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위기론’에도 부동의 1위 지킨 이재용 [2024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2위 최태원, 3위 정의선…고(故) 정주영 등 선대회장들도 약진
(시사저널=정윤성 기자)
역시나 한국 경제를 움직이는 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3인방이다. 그만큼 세 사람이 이끄는 그룹의 성적표가 한국 경제지표와 직결된다는 얘기다.
그중에서도 이 회장은 급변하는 글로벌 시장에서 최전선에 서있다. 올해도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조사의 경제인 또는 경제관료 부문에서 전문가와 일반인 1000명 중 786명이 이 회장을 지목했다. 지목률은 전문가 77.2%, 일반인 80.0%다. 2016년부터 9년 연속 1위다. 대외 여건 악화와 실적 부진 여파로 '삼성 위기론'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이 회장의 역할을 기대하는 모습이다.
위기를 기회로…'초격차' 되찾으려는 이 회장
이 회장이 삼성전자 회장으로 승진한 시점은 절묘했다. 부회장 시절 반도체 부문의 호실적으로 한국 경제를 이끌던 삼성전자에 위기가 닥치기 직전이었다. 이 회장이 2022년 10월 승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삼성전자는 위기를 맞았다. 반도체 불황이 덮치면서 이듬해 삼성전자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게 됐다. 2022년 1분기 14조원에 달하던 영업이익은 2023년 1분기 6402억원으로 주저앉았다. 연간 영업이익은 6조319억원에 그쳤다. 리먼 사태가 덮쳤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처음으로 영업이익이 10조원 밑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간 한국 수출의 중심에 있던 반도체가 문제였다. 반도체 부문 적자만 15조원에 달했다. 일각에선 이 회장의 반도체 의존도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AI 시장에 따른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수익 제품의 개발 적기를 놓치면서 경쟁자인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내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파운드리에서도 선두 TSMC와의 격차를 좀처럼 좁히지 못했다.
사실 위기는 예견된 상황이었다. 정부도 회장 승진에 앞서 특별 사면으로 이 회장의 발목을 잡아온 사법 리스크를 일부 해소해 줬다. 이 회장이 직접 책임을 지고 반도체에 불어닥친 위기를 극복하란 의미였다.
이 회장은 위기를 기회로 삼겠다며 경영 체제 혁신을 추진하고 있다. 삼성은 지난 4월부터 계열사 임원들에 대해 주 6일 근무제를 시행하며 위기경영 태세를 강화하고 있다. 5월엔 반도체 부문 수장을 전격 교체했다.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DS부문장에 전영현 전 미래사업기획단장을 선임했다.
투자에서도 승부수를 띄웠다. 지난해 부진한 실적을 기록하는 상황에서도 연구개발(R&D)에 사상 최대인 28조3000억원을 투입했다. 미국 텍사스주에 새로 짓는 최첨단 반도체 공장엔 기존 투자액의 두 배가 넘는 440억 달러(약 59조5000억원)를 증액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국내에선 평택 4공장에 신규 메모리 라인을 증설하기로 했다.
이 회장의 승부수가 통한 걸까. 올해부턴 재도약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 1분기에 시장 전망치를 크게 웃도는 6조6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2분기 영업이익은 10조4000억원을 기록하며 10조원대 복귀에 성공했다. 특히 부진했던 반도체 사업에서 영업이익 6조4500억원을 기록하며 개선세를 보였다. 하반기 HBM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면 반등세에 탄력이 붙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AI 보폭 넓히는 최태원의 커지는 영향력
이 회장은 적극적인 경영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그는 지난 2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부당 합병 의혹 사건으로 기소된 지 3년5개월 만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경영 활동의 부담을 더 털어낸 그는 지난 6월 미국 출장길에 올라 메타, 아마존, 퀄컴 등 미국 빅테크 최고경영자(CEO)를 잇달아 만나며 글로벌 경영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최근엔 12년 만에 올림픽에 참여해 피터 베닝크 ASML CEO를 비롯한 글로벌 기업인들과 반도체·IT 등 첨단 산업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글로벌 고객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강화해 반도체 부문 '초격차'를 되찾겠다는 목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해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지목률은 19.6%로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일반인 조사에서도 26.0%의 지목률로 같은 순위에 자리하며 입지를 굳혔다. SK그룹은 2022년부터 현대자동차를 제치고 재계 서열 2위를 유지하고 있다. 국내 경제에서 최 회장의 영향력도 커지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SK그룹 영향력의 중심엔 최 회장의 전략이 깔려 있다. 최 회장은 지난 몇 년간 SK하이닉스를 초우량 기업으로 키웠다. 그는 그룹 안팎의 반대에도 2012년 당시 적자 기업이던 하이닉스를 인수했다. 이후 하이닉스는 10년간 영업이익만 34배 증가하며 그룹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다.
최 회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광폭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최 회장이 올해 글로벌 AI 거물들과 직접 만나 전략과 협력을 논의한 횟수만 7차례다. 샘 올트먼 오픈AI CEO와의 회동을 시작으로,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웨이저자 TSMC 회장 등을 잇달아 만났다. 올해 초 열린 세계 최대 전자·IT전시회 'CES 2024'를 비롯해 공식 석상에 등장할 때마다 AI 비즈니스의 중요성을 핵심으로 꼽고 있다.
