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그림에도 ‘천경자 색채’ … 틀 깬 여성작가 23인의 길
10년 만에 재단장한 상설전
기행회화 중심 드로잉 30점
물리·지리·문화 경계 허물어
천경자 영향받은 동료·제자
독자적 작품세계 함께 조명
베트남전 종군화가때 그린
‘꽃과 병사와 포성’ 첫 공개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경계 없이 이동하는 바람은 한계를 모른다. 한국 현대미술에서 ‘바람’ 같은 존재를 꼽는다면, 천경자(1924∼2015·사진)를 빼놓을 수 없다. 20세기 한국 채색화 분야에서 독자적 화풍을 구축한 천 작가는 활동 초기부터 ‘자유로운 창작과 개성’을 중시했고, 자신과 작품을 어떠한 틀에도 가두지 않았다. 한마디로 ‘바람 같은’ 삶과 예술. 1980년대 자신이 쓴 여행 수필의 제목처럼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 뚜벅뚜벅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 천 작가.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특별한 전시 2개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10여 년 만에 재단장한 천경자 상설 전시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와 천경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동료, 제자 등 여성 작가 23인의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이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천경자의 ‘바람 같은’ 삶과 예술 = 서울시립미술관은 1998년 천경자 화백의 작품 93점을 기증받은 후, 2000년대 초반부터 ‘천경자의 혼’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상설 전시를 열고 있다. 따라서 ‘천경자 미술관’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 이번 전시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는 10여 년 만에 재단장해 선보이는 새로운 상설전이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작가가 남긴 ‘기행 회화’를 중심으로 회화, 드로잉 등 30점을 선보인다.
오랜만의 새단장인 만큼, 그동안 일반 관람객과의 만남이 드물었던 작품을 대부분으로 구성했다. 총 4개 섹션으로, 눈여겨볼 것은 ‘꿈과 바람의 여로’ 부분. 중남미 여행 중 잉카문명 발상지인 페루 쿠스코에서 라마를 그린 ‘구스코’(1979), 카리브해 연안으로 스케치 여행을 떠나 그린 ‘자마이카의 고약한 여인’(1989) 등이 눈에 띈다.
이국적인 지역을 방문했을 때의 그림뿐만 아니라, 해외 문학과 공연 등 작가의 예술적 관심이 드러나는 ‘예술과 낭만’ 섹션도 눈길을 끈다.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배경인 ‘폭풍의 언덕’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 마거릿 미첼 생가에 가서 그린 작품들도 있다. 이밖에, 채색화와 여인상으로 구성한 ‘환상과 정한의 세계’, 집필한 수필집을 정리한 ‘자유로운 여자’ 등 물리적, 지리적, 문화적으로 경계 없이 넘나들며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천경자의 인생 전반과 작품 세계가 펼쳐진다.
◇천경자와 함께 ‘예술의 길’을 낸 여자들 = 기획전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은 천경자를 포함한 23인의 여성 작가들의 작품 세계를 살핀다. 당시 이들이 처한 상황은 복잡하고 모순적이며, 도전적이었다. 천경자가 활동하던 시기 동양화단의 분위기는 ‘왜색 탈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나, 천경자는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는 ‘채색화=일본화’라는 편견에도 채색화를 꿋꿋하게 그리며 자신의 작품을 ‘한국화’라는 틀에 가두지 않았다. 이러한 철학은 동시대 여성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류민자, 이숙자, 오낭자, 이화자 등 제자들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번 전시는 천경자의 현대적 감각, 독보적 철학을 부각한다. 23인에 포함된 천경자의 작품은 특히 더 흥미롭다. 그는 베트남전에 보내진 종군 기록화가 중 유일한 여성 작가였는데, 그때 그린 폭 185㎝, 높이 284㎝의 대작 ‘꽃과 병사와 포성’도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작품은 국방부 소장으로, 사실적인 묘사라기보다는 다소 추상적이고 평화롭게 그려진 게 특징이다. 미술관 관계자는 “전쟁 현장보다 자신의 취향과 정체성을 더 강하게 드러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천경자가 1950년대 옷감집을 구경하는 자신을 그린 ‘옷감집 나들이’도 최초로 선보인다. 여러 옷감을 구경하는 작가의 옆모습과 동행한 어머니의 뒷모습이 담겨있다.
또한, 전시는 천경자뿐만 아니라 다른 22인 여성 작가들이 당시 짊어졌던 과제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이들은 왜색 탈피와 전통 계승, 민족 의식 반영 등 당시 동양화 작가들이 직면한 문제뿐만 아니라 가사와 양육까지 병행해야 하는 존재들이었다. 동시에, 보수적이고 정형화된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양식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하며 ‘작가’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이를 증명하는 그림들, 즉 장상의의 ‘다시래기’와 ‘번뇌’, 4·19 혁명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문은희의 ‘무제’, 군사독재 시기 교련 수업을 주제로 한 이숙자의 ‘캠퍼스 훈련생’ 등 총 86점의 다채로운 작품을 만날 수 있다. 11월 17일까지.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이종찬 몽니’ 광복회 위상 추락하나…대통령실 “독립운동 주체, 광복회 혼자만 아니다”
- 경찰, ‘나는 신이다’ PD 검찰 송치…“당사자 동의 없이 나체 공개”
- 회장은 47억·직원은 1억3천…업비트 임직원 지갑이 빵빵한 이유
- 父 고소한 박세리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심경고백… 무슨 일?
- 지리산 자락서 발견된 천종산삼 23뿌리…역대급 감정가 ‘대박’
- ‘세기의 미남’ 프랑스 영화배우 알랭 들롱 별세…향년 88세
- “삽으로 싸우라는 거냐”...러시아 징집병 가족들, 푸틴에 ‘분노’
- “해리스, 트럼프 제치고 대선 승리 가능성”
- “사진 보자마자 빵터졌다”…조민 결혼식 사진 공개에 지지자들 ‘와글’
- 교대 재학 시절의 여학생 외모 평가, 교사가 된 뒤에도 징계 대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