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저 상자 속으로 출근하는 사람들 [한주를 여는 시]
이승하의 ‘내가 읽은 이 시를’
김영곤 시인의 ‘상자의 중력’
물류 노동자의 고달픈 하루
과로와 노동의 흐릿한 경계
상자의 중력
블랙홀 같은 물류센터로 자진해 빨려들어간 일용직들, 지역별로 하나씩 꽂힌다 차가운 컨베이어를 타고 상자들이 빠른 보폭으로 행차한다 펄떡이며 터질 듯이 우우우 쏟아져 나오는 상자들, 쌓고 쌓고 아무리 쌓아도 미어터지는 상자, 나를 놓쳐버린다 의식 한 귀퉁이가 닳아버린 일용직 상자, 손가락을 물어뜯긴다
상자가 떨어진다 맨바닥에 철퍼덕 눈물이 부서진다 깨진 거울이 신음소리를 낸다 예리한 감정으로 손목을 긋는 상자도 있다 컨베이어 틈에 끼어 실핏줄이 터지고 생피 철철 흘리는 상자 끝내 몸이 으깨져버린 상자. 인간은 고통과 결핍을 가장 잘 느끼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 짐승. 하지만 극한 고행보다 더 비참한 건 살처분 되는 것이다. 나를 착취한다 불타버릴 때까지
바깥은 첨단으로 풍요로워지는데 일용직 상자들도 갈수록 더 수두룩하다 손가락 하나 싹둑 잘려나가는 것보다 숟가락이 사라지는 것, 상자 속으로 출근 못 하는 걸 더 두려워하니까 상자가 끝이 없듯 빈 상자도 끝이 없으니까 상자에 서로 달라붙으려는 욕망은 영원하니까
「존재의 중력」, 코드미디어, 2022
김영곤 시인의 직업은 특이하게도 마술사다. 전국 방방곡곡의 각급 학교와 단체에 가서 마술을 보여주고 출연료를 받는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 시대가 찾아 왔을 때 어디에서도 그에게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그래서 23일 동안 완전 실업자가 돼 살아가다가 물류센터에서 일을 했다. 18개월 동안 그는 노동을 했고 다시 마술을 보여줄 수 있냐는 연락이 오기 시작하자 물류센터 일을 그만두고 본연의 일로 돌아갔다.
우리는 차를 세워놓고 박스를 내려놓는 택배기사를 종종 본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기도 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퀵서비스 기사나 배달일꾼도 자주 본다. 그래서 물류센터에서 박스를 분류하는 이들이 있음은 잘 모른다.
김영곤 시인은 시집 「존재의 중력」을 내기 전에 산문집 「상자의 중력」을 냈는데 바로 18개월 물류센터 체험담을 쓴 것이었다. 시집을 내면서 한 편의 시를 산문집과 같은 제목으로 했다. 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일용직 사원들의 애환을 다룬 시다.
아마도 지역별로 분류할 것이다. 서울만 하더라도 구區가 얼마나 많고 로路가 얼마나 많은가. 박스들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굴러올 때 낚아채 지역별로 쌓았다 옮기는 일을 그대가 한다고 가정해보자.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길쭉한 것과 네모난 것, 주소가 확실한 것과 희미한 것 등 가지각색에 천차만별일 것이다. 상자를 떨어뜨리면 주워야 할 것이고 넘어지면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자기 키의 몇 배나 되는 박스를 옮겨야 할 것이다.
이 시는 특징은 상자의 의인화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 다르듯 상자도 감정이 제각각이다. 예리한 감정으로 손목을 긋는 상자, 컨베이어 틈에 끼어 실핏줄이 터지고 생피를 철철 흘리는 상자, 끝내 몸이 으깨져버린 상자가 있다. 반면 인간은 고통과 결핍을 잘 느끼는 능력을 갖고 태어난 짐승이다.
"하지만 극한 고행보다 더 비참한 건 살처분된다는 것"이다. 실수를 자꾸 하면 해고된다. be fired, 혹은 be dismissed. 몸살이 나 결근하면 바로 내 자리를 다른 사람이 차지한다. 손가락 하나 싹둑 잘려나가는 것보다 숟가락이 사라지는 것이 더 두렵다.
내일 상자들 속으로 출근하지 못하면 식구가 굶는다. 상자의 중력에 아랑곳하지 않고 상자를 분류하고 쌓고 모아서 기사에게 전해줘야 하는 물류센터의 노동자들이 있다. 그들이 과로사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김영곤 시인은 이 시를 썼을 것이다.
이승하 시인
shpoem@naver.com
Copyright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