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건축가 김원의 세상 이야기 ⑧ 일제 잔재의 청산

성도현2 2024. 8. 19.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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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이에 연합뉴스 K컬처 팀은 독자 제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김원 건축환경연구소 광장 대표. 독립기념관·코엑스·태백산맥기념관 등 설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삼성문화재단 이사, 서울환경영화제 조직위원장 등 역임

김원 건축가 연합뉴스 자료사진

지난 2005년 광복 60주년 기념 문화사업추진위원회가 출범 후 두달 동안 일제 잔재 바로잡기 시민공모를 실시했던 시절이 있었다.

몰랐던 일들이 많이 드러나 그 결과가 재미있었다. 으뜸상에는 '만경강, 영산강'이 뽑혔는데 조선시대 각각 사수강(泗水江), 사호강(沙湖江)이라 불리던 것을 일제가 변경했다고 한다.

버금상에는 '춘희'(椿姬), '소공녀'(少公女), '마적'(魔笛), '조곡'(組曲) 등 문학, 음악 용어들이 뽑혔다. 누리상에는 '여우야 여우야', '아침바람 찬바람', '퐁당퐁당', '신데렐라' 같은 어린이 동요 관련 말들이, '쎄쎄쎄', '동대문 놀이', '묵찌빠' 같은 어린이 놀이 관련 용어도 완전 일본 원형이라는 것이다.

그밖에 '흥분의 도가니', '새빨간 거짓말', '종지부를 찍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순풍에 돛을 달다' 같은 일본식 관용어도 일본 원형으로 드러났다. 또, 육교(陸橋), 원조교제(援助交際), 과로사(過勞死), 교례회(交禮會), 송년회, 망년회 같은 일본식 조어(造語)와 진검승부(眞劍勝負;신켄쇼부)니, 수순(手順;데쥰)이니, 식상(食傷;쇼꾸쇼)이니 하는 말도 일본 원형이다.

유식한 자, 특히 일류 신문 기자도 어원을 모른 채 요즘도 잘난 척 자주 쓰는 순 일본말들, 그리고 정말 그것이 일본식 말인지도 모르고 마구 쓰던 '입장' (立場), '부부' (夫婦) 같은 말이 몽땅 일본 원형이었다.

하여튼 몰랐던 것도 많았고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중에는 조금 무리하다 싶은 것도 있었는데, 예컨대 '박문사'(博文社)나 '박문여중'(博文女中)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이름에서 왔다는 사실은 그렇다 치더라도 '소화유치원' 같은 경우 '少花幼稚園'이라면 모를까 '쇼와'(昭和) 천황의 이름을 따 '昭和유치원'이라고 쓰는 사람이 아직도 있을까 싶지 않고, 담배 한 '까치'(개비)나 '싹쓸이'도 일본말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게다가 당시에 바로 반론이 나오기를, '영산강'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이름이니 일제가 고쳤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 조상들은 경우에 따라 같은 지명을 다르게 부른 적이 많았으므로 '사수강', '사호강'은 별명일 수 있겠다. 금강산(金剛山)이 계절 따라 개골산(皆骨山;겨울), 풍악산(楓岳山;가을), 봉래산(蓬萊山;여름)이 되듯이 말이다.

이것 말고 다른 데서 읽고 처음 알게 된 것 하나가 '당쟁'(黨爭)이라는 말인데, 이 나쁜 말은 왜놈들이 조선인을 깎아내리기 위해 지어낸 말이라는 것이다.

조선 왕조가 당쟁으로 망했다는 말은 대한제국의 학정 참여관을 지낸 시데하라 히로시(幣原但)란 자가 1907년에 쓴 '한국정쟁지'(韓國政爭志)에 처음 쓰면서 조선 시대를 당쟁으로 지새운 부정적 이미지로 묘사했다.

또, 호소이(細井筆)라는 자는 "조선 사람의 혈액에 특이한 검푸른 피가 섞여 있어서" 당쟁이 여러 대에 걸쳐 계속되고 결국 고칠 수 없는 것이라며 인종차별적인 조선인 체질론을 폈다.

이런 경우 조선인들이 흔히 쓴 말은 '붕당'(朋黨)이란 단어였다. (박숙희의 '우리말 속 일본말'을 인용했다)

그러면 또 '이씨조선'(李氏朝鮮)이란 말은 어떨까?

조선 왕조를 이씨에 국한해 표현함으로써 그 의미를 축소해 왜소하고 개인적인 모습으로 보이게 하고 왕조와 민중을 분리 이간시키려는 잔꾀가 엿보이는 나쁜 말이며 쓰지 말아야 할 표현이다.

