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73년 만에 물리학회 첫 여성 회장… “여성 후배들의 롤모델 되겠다”

인천=이병철 기자 2024. 8. 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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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희 한국물리학회 31대 회장 인터뷰
학위 마치고 홀로 귀국, 육아와 연구 병행
선거에서 57% 득표, 내년 1월 회장 취임
“과학계 이끄는 여성 과학자 리더십 증명할 것”

“한국물리학회의 여성 회원 비중은 10%가 조금 넘는 수준입니다. 여성 물리학자가 많지 않은 이유는 그간 리더십을 보여주는 여성 롤모델이 없어서라고 생각합니다.”

올해는 한국물리학회 창립 72년이 되는 해다. 물리학회는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창립했다. 명실상부 한국 물리학계를 대표하는 단체다. 물리학회의 긴 역사 만큼이나 세계적인 학술단체로 성장했다. 각종 국제 학술대회를 유치하고 전 세계 물리학자들이 연구 성과를 발표하는 국제 학술지도 발간하고 있다.

하지만 물리학회가 지금껏 이루지 못한 일도 있다. 바로 여성 회장 배출이다. 물리학회 창립 73년째인 내년에 드디어 최초의 여성 회장이 취임한다. 윤진희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윤 교수는 최근 이뤄진 회장 선거에서 57%의 표를 받아 31대 학회장에 선출됐다. 내년 1월 취임해 2년간 임기를 수행한다. 윤 교수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한국물리학회 첫 여성 회장으로서 후배 물리학자들에게 좋은 롤모델이 되겠다”며 “선거 과정에서 진정성이 학회 회원들에게 전해졌다는 점에서 감사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이론핵물리학자인 동시에 두 아이를 키운 워킹맘이다. 육아 초기에는 한국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연구를 해야 했던 시기도 있다. 워킹맘을 위한 제대로 된 지원이나 정책도 없던 시절에 엄마이자 과학자로서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 그는 “요즘은 결혼을 하지 않거나 아이를 낳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과거 여성 과학자는 슈퍼우먼이 돼야 했다”며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면 몸과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고 말했다. 지난 13일 인천 인하대 연구실에서 윤 교수를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물리학회 역사상 최초의 여성 회장에 취임하는 윤진희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는 지난 13일 조선비즈와 인터뷰에서 "여성 물리학자들에게 롤모델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전했다./인천=이병철 기자

–한국물리학회 최초의 여성 회장이다.

“물리학회의 72년 역사에서 첫 여성 회장이라는 점에서 큰 책임감을 느낀다. 여성 물리학자들이 느끼던 벽이 허물어졌다고 생각한다. 정부 정책이나 외부의 압력이 아닌 회원들의 투표로 벽을 허물었다는 점에서 감사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여성 물리학자들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여성 과학자로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

“물리학자로서의 삶은 성별과 큰 관계가 없다. 다만 임신과 육아를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남편과 함께 미국에서 유학을 하다가 먼저 한국에 돌아와 인하대에 자리를 잡았다. 첫째가 세살 때다. 남편은 5년 뒤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에는 보육 기관도 흔치 않고 대학도 저녁 모임이나 야근이 많은 시기였다. 아이를 돌보면서 연구를 이어가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다.”

–홀로 양육과 연구, 교육을 다 하기가 쉽지 않았겠다.

“귀국 후 첫 1년은 부모님이 아이를 맡아줬다. 이후에는 낮에는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고 저녁에 함께 집에 돌아가는 일상을 반복해야 했다. 전업 주부였던 아이 엄마들은 오후 2시면 하원을 시키고, 직장인도 6시면 애들을 데려갔다. 하지만 (교수 생활을 하다 보니) 그마저도 힘들어 저녁까지 어린이집에서 먹이고, 오후 7시가 돼야 아이를 데리러 갈 수 있었다. 초기에 딸아이가 어린이집을 가기 싫다고 버티기도 했다. 하루에 두 번씩 다른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걸 지켜보며 많이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당시 마음이 아팠다.”

윤진희 교수는 한국과 CERN의 협력 사업인 앨리스(ALICE) 한국실험의 팀장을 맡아 매년 2차례 이상 해외 출장을 가야 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육아와 연구를 병행하는 '슈퍼맨'이 돼야 했다고 말했다./윤진희

–연구자는 해외 출장도 잦다.

