때문인지 진화위가 직접 피해자를 발굴하고 자료를 확보하는 ‘직권조사’도 없었다. 지난해 8월부터 19건의 신고를 대상으로 한 개별 조사가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이마저도 진화위는 사건을 처리할 인력 부족 등을 이유로 특별법 만료 전 조사 완료를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부산 영화숙·재생원 사건은 자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해당 사건은 지난해 8월 진화위의 직권 조사가 결정됐다. 그러나 1970년 영화숙 원생들이 소년의집으로 옮겨질 때의 명부 정도를 제외하면, 피해생존자의 피해 사실을 증명해 줄 이렇다 할 기록을 찾지 못했다. 사정이 이러니 영화숙·재생원에 한 해 최대 1200명이 수용됐는데도 이번 직권조사를 통해 피해자로 인정받는 이는 200~300명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조사 시기를 놓친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는 진화위 조사 기간 연장을 목표로 투쟁에 나선다. 이들은 지난 9일 부산 연동시장 상인교육관에서 형제복지원피해자협의회 주도의 모임을 가졌다. “오는 11월부터면 진화위가 해체 수순을 밟는다. 서둘러 과거사정리법 개정을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뜻을 모은 이들은 오는 29일 부산역에서 버스를 타고 출발해 진화위와 주요양당, 대통령실 등에서 목소리를 낼 예정이다.
현재 국회에 발의된 과거사정리법 개정안은 2개다. 각각 지난 6월과 이달 안이 제출돼 행정안전위원회에 회부됐다. 두 안 모두 진화위의 조사 기간 연장과 활동범위 확대가 골자다. 정당들과 소통 중인 협의회에 따르면, 국회는 집단수용시설 조사 연장에는 큰 이견이 없다. 다만 진화위가 조사 대상으로 삼는 다른 사건 중에는 양당의 정치적 입장차를 좁히는 데 긴 시간이 소요되는 사안이 포함된다. 이 때문에 개정안 조율에 시일이 걸리고 있다.
설사 개정안이 통과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한발 늦은’ 피해자, 자료 입증에 시일이 걸리는 생존자가 계속해서 나타난다. 새 피해생존자들은 조사에 시효를 걸어둔 법 때문에 항시 전전긍긍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해소하려면 적어도 현재의 ‘시효 걸린 조사’ 체제만큼은 개편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방송통신대 김재형(문화교양학과) 교수는 “집단수용시설은 다른 과거사 문제와 차이가 크다. 많은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을 언어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또 다양한 유형의 시설이 있었다가 사라져 자료 손실이 발생, 긴 역사 속에서 시설이 어떻게 운영됐는지 알기 힘들다. 그러니 조사받은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조사는 됐지만 자료가 있는 집단과 없는 집단 사이에 갈등과 상실감이 생긴다”며 “진화위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절한 기관일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긴 시간을 두고 조사할 수 있는, 장기적 혹은 영구적 기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상= 박세종 PD
※제작지원 : BNK 금융그룹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