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날 ‘사갑’을 생각하다 [신영전 칼럼]

한겨레 2024. 8. 19. 07: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17년 1월14일 오후 민주열사 박종철 30주기 추모제가 서울 용산구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렸다. 추모제 뒤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에 의해 숨진 5층 509호에 시민들이 갖다 놓은 국화꽃이 놓여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질병·사고로 일찍 죽은 이가 살았다면 맞았을 환갑을 ‘사갑’이라 한다. 고문으로 죽이고선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던 학생 박종철도,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노래 부르던 가수 김광석도 올해가 사갑이다.

신영전 | 한양대 의대 교수

환갑이다. 60년 전 내가 태어난 날 한 신문의 머리기사를 보니 내 출생 소식이 아니고, ‘민정당 내분 더욱 확대’다. 언론윤리위법 통과를 둘러싸고 민정당 내 윤보선 등 강경파와 유진산 등 온건파가 싸우고 있다는 내용이다. 최근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임명과 탄핵을 둘러싼 상황과 유사해 오늘 신문을 읽는 줄 알았다. 중부내륙 호우로 79명의 사상자가 나고 2만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는 소식도 있고, 서울 영등포서 역전 파출소장 김유용(37)씨가 순찰 도중 장마철에 무허가 집이 철거당해 길거리를 헤매던 김영소(41·노동)씨 일가족 8명의 딱한 사정에 ‘빵’을 사주고 돈 5천원을 주었다는 한 단짜리 기사도 있다. 60년이 지난 한국 사회는 변한 것도 같고 변하지 않은 것도 같다.

나는 미국이 베트남 공격을 위해 의도적 조작을 했다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이 일어난 해에 태어났다. 덕분에 어린 시절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를 흥얼거리며 자랐다. 5살에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동네 사람들과 흑백텔레비전으로 달 착륙 장면을 보았다. 8살 때 제1차 남북 적십자 본회담 중계에서 ‘뿔 난 거지 도깨비’가 살고 있어야 할 평양 거리가 깨끗해 충격을 받았다.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이 있던 10살 광복절엔 육영수 여사가 총을 맞았는데 유난히 저녁노을이 노랗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3학년, 박정희 대통령 사망 뒤엔 다른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구나 하고 놀랐다. 대학 생활은 늘 최루탄 냄새와 함께했다. 본과 2학년 여름. “호헌 철폐, 독재 타도!”를 외치며 수만명과 함께 행진할 땐 역사의 강물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전공의-대학원-결혼으로 이어지던 바쁜 시절엔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 붕괴되기도 했다. 부모 세대처럼 일제강점이나 전쟁은 없었지만, 4명의 대통령이 감옥에 가고 2명의 대통령이 일찍 세상을 떴으니 나름 정치 격동기를 보낸 젊은 시절이었다.

지난 60년은 나만의 시간이 아니다. 나와 같은 1960년 전후 세대의 공이 있다면, 여전히 불안불안 퇴행을 반복하지만,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몇발 앞으로 전진시키는 데 일조한 것이리라. 그것이 지금 케이(K)-문화의 토대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지상주의를 끝내고 분단을 극복하는 시대적 과제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고, 이제 보니 친일 청산도 제대로 못 했다.

나는 지난 60년간 살아남았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들의 마음속엔 상처가 있다. “나는 5월20일 날 도망갔습니다. 미안합니다(전남대 77학번 ○○○).” 오래전 방문한 광주 5·18 추모관 벽에 이런 메모지를 붙여놓은 이처럼, 나 역시 붙여놓을 메모지가 너무 많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 친구들이 나에 관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내 자신이 미워졌다.” 이 시인의 독백은 살아남은 모든 이의 것이기도 하다.

60살까지 살지 못한 이가 너무 많다. 한국의 기대여명이 82.7살이니 이제 환갑잔치는 가족끼리 조용히 식사 한번 하는 행사가 됐다. 그러나 201개 나라 중 평균 기대여명이 60살이 안 되는 나라도 9개국이나 된다. 레소토는 54.9살, 나이지리아 53.8살, 차드는 53.7살밖에 되지 않는다. 평균 기대여명이 높다고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지적, 자폐성 발달장애인의 사망 시 평균연령은 각각 56.4살과 26.5살이다.

지난 60년, 전쟁, 민주항쟁, 산업재해 등으로 죽어간 이들도 대부분 청장년이다. 김 상사가 참전했던 월남전에선 32만명 파병 군인 중 1만명이 전사하여 환갑을 보지 못했다. 그때 사망한 베트남인 수가 100만명을 훨씬 넘으니 환갑을 보지 못한 이는 몇십배나 더 많을 것이다. 1964년부터 2023년까지 산업재해 사망자 수만 해도 최소 10만762명이다. 이들도 환갑을 맞지 못했다. 비극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가자지구 폭격으로 사망한 어린이의 수가 1만5천명을 넘어섰다. 그래서일까? 60살까지 살아남은 것이 축하할 일인지 부끄러운 일인지 종종 헷갈린다.

질병, 사고 등으로 일찍 죽은 이가 살았다면 맞았을 환갑을 ‘사갑’이라 하고 그분을 위해 지내는 제사를 ‘사갑제’라 한다. 고문으로 죽이고선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던 학생 박종철도,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노래 부르던 가수 김광석도 올해가 사갑이다. 오늘 내가 맞는 환갑은 수많은 이들의 사갑이다. 하루하루가 누군가의 사갑이다. 내가 환갑날, 차고 맑은 물 한잔 담아 올리는 이유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