“첫째 아이가 크고 나서 ‘초등학교 때 비 오면 엄마들이 우산을 갖고 마중 나오는 것이 제일 부러웠다’고 하더라. 직장생활을 하는 엄마들은 항상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안고 사는 것 같다. 둘째도 항상 생일에 엄마가 없었다고 했다. 한국과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협력 사업인 앨리스(ALICE) 한국실험 팀장을 맡으며 매년 4월과 10월 해외 출장을 갔다. 여름과 겨울 방학 때는 연구를 위해 해외로 나가야 했다. 연구를 위해서는 가속기를 사용해야 한다. 당시 한국은 핵물리학에 필요한 인프라(기반 시설)가 부족해서 해외 출장이 잦았다.”

–부부가 모두 물리학자다.

“사실 육아로 가장 힘든 시기에 남편이 학위 과정이 남아 미국에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온 후에는 큰 힘이 됐다. 특히 물리학회 회장 선거 때는 후보자들이 전국을 돌면서 회원들에게 인사하는 문화가 있다. 선거 과정에서 가장 힘든 일이다. 남편이 운전기사를 맡아 전국을 함께 순회했다. 남편의 든든한 내조가 있었기에 많은 회원들을 만날 수 있었고,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

–한국물리학회장으로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하고 싶은가.

“물리학회 회장으로서 한국 물리학계 전체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당연하다. 투표 과정에서 회원들에게 들었던 건의사항과 바라는 점을 담은 홈페이지도 만들었다. 다만 최초의 여성 회장인 만큼 여성 후배들을 위한 롤모델도 되고 싶다. 여성 과학자들은 연구와 가정생활을 병행해야 해 그간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이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롤모델도 거의 없었다. 여성 과학자도 한국 과학계를 대표해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겠다.”

–여학생들이 이공계로 많이 진학한다고 들었다. 물리학은 어떤가.

“물리학과 학부 과정에서 여학생 비율이 30% 정도다. 문제는 석사, 박사 과정으로 올라수록 그 수가 현격하게 적어진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여학생들이 물리학계에 진출하는 데 부담을 많이 느끼는 것 같다. 물리학회가 2006년부터 개최하는 ‘찾아가는 여성물리인’ 행사에서도 이 부분을 느낄 수 있다. 당시에는 물리학과에 여성 교수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직접 찾아가 학생들과 멘토링을 진행했다. 초기에는 거의 부흥회 수준으로 학생들이 반길 정도였다. 그만큼 여학생들이 본받을 롤모델에 대한 갈증이 심했다. 요즘은 남녀의 고민이 다르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여전히 사회에 나가면서 어느 정도의 벽은 느끼는 것 같다. 그러한 벽을 낮추거나 없애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선배 과학자들의 역할이다.”

–지난해 R&D 예산 삭감으로 기초과학 위기론이 나왔다.

“예산 삭감도 문제지만, 물리학과 존속 자체가 위기다. 지방 대학들은 자연과학 전공을 아예 폐지하거나 공학과 융합한 새로운 학과로 대체하고 있다. 아마 학생들이 ‘물리학은 천재들이 하는 학문’이라는 선입견이 강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물리학이야말로 넓은 저변이 중요한 학문이다. 지금은 물리학 저변이 무너지고 생태계가 사라지는 단계라고 본다. 한국 물리학계가 지금처럼 발전하기까지 수십년간 선배 과학자들의 노력이 있었는데, 무너지는 것은 2~3년이면 충분하다. 다시 복구하기까지 또 몇십년이 걸릴 지 모른다. 무너지기 전에 대책 마련이 시급하며, 이를 위해 물리학회는 최선을 다할것이다.”

☞윤진희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퍼듀대에서 핵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워싱턴대 객원교수, 오크리지국립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1995년부터 인하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6~2022년 한국·CERN(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 국제협력사업의 앨리스(ALICE) 검출기 한국실험팀장을 역임했고 2022~2023년 중이온가속기 이용자협회장을 지냈다. 세계물리연맹 여성위원회 아시아 대표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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