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 상대 후보의 ‘멍청한’ 답변 47초...해리스 정치생명 살렸다”

이철민 기자 2024. 8. 19.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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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T, 2010년 캘리포니아 법무장관 후보 토론회서
”당선땐 장관연봉·공직연금 다 받나” 질문에
공화 후보 “다 내가 번 것이니까 받겠다”
해리스는 답 피하고 상대 발언 광고로 써
앞서던 공화 후보, 결국 전체의 0.85% 표차 패배

기자의 질문과 상대 공화당 후보의 답변까지 걸린 시간은 딱 47초였다. 지금은 기억하는이가 드물지만, 2010년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검찰총장 겸임) 선거 토론회에서 상대 공화당 후보의 “솔직하지만 치명적이고 멍청했던 답변”이 카멀라 해리스의 정치생명을 살렸다고, 뉴욕타임스가 18일 보도했다.

해리스는 같은 질문에 즉답을 피했고, 상대의 답변을 자신의 TV 선거 광고에 썼다. 역사는 바뀌었고, 해리스는 이후 주 법무장관, 주 연방상원에 이어 10년 뒤 부통령이 됐고 이제 미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됐다.

2010년 11월 2일 미 중간선거에 치러진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 선거에는 공화ㆍ민주 양당에서 모두 현직 지방검사장(district attorney)이 출전했다. 민주당에선 45세의 샌프란시스코 지방검사장 해리스가, 공화당에선 63세의 로스엔젤레스 지방검사장 스티브 쿨리가 맞붙었다.

이미 민주당에서 샛별로 떠오르며 ‘여성 오바마’라 불렸지만, 해리스는 여러모로 불리했다. 2010년 미국 사회는 고율 과세와 정부의 민간 기업 통제에 반대하고 더 강력한 이민 통제를 요구하는 보수 포퓰리즘 ‘티 파티(Tea Party)’ 운동이 휩쓸고 있었다. 게다가 공화당 후보 쿨리는 민주당 아성인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지방검사장 선거에서도 2000년 이래 세 번 승리한 인물이었다. 공정하고 부패 척결 의지가 강하다는 평을 받았다. 10월 들어 쿨리는 여론 조사에서 근소하게 앞서고 있었다. 해리스는 돈도, 시간도 부족했다.

그리고 10월 5일 데이비스 소재 캘리포니아대 로스쿨의 한 모의 법정에서 후보 토론회가 열렸다. 별로 이목을 끌지 못하는 행사였다. TV 생중계도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이슈가 있었다. 질문에 나선 지역 언론사 기자들은 “주 법무장관에 당선되면 연봉을 받고, 동시에 지방검사장 퇴직에 따른 연금도 받겠느냐”고 묻기로 했다. 당시 지방검사장이었던 두 후보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질문이었지만, 공직 기간이 훨씬 긴 쿨리는 예상 연금 수령액도 훨씬 많았다.

이 질문은 공화당 경선에서도 쿨리를 따라다녔다. 뉴욕타임스는 “주 법무장관의 연봉은 15만 달러로, 쿨리의 지방검사장 연봉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만약 쿨리가 주 법무장관 연봉을 받고 공무원 연금을 받으면 연간 40만 달러 이상의 소득이 생긴다”고 전했다.

그리고 토론회가 시작한 지 47분이 됐을 때, 공화당 후보 쿨리는 이 질문에 “솔직하지만, 치명적이고 멍청한(뉴욕타임스 표현)” 답변을 했다.

“양쪽 다 받을(double-dip) 생각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쿨리는 주저없이 “그렇다”고 했다. 해리스는 쿨리의 눈길을 피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쿨리는 말을 이어갔다. “그건 내가 번 것이요” “내 연금 수령 권리는 38년의 공직 생활에서 뭐가 됐든 내가 확실히 번 것이고, 나는 믿기 힘들 정도로 낮은 주 법무장관 연봉을 보충하기 위해 그 연금에 의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해리스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진행자가 물었다. “보태고 싶은 말 없어요?” 해리스는 자신의 연금 수령 의사는 밝히지 않고, “스티브(쿨리), 응원해요”라며 호탕하게 웃어 넘겼다. 쿨리는 “당신도 나 정도 경력이 되면 원할 것”이라고 했지만, 해리스는 “당신이 번 거잖아요. 그건 분명하죠”라며 웃었다.