최 회장의 전략은 최근 분수령을 맞았다. 그룹 리밸런싱(사업 재편)을 본격화하면서다. 그간 공격적인 성장 전략의 여파로 그룹이 비대해지면서 경영 효율성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2020년 325개 수준이던 SK그룹의 연결회사는 지난해 말 기준 716개로 두 배를 넘겼다. 이로 인해 연결회사 간 경쟁이 심화됐다. 중복 투자 등의 문제점도 계속 발견됐다.
최 회장은 그룹 차원에서 관리가 가능한 수준으로 연결회사를 정리하기로 했다. 최근 SK이노베이션과 SK E&S가 합병하며 성공적인 리밸런싱 신호탄을 쐈다. AI를 중심으로 한 SK그룹 리밸런싱의 성공 여부가 향후 그의 영향력을 판가름할 전망이다.
지난해 조사에서 4위를 기록한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올해 3위(9.4%)로 올라섰다. 그 역시 전문가와 일반인 조사에서 순위가 같았다. 그는 2020년부터 그룹 총수로서 경영을 주도하고 있다. 특히 취임 3년 만에 현대차그룹을 글로벌 톱3 완성차 업체로 발돋움시켰다. 2020년 잠시 4위에 오른 것을 제외하면 줄곧 5위권에 정체됐던 만큼 현대차그룹이 도약에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 회장은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미래 모빌리티를 향한 도전에 더 힘을 쏟겠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전기차를 미래 핵심 먹거리로 보고 '전동화'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향후 10년간 연평균 11조원 수준의 대규모 투자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연간 전기차 200만 대 판매를 목표하고 있다. 미래 사업 추진에도 매진해 수소, 자율주행, SDV(Software Defined Vehicle), 로보틱스, AAM(미래항공모빌리티) 등 미래 모빌리티 산업의 주도권 확보도 놓치지 않을 계획이다.
정 회장은 2005년부터 대한양궁협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번 파리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양궁이 5개 전 종목을 석권하면서 정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관심이 쏠렸다. 현대차그룹은 국내 단일 종목 스포츠 단체 후원 중 최장 기간인 40년간 한국 양궁을 지원해 왔다. 특히 정 회장이 이번 올림픽 개막 전부터 선수들의 휴게 공간, 식사, 컨디션까지 직접 챙기며 도운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의 박수를 받고 있다.
경제 관료 중에선 최상목·이창용 10위권
이와 더불어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5위(5.2%)를 기록한 점도 눈에 띈다. 정 전 회장은 지난 조사에선 10위를 기록한 바 있다. 최근 재계에 '혁신'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신사업을 적극 발굴해 경제의 기틀을 세운 선대회장들의 철학도 관심을 받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정 전 회장은 1970년대 열악한 산업 환경에도 독자적인 국산 자동차인 '포니'를 만드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한 바 있다. 현대차그룹 역시 정 전 회장의 이 같은 경영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11월 울산 EV 전용공장 기공식 행사에서 인공지능으로 복원된 정 전 회장의 육성 메시지를 활용해 현대차의 헤리티지(역사적 가치)를 이어가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지난해 8위였던 고(故)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이 6위(5.0%)로 올라선 것도 유사한 맥락으로 풀이된다.
경제 관료 중에선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4위·6.2%)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공동 6위·5.0%)가 10위권 내에 들었다. 지난해 12월 취임한 최 부총리는 최근 티몬·위메프 정산 지연 사태를 비롯해 산적한 민생 현안을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 총재도 한국 경제의 변곡점에 서있다. 연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통화정책 전환이 예상되면서 이 총재의 역할이 한층 중요해졌다. 한은 기준금리는 3.50%로 미국보다 2%포인트 낮은 수준이지만 고금리 장기화로 국민의 피로는 나날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중대한 결단을 내릴 시기가 코앞에 다가왔다는 평가다.
이 밖에 이번 조사에서는 구광모 LG 회장이 8위(4.8%), 정용진 신세계 회장이 9위(3.4%)에 이름을 올렸다. 구 회장은 지난해 5위, 정 회장은 지난해 7위에서 조금 밀려났다. 다만 구 회장은 일반인 조사에서는 4위(8.0%)를 기록하며 전문가 조사 결과와 차이를 보였다. 아울러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10위권에 새로 진입했다. 지난해 9위를 기록한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은 순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2024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어떻게 선정됐나
시사저널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설문조사는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에 의뢰해 조사했다. 그동안은 행정관료·교수·언론인·법조인·정치인·기업인·금융인·사회단체·문화예술인·종교인 등 10개 분야에서 각 100명씩 전문가 총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는데, 2022년부터 비중을 조정해 10개 분야에서 50명씩 총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대신 일반 국민 조사를 신설해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올해 조사는 7월2일부터 7월19일까지 진행됐다. 전문가 조사방법은 리스트를 이용한 전화 여론조사로 이뤄졌다. 일반 국민 조사는 온라인 조사로 실시됐다. 표본오차는 95% 신뢰 수준에 ±4.4%포인트다. 올해 6월말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 통계 기준으로 가중값을 부여했다. 두 조사 모두에서 구조화된 질문지를 조사도구로 활용했다. 문항별 최대 3명까지 중복응답을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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