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싸대기' 날리지 않는다... 드라마 속 '여성 정치인'이 달라졌다
'노 웨이 아웃' '돌풍' 등
여성 정치인 주인공 드라마 넉 달 새 세 편 이상
"안 하면 안 되겠네" 김희애·문소리·염정아 적극 도전
#1. 드라마 '노 웨이 아웃: 더 룰렛'에서 호산시장 안명자(염정아)는 '정치 9단'이다. 사고 대응에 안이한 공무원들을 향해 "가족이 다쳐도 이러고 있을 겁니까? (사고 현장으로) 튀어 나가라고"라며 호통치고, 당 총수를 찾아가 "오십견이 와 혼자 '총대'를 못 멘다"며 압박까지 한다. 염정아가 여성 정치인 역을 맡은 건 데뷔 33년 만에 처음. 드라마 '스카이캐슬'에서 딸을 의대에 진학시키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엄마'는 없다. 염정아는 거침없는 언변과 교묘한 정치적 행보로 존재감을보여준다.
#2.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기죠, 정치가 그래요." 드라마 '돌풍' 속 경제부총리 정수진(김희애)이 국무총리 박동호(설경구)에게 한 말이다. 정의를 부르짖던 운동권 출신의 3선 의원 정수진은 권력을 잡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재벌과 손잡고 비리를 저지르고, 정치적 생존을 위해 타락한 모습으로 독기를 뿜어낸다. 앞서 공개된 드라마 '퀸메이커'와 영화 '데드맨'에서 정치인의 조력자 역을 맡았던 그는 '돌풍'에서 주류 정치인으로 전면에 나서 정치판을 뒤흔든다.
여의도엔 남성? 드라마는 '여성 정치인'
여성 정치인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가 잇달아 제작되고 있다. '돌풍' 등 최근 넉 달 새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를 통해 공개된 여성 정치인 소재 드라마들은 세 편 이상이다. 그간 정치를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 주요 정치인 배역이 대부분 남성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요즘 여성 정치인 캐릭터 바람은 이례적이다.
변화의 이유는 크게 세 가지. ①정형화된 남성 정치인 캐릭터로는 더 이상 시청자에게 새로움을 주기 어렵다는 K콘텐츠 시장의 위기감이 반영됐다. '퀸메이커'의 오진석 감독은 "영어에 '킹메이커'란 말은 있지만 '퀸메이커'란 말은 없는데 그만큼 정치권력은 전통적으로 남성의 것이었다는 뜻"이라며 "그런 세계에 두 여성이 영화 '델마와 루이스' 두 주인공처럼 뛰어들어 부딪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제작 배경을 들려줬다.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기존 드라마에서 남성 정치인 캐릭터가 워낙 많이 등장했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끌어내지 못했다"며 "반면, 여성 정치인 캐릭터는 여성성에 관한 사회적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균열을 내면서 새로운 즐거움을 줄 수 있어 정치 소재 드라마의 제작 양상이 변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②여성 창작자들은 대중문화 시장 주류에 우뚝 서며 여성 정치인 캐릭터를 적극 구축했다. 변영주 감독이 연출한 드라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블랙 아웃'에서 배종옥은 10세 연하 병원장을 남편으로 둔 최초의 여성 경기도지사 예영실로 나온다. 문지영 작가가 대본을 쓴 '퀸메이커'에선 문소리가 노동인권 변호사 출신 서울시장 후보 오경숙으로 출마한다. ③류호정·용혜인·장혜영 같은 20, 30대 젊은 여성 정치인들이 주목받는 현실은 활발하게 이뤄지는 여성 정치인 캐릭터 창작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우리나라에선 여성주의를 내세운 여성의당이 창당했고, 미국에선 최초의 유색 인종 여성 대통령 후보(카멀라 해리스)가 최근 등장했다"며 "이런 세상의 변화가 문화계 전반에 대두된 여성 서사의 필요성과 맞물려 드라마를 통해 여성 정치인 캐릭터들이 적극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흐름을 짚었다.
복수, 돈 벌기 위해 '정치'하지 않는다
드라마 속 여성 정치인의 모습도 이전과 확 달라졌다. '대물'(2010)에서 여성 대통령 서혜림을 연기한 고현정이 남편의 죽음을 계기로, '내 연애의 모든 것'(2013)에서 초선 의원 노민영 역을 맡은 이민정이 친언니의 사망으로 각성해 갑자기 정계에 뛰어들었다면 요즘 드라마 속 여성 정치인들은 처음부터 권력 지향적이다. 여성 취업 준비생이 돈을 벌기 위해 구의원에 지원하는 과정을 다룬 '출사표'(2020) 등이 그간 주인공의 여성 정치 철학을 지운 것과 대조적이다. 최근 줄줄이 공개된 드라마 속 여성 정치 서사가 두각을 나타나게 된 배경이다. 복길 대중문화평론가는 "기존 남성 정치인 사회에서 소외된 중견 여성 정치인들이 동료에게 유대감을 느끼고 그 관계를 깊이 있게 다루는 게 '퀸메이커'와 '이렇게 된 이상 청와대로 간다' 등 요즘 여성 정치 드라마의 경향"이라고 봤다.
"저보다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배우들도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분위기다. '퀸메이커'에 출연한 문소리는 "대본을 읽자마자 머릿속으로 장면이 그려졌고 (서울시장에 출마하는 오경숙) 캐릭터가 살아서 내게 오는 기분이었다"며 "감독을 만나 '이 캐릭터를 저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라고 말할 정도로 애정이 컸다"고 출연 계기를 들려줬다. 드라마에서 문소리는 담배를 피우고 양주를 마시며 정치를 한다. '노 웨이 아웃'으로 여성 정치인 연기에 도전한 염정아는 "안명자란 캐릭터를 안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기하면서 매력을 느꼈다"고 촬영 뒷얘기를 전했다. '돌풍'을 이끌어간 김희애는 "시대가 바뀌었는데 여성 캐릭터들이 남자를 사이에 두고 머리채 잡고 싸우는 모습을 아직도 떠올린다"며 "여성들의 권력 싸움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젊은 여성 정치인' 재현은 숙제
한계도 뚜렷하다. 여성 정치인은 부패한 권력을 이용하는 악역으로 주로 그려져 가능성이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여성 정치인으로서의 세계관을 더 적극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꼬집었다. 윤복실 서강대 미디어융합연구소 연구교수 등은 논문 '여성 정치 드라마의 허들넘기'(2023)에서 "여성 정치인 캐릭터의 연령이 모두 40대 이상이라는 점에서 젊은 여성 정치인의 재현 문제를 논의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짚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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