'왕조실록'을 '이조실록'(李朝實錄)이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며, '이왕전하'(李王殿下), '이왕가'(李王家), '이왕직'(李王職)도 마찬가지로 봐야 한다. '이왕직 장관'은 왕가를 보전하고 그 직무를 총괄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그것은 일본인의 돈을 받아 왕실을 유지하는 형식으로 왕가를 능멸하고 궁극적으로는 도태시키려는 일제의 어용 간첩기관이었다.

그나마 그 돈은 일본에서 온 돈이 아니라 우리 백성을 수탈한 돈이었으니 왕실을 욕보이기로는 참으로 악랄, 교묘한 방법이었다.

여기 함께 지적되지는 않았지만 부끄럽게도 일제가 가르쳐준 기술 용어 중에는 건축용어가 아직도 많이 남아, 많은 이들이 흔히들 모르고 쓰고 있다.

외래의 건축 기술은 초창기 대개 일본인을 통해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왔고, 특히 그들의 식민지 수탈을 위해 필요한 기술 인력을 현지에서 양성하는 과정을 통해 왜색 용어 위주로 교육돼 해방 후 지금까지 많이 고쳐졌다고는 하지만 잘 몰라서, 또는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쓰이는 건축용어가 많다.

그 중에는 땅을 말하는 '부지'(敷地)라는 단어, '헤베'(平方)니, '류베'(立方)니 하는 계량단위, 뭐 그런 것들이 아직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이번 기회에 조금 더 시간을 갖고 이런 것들도 더 광범하게 조사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건축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일인들의 역사 왜곡 가운데 건축에 관한 것들도 더 연구가 돼 고칠 것은 고치고 바로잡고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웃을 수밖에 없는 한 예로 충북 충주에 있는 신라 시대의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제6호, 속칭 중원탑)의 경우, 한국의 고건축을 처음 조사한 일본의 대학자인 세키노 다다시(關野 貞)의 '조선 건축'에 그 탑의 높이가 나와 있다.

세키노가 1912년에 잠깐 보고 눈대중으로 '약 48척'이라고 한 것을 11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우리 학자들은 이것을 인용하고, 재인용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약 48척'이 그냥 '48척'이 되고, 이를 미터법으로 환산하여 '14.5미터'로 둔갑했는데, 나중에 실측한 결과는 12.95미터였다고 한다. (이순우 지음 '그들은 정말 조선을 사랑했을까?'에서 인용했다)

세키노는 오늘날까지도 우리 건축사학자들에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인물인데 그자는 1902년 약관 35세의 나이에 도쿄 제국대학 조교수의 신분으로 약 두 달 동안 조선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둘러보고 '조선건축조사보고'라는 책을 내었는데 그 책에서 우리 건축을 '졸악', '조졸', '졸렬', '볼 것이 없다' 같은 용어들을 예사로 쓰며 우리 것을 깎아내렸으나, 이 책은 그대로 조선미술사의 건축 편에 뼈대를 이뤘다.

이런 편견과 오류와 폄훼와 날조 일색의 제국주의 식민사관이 아직도 그대로 우리 주변을 횡행하는 것을 두고 누구를 탓하랴? 오로지 우리에게 바로잡지 못한 책임이 있을 뿐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그 시절의 시도는 여러 가지로 짧은 시간에 좀 미숙하고 성급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중에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매일 매일 부딪치는 엄청난 일들이 하고많은 데도 그냥 지나치고, 이런 일들이 언급조차 안 되는 점이다.

아직도 시정이 안 되는 것이 우선 국보 제1호인 남대문을 둘러싸고 있는 일제 잔재이다. 남대문 주변에는 일제가 그 옹성을 끊어 낸 자리에 석축을 쌓았는데 그 전형적인 일본식 돌쌓기는 해방 후에도 없어지지 않았고(동대문도 마찬가지다), 내가 신문에 그걸 지적하는 글을 쓰고 나서도 당시 문화재 관리국은 "잘 알고 있다"면서도 예산 타령으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지난 2005년에는 당시 서울시장이 남대문의 숙원사업인 주변 녹지대를 만들면서도 소홀히 지나가 아직도 그 일본 돌들이 버젓이 국보 제1호를 둘러싸고 있어 광복 60주년 기념음악회에도 그 돌쌓기가 그대로 TV 화면에 나오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그 오랜 논란 끝에 중앙청을 폭파, 철거하고 경복궁을 복원하고 있으면서도 중앙청 지을 때 둘러쳤던 일제 강점기의 돌울타리가 상당히 오랜 시간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도 위대한(!) 대한민국의 잘나가는 상황으로 보아 믿기지 않는 현실이다.

이곳은 수도 서울 한복판,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모여들고, 시민, 아니 우리 백성 전체의 눈과 귀가 쏠리는 곳, 바로 대통령이 참석하는 광복 60년 기념식이 벌어지고, 모든 TV 방송에 동시 중계 방송되고 있는 식장이었다.

