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익위 국장의 죽음 [한겨레 프리즘]

정환봉 기자 2024. 8. 19.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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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김건희 여사 명품 가방 수수 사건 조사를 지휘했던 김아무개 국민권익위원회 부패방지국장 직무대리의 빈소인 세종시 세종충남대병원 쉴낙원장례식장에 조화가 놓여 있다. 김채운 기자 cwk@hani.co.kr

정환봉 | 법조팀장

삶이 복잡하듯, 죽음 역시 그렇다. 말과 글은 터무니없이 단순하다. 그러니 죽음을 해설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침묵이 대체로 최선의 애도인 이유다. 그럼에도 어떤 소멸에는 언어가 필요하다. 사라짐이 질량을 남기는 경우다. 남은 자들이 그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까닭도 모른 채 짐을 질 수는 없다.

2017년 3월13일, 국민권익위원회 누리집에는 그의 고위공무원 승진 소식이 올라왔다. 지인들은 마땅한 일이었다고 한다. 마땅한 일에도 그는 무척 기뻐했다고 했다. 그 뒤로 2705일이 흐른 지난 8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권익위 누리집의 ‘인사 알림’은 그대로이지만 거기에 적힌 세 글자의 이름을 가진 이는 이제 없다. 그의 마지막 직함은 권익위 부패방지국장 직무대리였다.

비극에 이르는 길은 곱게 포장되어 있지 않다. 평탄한 길도 있었겠지만 자갈과 진창을 지나야 할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2705일 동안 겪어야 했던 모든 굴곡을 꼽아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마지막 돌부리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권익위는 지난 6월10일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수수 사건을 별다른 처분 없이 종결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생을 마감하기 59일 전이다.

친했던 이들은 입을 모은다. 그의 마지막 업무를 두고 대화를 했던 이들은 “괴로워했다”고 말한다. 그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이들도 “괴로워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나의 양심은 기체처럼 가벼워 순식간에 세상에 흩날린다. 괴로움은 잠시, 나머지 긴 시간은 세상 탓을 하면 된다. 텔레비전에 자주 나와 얼굴이 익숙한 많은 이들이 나와 같았다. 하지만 양심이 바위보다 무거운 이들도 있다. 그들에겐 시간은 제 편이 아니다. 바위는 가벼워질 수 없다. 그 위로 켜켜이 지층이 쌓여 깨어질 때까지 무게를 견뎌야 한다. 그도 그랬을 것이다.

약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래야 한다. 바위 없이 기둥을 세울 수 없고, 기둥 없이 집을 지을 수 없다. 무겁고 단단한 양심이 없다면 공정과 정의는 지탱할 자리를 찾지 못한다. 불공정과 반칙만 남은 곳에선 힘을 가진 자만 살아남는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누군가가 안간힘을 쓰며 무게를 견뎠다. 이제 그는 사라졌다. 그가 버틴 질량은 너무 늦게 우리의 몫이 됐다. 남은 자마다 감당할 무게와 역할은 다를 것이다. 가장 작은 공약수는 있다. 목격이다. 이 사건이 어떻게 끝을 맺을지 지켜보는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정치적 견해가 달라서도, 김건희 여사가 미워서도 아니다. 마땅한 애도다. 이 사건을 수사하는 검사의 몫은 더 무거울 것이다.

법은 때로 힘없는 자에게 비정하다. 오석준 대법관은 2011년 12월, 승객의 잔돈 800원을 챙긴 버스 기사의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권력엔 관대하다. 검찰은 2007년 12월, 대선 후보였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다스’ 실소유주 의혹을 무혐의 처분했다. 힘을 잃은 상대에겐 태도가 바뀐다. 검찰은 다스 횡령 혐의 등을 재수사해 2018년 4월 이 전 대통령을 기소했고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아낸다. 이런 일은 예외적이라 믿는다. 판사와 검사는 대부분의 경우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단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일이 반복되면 믿음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법은 불완전하다. 무거운 죄도 무혐의 처분할 논리를 만들 수 있다. 가벼운 허물에도 중죄를 물을 수 있다. 권력의 유무를 가르고, 피아를 나눠 법을 적용하는 현란한 기술을 지닌 법률 전문가는 많다. 권익위가 그랬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갈급한 것은 얕은 기술이 아니다. 검찰청법은 검사에게 ‘공익의 대변자’라는 소명을 지운다. 업의 무게를 감당하는 것은 양심이다. 20년 동안 부패방지 업무 전문가로 살아왔던 그는 그랬다. 조만간 나올 검찰의 결론을 강요할 생각도 능력도 없다. 다만 결론에 깃든 양심의 무게만큼은 목격할 생각이다. 그게 내게 주어진 애도의 책임이라 믿는다.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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