당시 쿨리의 답변을 직접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토론회장에 있던 해리스의 선거 참모들은 ‘대어(大魚)’를 낚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캘리포니아주 가구의 연평균 소득은 5만 4280 달러였다.

곧 캠프의 광고제작자에게 이 토론회 영상을 보라며 “우리가 막 이긴 것 같은데, 광고 좀 만들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다. 기자의 질문과 쿨리의 답변에 걸린 시간은 30초 TV 광고에 거의 완벽하게 맞아 들어갔다. 마지막에 한 줄만 붙이면 됐다. “한 해 15만 달러면 충분하지 않나요?”

하지만, 해리스 진영의 은행 잔고는 85만 달러에 불과했다. 10만 달러 빚도 있었다.이 돈으론 주 전체에 1주일 광고하기도 힘들었다. 그래서 쿨리의 아성인 로스엔젤레스 TV 광고에 쏟아부었다. 원래 해리스는 자신의 비전 제시로 마지막 선거 TV 광고를 마무리하려고 했지만, 이 네거티브(negative) 광고에 올인하기로 결정했다.

반대로 미 공화당 전국 조직은 장기적으로 해리스가 줄 수 있는 위협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헤라클레스가 아직 요람에 있을 때 죽일”(미 공화당 선거전략가 표현) 100만 달러짜리 TV 광고를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 지방검사장인 해리스가 경찰관 아들을 잔인하게 죽인 갱 멤버에게 사형 구형하기를 거부한 것을 비난하는 어머니의 증언이었다.

그러나 공화당 후보 쿨리에게는 불운하게도 해리스의 네거티브 광고 시작에 이어, 10월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캘리포니아주를 방문해 해리스 유세를 도우면서 지지율 차이는 계속 좁혀지고 있었다.

개표일 밤까지 박빙의 차이였다. 쿨리는 승리를 선언했고 지역 유력일간지는 ‘쿨리가 이겼다’는 제목으로 다음날 신문을 발행했지만, 쿨리는 결국 전체 유효표의 0.85% 차이로 졌다. 자신이 세 번이나 승리하며 8월까지 10% 포인트 이상 앞섰던 로스엔젤레스 카운티에서도 14표 차이로 졌다.

쿨리의 그 ‘멍청한’ 답변이 없었다면, 해리스가 패배했을까. 공화당 전략가들은 쿨리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피했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쿨리의 선거전략가는 뉴욕타임스에 “쿨리는 정직해서 피할 수 없었고, 그게 정치적으로는 약점이었다”고 말했다.

해리스의 TV 광고를 제작한 마크 퍼트넘은 “마치 내가 신(神)인 양 ‘그 답변이 없었으면 해리스가 졌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답변은 결정적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해리스의 캠프 책임자였던 에버럴 에이스 스미스는 이 신문에 “모두가 마치 승리가 ‘당연했던 것처럼’ 역사를 쓰지만, 해리스가 주 차원에서 처음 도전한 그 선거는 결코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편, 해리스를 겨냥해 100만 달러짜리 TV 광고를 제작했던 공화당의 당시 선거전략가는 “해리스로선 정치적 생명이 끊길 수 있는 임사체험(臨死體驗)의 순간이었다”며 “그때 졌다면, 해리스는 지금 결코 대통령 후보가 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선거가 끝나고 몇 달이 지나, 공화당 후보였던 쿨리는 자신에게 그 질문을 했던 기자를 식사에 초대했다. 기자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식사가 어느 정도 진행됐을 때, 쿨리는 테이블 너머로 기자에게 악수를 청하며 “고맙다”고 했다. “당신이 그 질문 안 했으면, 나는 (당선돼서) 새크라멘토(주도ㆍ州都)로 가야 했을 것 아니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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