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연과 지연을 없애면 생기는 일 [취재파일]

임태우 기자 2024. 8. 19. 12:5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남녀 단체 우승, 혼합복식 우승, 남자 개인 우승, 여자 개인 우승.

한국 양궁 대표팀은 이번 파리 올림픽 5개 모든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냈습니다. 여자 단체는 88올림픽부터 40년째 세계 최정상 자리를 지키는 위업도 달성했죠. 양궁 대표팀이 거둔 눈부신 성과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현대차그룹 회장이자 양궁협회를 이끌고 있는 정의선 회장은 전 종목 석권 비결을 묻는 질문에 "선대 회장(정몽구 명예회장)의 노력을 통해 구축된 양궁협회의 시스템"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바로 '시스템'입니다.

남수현, 임시현 선수(가운데)

우리는 흔히 시스템이라 하면 특정한 개개인의 능력이나 실력에 의존해 결과가 금세 뒤바뀌는 체계가 아니라, 정해진 원칙에 따라 움직이고 안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체계를 말합니다. 양궁협회 시스템에서는 누가 선발됐든 간에, 일단 태극 마크를 달고 출전한 선수는 최소 메달을 따낼 거란 국민 기대를 저버린 적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철저히 실력 위주로 선발하는 한국양궁협회 시스템을 주목합니다. 출신 학교나 지역에 상관없이 오직 기량만으로 선수를 뽑습니다. 심지어 현직 국가대표라도 매번 새로운 선발전을 거쳐야 합니다. 과거 금메달을 많이 따고 협회장과 아무리 친하더라도 활을 못 쏴서 예선에서 떨어지면 그냥 끝입니다. 옛날에 뛰었던 선수가 심기일전하고 실력으로 부활하는가 하면, 직전 대회 2관왕 선수가 탈락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전훈영 선수

실력 위주의 선발 시스템이 훌륭한 성과로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물음에 대한 실증적인 해답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세계경제포럼(WEF)의 '2020년 글로벌 사회 이동성 지수' 보고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보고서는 당시 82개 국가 대상으로 보건과 교육, 기술, 고용, 제도 등 10개 부문 51개 지표를 평가해 100점 만점 기준으로 '사회 이동성 지수'를 산출했습니다. 각 국가의 사회 이동성 수준을 측정 비교하고, 이를 향상하기 위한 정책적 제안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사회 이동성은 한 사회에서 개인이나 가족이 사회경제적 지위를 바꿀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부모의 사회적 지위나 물려준 재산에 관계없이 순전히 자신의 노력으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합니다. 가난한 집 자녀가 공부해서 의사가 되거나 평범한 배경의 직장인이 노력해서 기업 고위층으로 성장하는 것이 바로 사회 이동성의 예입니다.

조사 결과, 덴마크(85.2점·1위), 노르웨이(83.6점·2위), 핀란드(83.6점·3위), 스웨덴(83.5점·4위) 같은 북유럽 국가들이 가장 높은 사회 이동성 지수를 기록했습니다. 한국(71.4점·25위)과 일본(76.1점·15위), 싱가포르(74.6점·20위) 등의 아시아 국가는 유럽 선진국들보다 순위가 대체로 낮았습니다. 사회 이동성이 제일 높은 덴마크에서 저소득층이 중산층으로 올라서기까지 2세대가 걸리는 반면, 우리나라는 5세대가 걸릴 걸로 예상됐습니다.


세계경제포럼은 국가들이 사회 이동성 지수 점수를 10점 높인다면, 조사 시점에서 10년 뒤인 2030년까지 4.41%의 추가 GDP 성장을 얻을 걸로 분석했습니다. 그러면서 사회 이동성이 중요한 이유를 서론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회 이동성이 활발한 경제는 더 균등하게 공유된 기회를 제공합니다. 즉, 사회경제적 배경, 지리적 위치, 성별 또는 출신에 관계없이 동등하고 실력 중심의 기반을 제공합니다. 국가의 소득 불평등과 사회 이동성 지수 사이에 직접적이고 선형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낮은 사회 이동성은 역사적 불평등을 고착화하고, 더 높은 소득 불평등은 더 낮은 사회 이동성을 촉진합니다. 사회 이동성을 향상시키면 이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전환할 수 있으며 광범위한 경제 성장이라는 긍정적인 이점이 있습니다."

