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시작으로 ‘대구 변혁’에 헌신했던 시민운동가
[가신이의 발자취] 대구 시민운동에 한 획, 장주효 선생님의 삶을 되짚으며
지난 8월5일, 장주효 선생님의 부음에 한동안 눈물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소탈하게 웃으시는 선생님의 모습을 더 이상 뵐 수 없다는 생각에 망연자실할 뿐이었습니다. 병마와 싸우고 계실 때 자주 찾아뵙지 못한 회한이 밀려왔습니다. 선생님께서 영면에 드신 지 어느덧 2주가 지나고 있습니다. 선생님을 마음에 고이 간직하고자 향년 82로 하늘의 별이 되신 선생님의 선 굵었던 삶을 되짚어 보려고 합니다.
대구고 2학년 때 8개교 학생들과
이승만 반대 2·28민주화운동 주도
선생님은 경상중, 대구고, 경북대 정치학과를 졸업하시고 한참 뒤에 경북대 대학원 행정학 석사와 대구대 대학원 행정학 박사를 받았습니다. 고교 2학년 때 이승만 정권 독재에 반대하는 2·28민주화운동(1960년)을 주도했습니다. 이후 선생님의 삶은 줄곧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4·19 혁명 참여(1960), 6·3한일회담 반대 데모 주동으로 학군사관후보생(ROTC) 제단 및 한 번 더 데모하면 퇴학 조처한다는 조건부 퇴학(1964), 대구일보 편집기자(1969), 대구은행 입행(1972),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 수감(1980), 새대구시민회의 대표(2001), 팔공문화원장(2004), 대구대 영광학원 이사(2005), 한국산악회종신회원 선정 및 민주화운동 건국 포장(2012) 등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으셨습니다. 선생님은 가끔 “2·28이 내 인생을 말아먹었다. 허허”하시며 크게 웃으시곤 했습니다. 선생님의 환한 미소가 벌써 그립습니다.
선생님은 2·28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당시 대구고 2학년이었던 선생님은 경북고, 사대부고 등 8개교 학생들과 함께 한국 최초의 민주화운동이자 학생운동인 2·28의 선봉에 서서 시위를 준비하고 이끌었습니다. 시위를 주동하면서 고등학생 장주효는 떨리고 두려움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시위 책임자로 경북고의 이대우 등과 함께 선뜻 나섰습니다. 희생을 최소화하고자 함이었습니다. 혁명의 전야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지도자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필자가 장 선생님과 가까워지게 된 계기는 2000년 6월 교수이자 정치가였던 이수인 선생님의 장례를 마치고 난 직후였습니다. 이수인 선생님은 개혁과 통합을 정치철학으로 삼으신 분이었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대구에 도착하자 선생님은 술자리를 마련해 참석자들을 일일이 위로하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이후부터 나는 소소한 일까지 선생님께 상의드리고 의견을 여쭙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자칭 ‘산꾼’이셨습니다. 등산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고교 2학년 말 무렵 팔공산에서 열렸던 ‘새날동지회’ 동계수련회에 참석하면서 비롯되었습니다. 새날동지회는 대구경북지역 남녀 고등학생들의 연합동아리로 농활이 주된 활동이었습니다. 그 뒤 대학에 진학하여 경북산악연맹이 주최한 등산학교 수료, 각종 등반대회 참석, 경북연맹 가입, 한국산악회 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본격적인 산악인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대구고 동창회장, 6·3한일회담 반대 데모, 서울 유학 등으로 사회운동에 투신하면서 등산에 집중할 수 없었습니다. 1990년대에 한국산악회 대구지부장을 맡으며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2012년 한국산악회 종신회원으로 선정되었습니다. 2000년부터는 늘 마음에 간직해 두었던 백두대간을 종주하기로 결심해 야심차게 추진했으나 8부 능선을 조금 넘어설 무렵 건강에 이상이 와 여행으로 방향을 돌리셨지만, 산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팔공산 비로봉의 방송탑과 통신탑을 이전하여 본래 산의 모습을 되돌려줘야 한다고 늘 강조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등산과 북한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걸 알고 있었던 필자는 2008년 6월 금강산 온정리 인민병원 개보수 공사를 마치고 재개원하는 기념식에 장 선생님과 대구대 김문봉 교수, 홍덕률 교수를 함께 초대했습니다. 당시 통일부 인도협력국장으로 일할 때라 선생님께 금강산과 북한의 의료실태를 직접 보여드리고 싶어서 추진했습니다. 선생님은 매우 만족하셨고 여러 차례 고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구은행 입사해놓고 위장취업도
낮에는 은행으로, 밤에는 공장으로
노동운동 ‘이중생활’ 들통나 수감
선생님의 첫 직장은 대구신문사 편집기자로 출발하였으나, 입사 3년 뒤 강제 정간으로 기자의 길을 접어야 했습니다. 이후 대구은행에 입행하여 24년 동안 근무하셨습니다. 그러나 굴곡진 시대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선생님은 위험물취급기능사 자격을 취득해 1976년부터 3년 동안 대구 3공단의 한 회사에 위장취업을 했습니다. 낮에는 은행으로, 밤에는 공장으로 출근했습니다. 오래지 않아 노동운동을 위한‘이중생활’이 들통나서 국가보안법·반공법 위반의 꼬리표를 달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새대구시민회의·토요아침마당 등
대구 지역 변혁 위한 활동 이끌어
1996년 이후에는 새대구시민회의 창립멤버이자 대표를 오랫동안 역임하셨고 2003년부터는 대구 지역의 변혁을 위한 지역 인사들의 만남의 장인 토요아침마당에 참여하셨습니다. 대구지역 시민운동에서 선생님의 흔적은 두텁고도 넓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일관된 삶은 역사와 민족 앞에 큰 울림을 남기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생님, 역사의 무거운 짐 내려놓으시고 평안히 영면하시길 소망합니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김정수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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