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게 사는 게 부러우신가요 [뉴스룸에서]

서정민 기자 2024. 8. 19.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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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현장.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제공

서정민 | 문화스포츠부장

“부러워요. 영화 보고 공연 보는 게 일이라니, 얼마나 재밌겠어요.”

문화부 기자라고 소개하면 으레 돌아오는 반응이다. 그렇다. 음악과 영화를 유독 좋아하는 나는 일이 즐겁다. 하지만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공연장에서 눈과 귀는 무대를 따라가면서도 머릿속에선 어떻게 기사를 쓰면 좋을지 끊임없이 회로를 돌린다. 지금 저 노래는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가수는 어떤 멘트를 하는지, 관객 반응은 어떤지 등을 메모하며 기사를 구상하다 보면, 공연을 온전히 즐길 수만은 없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컴컴한 극장에서 대사나 장면의 포인트를 수첩에 휘갈겨 쓰다 보면, 영화를 보는 건지 과제를 하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럼에도 나는 복 받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걸로 먹고사는 사람보다 그러지 못한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한국시각으로 지난 12일 폐막한 2024 파리올림픽을 보면서 나보다 더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새삼 느꼈다. 엄청난 경쟁을 뚫고 올림픽 무대까지 온 선수들이라면 얼마나 많은 피땀을 흘렸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잦은 부상으로 대나무처럼 마디가 굵어진 유도 선수의 손, 한쪽 팔과 다리만 유난히 두꺼운 펜싱 선수의 몸, 하루 수백발의 화살을 쏘느라 활시위로 생긴 상처가 착색돼버린 양궁 선수의 턱은 빙산의 일각이리라.

그런데도 자신의 일을 진심으로 즐기는 태도에 크게 감동받았다.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박태준은 가장 큰 고비인 4강전에서 세계 1위 무함마드 칼릴 젠두비를 꺾고는 “시합마다 재밌다고 느끼진 않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재밌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탁구 신유빈, 역도 박혜정, 10대 사수 오예진·반효진 등 젊다 못해 어린 선수들을 보며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금언을 떠올렸다. 이기고 지고를 떠나 그들은 진정 즐겼다.

즐기는 자는 주변의 다른 이들도 전염시킨다. 지난 3일 찾은 인천 펜타포트 록 페스티벌 현장은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과거 록 페스티벌의 중심은 록에 죽고 록에 산다는 ‘록부심’ 가득한 이들이었다. 뭔가 진지하고 비장한 분위기마저 감돌았다. 하지만 트렌드는 돌고 록의 시대도 저물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록 페스티벌에 목숨 걸었던 이들은 나이 들면서 발길이 뜸해졌고, 새로운 세대는 케이(K)팝, 힙합, 이디엠(EDM) 등에 열광했다.

그러다 최근 몇년 새 다시 록 페스티벌이 떠올랐다. 이른바 엠제트(MZ) 세대가 몰리고 있다. 이들은 록을 들으며 자란 세대가 아니다. 그런데도 와서 ‘나락도 락이다’ 같은 글귀를 쓴 깃발을 흔들고, 몸과 몸을 부대끼며 슬램을 하고, 기차놀이를 한다. 그들을 한발 물러선 채 보면서 나 또한 내적으로 함께 슬램을 했다. 기록적인 폭염에도 전신을 덮는 검은 가죽옷과 짙은 얼굴 분장을 고수한 국내 헤비메탈 밴드 ‘다크 미러 오브 트레지디’의, 분명 오늘 처음 들어봤을 낯선 음악에도 신나게 노는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들에겐 어느 밴드의 어떤 음악인지보다 얼마나 재밌게 노느냐가 최우선이구나.’ 나도 빗장을 풀고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지난 17일 저녁 서울 종로구 북살롱 오티움에선 열린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 음악감상회에서 이곳을 운영하는 박성제 전 문화방송 사장이 음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서정민 기자

이것저것 재지 않고 내일이 없는 듯 즐기는 행위를 청춘의 특권으로 여기곤 한다. 먹고사느라, 자식 키우느라, 직장에서 살아남느라 기력이 쇠한 기성세대에겐 딴 세상 얘기 같기만 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지난 17일 저녁 서울 종로구 북살롱 오티움에선 흥미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영국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 음악감상회가 열렸는데, 젊은층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 중장년층이 자리했다. 이곳을 운영하는 박성제 전 문화방송 사장이 해설과 함께 엘피(LP)로 들려주는 음악에 사람들은 흠뻑 취했다. 끝나고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머리 희끗한 어르신이 같이 온 지인에게 감격스러운 듯 말했다. “나 ‘올드 앤드 와이즈’ 좋아하는데, 설명까지 들으니 너무 좋았어.”

나이 든다고 다 현명해지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이 들어도 얼마든지 즐겁게 살 수 있는 건 분명하다. 나는 쉬는 날 음악감상회에 다녀와서 이렇게 또 글을 쓰고 있지만 여러분들은 그런 부담 없이 그저 즐기면 되니, 이 어찌 좋지 아니한가. 즐거움은 대단한 데 있지 않다.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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