"Economies with greater social mobility provide more equally shared opportunities—namely, an equal and meritocratic footing irrespective of socio-economic background, geographic location, gender or origin. There is a direct and linear relationship between a country's income inequality and its social mobility score on the index. Low social mobility entrenches historical inequalities and higher income inequalities fuel lower social mobility. Enhancing social mobility can convert this vicious cycle into a virtuous one and has positive benefits on broader economic growth."


기업들이 블라인드 채용을 채택하거나 연공서열제 대신 능력 중심의 승진 제도를 갖추려는 노력도 사회 이동성을 개선하려는 맥락과 비슷합니다. 채용과 승진 과정에서 특정 대학 출신이나 연고의 우대, 인종 차별 등을 배제하고 능력 있는 인재들을 중용할수록 기업 경쟁력이 점차 올라갑니다. 이런 기업은 결과적으로 구성원의 다양성도 증가합니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인 맥킨지앤드컴퍼니는 다양성과 기업 성과 간 상관 관계를 주제로 지난 10년간 여러 차례 보고서를 냈습니다. 가장 최근에 낸 작년 12월 보고서인 'Diversity matters even more'에서는 여성 임원 비율이 상위 25% 기업의 재무성과가 전체 평균과 비교해 2020년 11%, 2023년 18% 각각 더 높았다고 분석했습니다. 또, 인종 다양성이 상위 25% 기업 성과는 2020년 20%, 2023년 27% 각각 더 높았습니다. 기업의 다양성 증진과 성과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가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성의 영향력은 점차 증가하는 걸로 나타났습니다.


결론적으로, 양궁협회의 선수 선발 및 세대교체 시스템은 높은 사회 이동성을 가진 사회의 축소판인 셈입니다. 양궁협회는 공정한 기회와 실력 중심 평가, 지속적인 경쟁, 과거 실적의 무반영, 다양한 인재 발굴 등을 통해 사회 이동성의 원칙을 이상적으로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은 올림픽에서 지속적인 성공을 내는 밑거름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현실은 양궁협회 같지 않습니다. 앞서 세계경제포럼 조사에서 사회 이동성이 낮았던 수많은 나라들은 소수의 기득권이 불평등을 조장해 이익을 독점하려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양질의 교육에 대한 접근성이 떨어져 저소득층 자녀들의 교육 기회가 제한되고, 사회안전망 부족으로 실업과 질병, 노령 등에 대한 보호가 미흡합니다. 성별과 인종, 출신 지역 등에 따른 차별과 편견도 심각합니다.

체육단체나 협회 같은 규모의 작은 조직이라면, 이를 후원하는 기업이 얼마든지 시스템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개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크고 복잡한 기업이나, 국가 규모의 시스템을 개선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국가들이 겪었던 민주주의 역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플로리안 운루

실력 위주의 선발 시스템이 항상 우월한 것만도 아닙니다. 이 시스템 속에서는 끊임없는 경쟁과 도태에 대한 두려움으로 구성원들의 스트레스가 증가하고, 양보와 협력 같은 공동체 미덕이 무시된 채 실력 만능주의에 매몰될 우려도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양궁협회 시스템은 스포츠 같이 특정한 분야의 성과를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 정도에 적합하지, 거대 복잡계인 사회 전반으로 일반화할 수 없다는 반론도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양궁협회 시스템이 주목받는 이유는 이번 올림픽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어떤 희망을 봤기 때문입니다. 어떤 희망일까요? 학연이나 지연, 성별에 관계없이 오직 실력으로만 평가받는 사회에 대한 기대가 아닐까요? 지금 우리 경제는 점차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고 있고 고용은 제자리걸음이며 부동산 같은 자산 시장 양극화는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진정 원하고 기대고 싶은 미래 사회의 모습을 양궁협회 시스템에서 본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임태우 기자 eight@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