콘크리트로 우람하게 복원된 광화문에는 바로 왜놈의 돌담이 연결되어 있고, 당시에 TV를 보는 누구도, 무심히 이 길을 지나다니는 누구도, 그걸 어색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고건 시장 때 설계까지 갔었다가 중지, 연기된 종묘와 창덕궁 사이의 큰길을 복개해 두 궁궐을 연결하는 일은 일제가 대표적으로 우리 왕실을 능멸해 그 힘을 과시한 대표 사례인데도 차량흐름을 이유로 실현을 못한 채 그대로 이어져 왔다. 당시의 시민들은 대개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지냈다.

사실 그 길을 없애는 것은 물론 차량 흐름에 큰 문제가 되겠지만, 도로 양측의 높은 축대를 생각하면 도로 면에서 철골 기둥을 세워 교통 방해 없이 그 위를 덮고 그 사이사이로 빛이 들어오도록 하는 공사는 큰돈도 안 들이고 실질적으로 일제의 만행으로 훼손된 왕궁 유적을 일부나마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아가, 아직 한 번도 공식적으로 거론된 적이 없지만, 나는 늘 독립문에서 홍은동 넘어가는 무악재를 지날 때마다 일제가 무참히 잘라내고 넓게 확장한 인왕산 자락을 원형 복구하는 의미에서 무악재 길 양쪽에 철골 기둥을 세우고 길을 가로지르는 구조물을 세워 그 위에 흙을 덮고 나무를 심어 산자락을 되살리는 상상도 해봤다.

이것은 서울의 아름다운 우백호(右白虎) 인왕산의 부러진 날개를 꿰매 주는 일일 뿐 아니라, 이 환경의 시대에 생태 통로를 만들어 인왕산과 홍은동 뒷산을 녹지로 연결해 주는 환경복원 사업이며, 인왕산 제모습찾기 사업이며, 엄연한 일제 잔재의 청산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엄청난 사실은 우리가 그저 무의식적으로 늘 쓰는 '한일합방'이란 말, '을사보호조약'이란 말이 얼마나 잘못된 말인지 도무지 생각을 안 해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다.

"韓日合邦"이라고?

"한일 두 나라가 합쳐졌다"고?

언제 두 나라가 합쳐졌냐?

그들이 강제로 먹었으니 '강점'(强占)했거나 '병탄'(竝呑:남의 물건을 제 것으로 삼켜버림)했지. 이 경우 선열들이 많이 쓴 말은 '경술국치'(庚戌國恥)였다.

"乙巳保護條約"이라고?

"보호해 주는 조약"이라고?

이건 일본인들이 가르쳐준 말이다. 이 경우 선열들(특히 백암 박은식)이 많이 쓴 말은 '을사늑약'(乙巳勒約, 늑약:굴레를 씌워서 강제로 맺은 조약)이었다.

위 두 단어의 용례(用例)에서 보듯이 우리는 이런 말들에 대단히 우둔하고 무심하다.

당시 일본인들은 이에 비하면 치사하게 광개토대왕비문 글자를 조작하고, 을사늑약 때는 옥새를 훔쳐 찍고, 독도에 관해서는 과거 자료를 날조하고, 역사 교과서를 왜곡하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에 관해서는 궤변을 늘어놓거나 말 바꾸기를 밥 먹듯 하는 등 잔꾀 부리기에 아주 능한 인간 족속이었다.

잔꾀뿐이 아니라, 관동지진 때의 학살을 보면 포악하고, 생체실험하는 것을 보면 잔인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것을 보면 무도하고, 위안부를 보면 엽기 변태적이고 음습(陰濕)하다.

프랑스 사람들이 독일을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고 하는 것과 반대로 우리는 "용서는 못 하지만 모두 잊어버리자"라 하고 있다.

그것은 정말로 '청산'은 안 하겠다는 뜻인가?

을사늑약 119년, 광복 79년, 한일 수교 59년,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한 해다.

그런데 우리가 느끼는 최근의 일본은 옛날과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오히려 지금 시대를 바라보는 우리의 느낌은 100여년 전에 미소 중일 네 열강이 다퉈 한반도의 운명에 관여하여 이권을 챙기려던 물밑 논쟁이 재연되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은 지금 그때와 똑같이 국수주의, 우경화, 재무장의 순서를 밟고 있다. 그래서 일본제국주의 잔재의 청산은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지금, 정말 잘 마무리돼야 하는 것이다.

* 자세한 내용은 김원 건축가의 저서 '행복을 그리는 건축가', '꿈을 그리는 건축가', '못다 그린 건축가'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정리 : 이세영·성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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