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플랫]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낙태죄 폐지 운동의 오랜 구호다.
임신중지는 개인의 신체, 그 신체가 놓인 가족 구성, 함께 임신을 한 남성과의 관계, 출산 후 양육 환경과 모자녀가 처할 사회적 상황 등 연속적인 시간 속에 놓여 있는 관계적 사건이다. 그런데 국가가 이를 무시하고 단편적인 행위에 집중하여 그에 ‘범죄’라는 낙인을 찍는다면, 그건 국가의 문제라는 의미였다.
대한민국에서 낙태죄가 사라진 지 5년이 지났지만, 국가는 여전히 임신중지를 ‘죄’로 다루는 듯하다. 최근 벌어진 사건은 이런 심증을 확인시켜준다. 20대 여성 A씨가 36주차 태아를 낙태하는 과정을 담은 브이로그를 SNS에 올리면서 한국사회가 발칵 뒤집힌 뒤, 보건복지부가 경찰에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의뢰한 것이다. 결국 A씨와 병원장이 형사입건됐다. 죄목은 살인이었다.
복지부는 2021년 판례를 참고했다고 알려졌는데, 이는 임신중지 시술로 산 채로 태어난 34주 태아를 살해한 의사에게 살인 혐의 유죄가 확정된 케이스다. 그래서 경찰은 현재 태아가 모체에서 나올 당시 ‘살아 있었나’를 밝히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그에 따라 살인죄 적용 여부가 갈리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기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죽어서 나왔다면 무죄, 살아서 나왔다면 유죄”인 셈이다.
📌[플랫]‘낙태죄 폐지’ 5년, ‘36주 임신중지’ 논란될 때까지 정부는 뭘 했나
복지부는 관련법을 제정하지 않은 국회를 탓하며 손을 놓고 있다가 세간의 이목을 끄는 사건에 달라붙어 ‘죄다, 아니다’를 따지며 직무유기에 땜질을 하고 있다. 아무리 여성부가 반여성부가 되고 노동부가 반노동부가 되는 시절이라지만, 복지부가 이토록 국민의 보건과 복지에 무관심할 수 있다니, 새삼 놀랍다. 전문가들은 “복지부는 국회의 입법을 마냥 기다릴 게 아니라 먼저 건강보험, 상담체계, 의사 교육과 관련한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러므로 이번 사건의 죄명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그건 형법 122조에 따른 직무유기죄. 피고는 정부다.
낙태를 여전히 죄의 관점으로 다루는 일부 언론도 문제다. 특히 종편에서는 이런 상황이 벌어진 구조적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는 어째서 이토록 ‘잔혹한 행위’가 벌어졌는가를 자극적으로 전시하는 데 집중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수사는 일종의 장르 관습이 되었다고 할 정도로 유사한데, 예컨대 “비정한 모정”이라거나 “돈벌이에 정신이 팔린 20대” 등이 단골 레퍼토리다. 더불어 이것이 생명의 존엄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런 언론이 A씨의 브이로그에서 발췌해서 보도하길 즐기는 부분은 이런 내용이다. “심장 뛰는 거 봐요, 이 정도면 낳아야 된다.” A씨가 시술을 거절한 병원 의사에게 들은 말이다. 이를 통해 ‘살인자’의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더불어서 기이한 대비 구도를 내세우곤 하는데 “엄마들의 분노”라든지, “믿기지 않습니다, 부모가 맞는지” 등의 한탄을 통해 ‘정상부모 vs 비정상부모’의 갈등이 제시된다. 이런 구도 안에서 관련 법률 제정을 가로막아 비극을 초래한 것이 보수 기독교의 조직적인 움직임이라는 사실은 사라져버린다.
현재 법제도 공백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두 가지 방향이다. 하나는 포괄적인 성교육 시행 등을 통해 임신중지를 최소화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필요할 때에는 안전하고 안정적인 시술을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자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낙태죄 폐지 후 낙태를 처벌할 법적 근거가 사라졌음을 개탄하는 목소리다. 이들은 처벌이 임신중지를 줄이는 데 얼마나 효과 있는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도 대지 못한 채(왜냐면 실제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사회가 타락했다고 겁을 주고 윽박지른다.
전자와 후자 가운데 어떤 태도가 더 국민의 보건 복지 함양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까? 정부가 더 늦기 전에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를 바란다.
▼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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