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입 20년' 고용허가제, 이것부터 고치자[이희용의 세계시민]
[이희용 언론인·이데일리 다문화동포팀 자문위원]2004년 8월 31일 밤, 필리핀 노동자 92명이 인천국제공항에 발을 디뎠다. 평균 연령은 31.5세, 대졸자 비율은 70%를 넘었다. 한 살짜리 아들을 친정에 맡기고 온 여성도 있었다. 이들은 그해 8월 17일 발효된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고용허가제로 입국한 1진이었다. 1993년부터 운영된 외국인 산업연수생 제도의 대안으로 마련된 것이다.
계약기간은 초기에 3년이었으나 고용주 요청으로 1년 10개월을 추가했다가 지금은 갑절로 늘려 최장 9년 8개월이 됐다. 다만 5년 이상 체류하면 영주권 신청 자격이 주어지므로 4년 10개월을 채우면 출국 후 1개월이 지난 뒤 재입국하도록 했다.
도입 첫해 3167명이던 인력 규모는 지난해 10만 148명으로 늘어나 누적 합계 96만 1347명을 기록했으며, 올 7월까지 4만 7466명이 들어와 100만 명을 넘어섰다. 올해 2분기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 일하고 있는 E-9 근로자는 26만 73명으로 외국인 전체 취업자의 3분의 1을 넘는다.
이들은 지난 20년간 우리나라 산업 현장의 최일선을 떠받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감추고 싶은 그늘도 짙다. 내국인이 기피하는 위험한 업무에 종사하는 데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보니 산업재해의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 전체 취업자 중 외국인 비율이 3.2%인데, 지난해 국내 산재사고 사망자 가운데 외국인 비율은 10.5%에 이른다.
고용허가제 노동자는 가족을 동반할 수 없다. 10년 가까이 가족과 떨어져 살게 하는 것은 잔인한 인권 침해다. 이들 사이에 아기가 태어나도 한 달 안에 본국에 보내야 한다. ‘국제 가족 파탄 정책’이라는 비난을 들어도 싸다. 버는 돈을 한국에서 쓰기보다 본국에 송금하게 만드는 것은 국가 경제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사업장 선택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도 문제다.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허용되긴 하지만 대부분 이주노동자가 입증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열악한 숙소, 임금 체불, 가혹한 근로조건, 욕설·폭행·성추행 등의 문제도 끊이지 않는다. “신분이 노예에서 농노로 바뀌었을 뿐 현대판 노예제나 다름없다”는 항변이 나오는 까닭이다. 사업장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짧은 계약기간과 함께 불법체류자(미등록외국인)를 낳는 주요한 원인이기도 하다.
여전히 고용허가제를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오려는 외국인이 많다고는 해도 이처럼 문제가 많은 제도를 그대로 지속하기는 어렵다. 국가 이미지가 훼손될 우려가 크고 숙련 인력을 일본과 호주 등에 뺏긴다는 목소리도 높다. 인구절벽 시대를 맞아 이제는 한번 쓰고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숙련도와 적응력이 높아진 인력의 장기근속과 정착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기본 틀을 바꿔야 한다.
우선 계약기간을 늘리고 가족 동반과 출생 자녀 등록을 허용해야 한다. 비자 간의 사다리를 놓아 E-9에서 E-7-4(숙련기능인력) 비자로 손쉽게 갈아탈 수 있도록 길을 터줘야 한다. 고용자 위주의 고용허가제 대신 노동자 중심의 노동허가제로 바꿔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충고를 흘려듣지 말아야 한다. 고용노동부, 법무부, 행정안전부, 지방자치단체 등의 유기적인 협조로 이들의 적응과 정착을 돕는 통합적 지원체계를 마련하는 것도 절실하다.
10년 전 선보인 영화 ‘국제시장’에서는 노인이 된 주인공 덕수(황정민 분)가 외국인 노동자를 조롱하는 청소년들에게 호통을 치는 장면이 등장한다. 자신이 젊은 시절 서독(독일)과 월남(베트남)에서 고생하며 일한 기억이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덕수의 심경에 공감한다면 지금의 고용허가제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해답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보다 지금은 일하고 싶은 나라를 고를 수 있는 폭이 훨씬 넓어졌다. 우리나라가 우수한 외국 인력의 선택을 받으려면 이대로는 안 된다.
최은영 (euno@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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