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기업 공급망 실사’ D-3년…‘인권·환경 후진국’ 한국 탈 없을까?

곽정수 기자 2024. 8. 1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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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I 이슈 | EU CSDDD 7월25일 발효
2027년 7월부터 EU와 거래 대기업
협력사 인권·환경 위험 실사 의무화
위반 땐 세계 매출액 5% 이상 벌금
인권·환경지표 열악…준비 초보단계
지난 4월24일(현지시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유럽의회 본회의에서 기업에 인권·환경 보호를 의무화하는 유럽연합(EU)의 공급망 실사지침(CSDDD)을 가결하는 모습. 연합뉴스 제공

지난해 6월 독일의 비영리단체인 유럽헌법과인권센터(ECCHR)는 폭스바겐, 베엠베(BMW) 등 3개 자동차 제조업체를 독일 연방경제수출통제국(BAFA)에 고발했다. 이들 회사가 중국 자동차회사와 합작으로 신장웨이우얼 지역에 조립공장을 세웠는데, 그 공급망 안에 위구르족의 강제노동으로 부품을 생산하는 협력사가 포함되어 있다는 혐의였다. 그 두달 전인 4월에는 방글라데시 노조인 전국의류노동자연맹(NGWF)이 역시 ECCHR의 지원을 받아 독일 의류업체 톰 테일러, 미국 유통업체 아마존 등 3개 기업을 현지공장에서 환경·인권 보호 의무를 지키지 않은 혐의로 BAFA에 고발했다.

두 사건 모두 독일이 2023년 1월 시행한 ’공급망 실사법’을 위반한 혐의다. 독일은 자국기업 뿐만 아니라 독일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에 대해 공급망 내 협력사의 환경과 인권 보호를 의무화했다.

하지만 앞으로 3년 뒤에는 더 ‘센 놈’이 찾아온다. 유럽연합(EU)이 제정한 ‘기업의 지속가능한 공급망 실사지침(CSDDD)’이 7월25일 공식 발효된 것이다. 지침은 2027년 7월부터 시행된다. 공급망 실사는 환경·사회·지배구조를 중시하는 이에스지(ESG) 규제의 하나이다. 유럽의 ESG 규제 중에서 산업활동의 친환경 기준을 제시한 녹색산업분류체계인 택소노미(Taxonomy), 기업의 ESG 공시를 의무화한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 금융회사의 판매상품에 ESG 정보 공시를 의무화한 지속가능금융공시제(SFDR)와 함께 4대 핵심축으로 불린다.

공급망 실사 ‘카운트 다운’

실사지침을 적용받는 기업은 자신과 자회사는 물론 공급망 안에 있는 협력사까지 포함해서 환경과 인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위험 요인을 실사하고, 방지·개선 조처를 취한 뒤 그 결과를 모니터링하고 공시해야 한다. 실사 항목은 생명, 안전, 노동삼권, 토양·수질·대기오염, 온실가스 배출 등 인권과 환경 관련 주요 내용을 망라한다.

적용 기업은 매출 규모에 따라 3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확대된다. 1단계인 2027년 7월부터는 전세계 순매출이 15억유로(약 2조2500억원)를 초과하고 직원 수가 5천명을 초과하는 EU기업과, EU 내 순매출이 15억 유로를 초과하는 비 EU기업에 적용된다. 최종적으로 3단계인 2029년 7월부터는 전세계 순매출 4.5억유로(6750억원) 및 직원 수가 1천명을 초과하는 EU기업과, EU 내 순매출이 4.5억 유로를 초과하는 비 EU기업으로 확대된다. 현지 언론들은 유럽 기업 5400여개가 실사 의무를 적용받을 것으로 예상한다. 위반 기업에는 최소 전세계 연간 매출액의 5% 이상 벌금이 부과된다. 형사처벌 조항은 없지만,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도 진다.

유엔이 2011년 채택한 ‘기업과 인권에 관한 이행원칙’(UNGPs)은 공급망 실사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2013년 4월 발생한 방글라데시 라나 플라자 붕괴사고는 공급망 실사의 실행을 앞당기는 기폭제가 됐다. 수도 다카 인근의 지상 9층 건물이 부실공사 누적으로 무너지면서, 무려 1129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참사가 발생했다. 해당 건물에서 수많은 노동자가 가혹한 환경에서 형편없이 적은 임금을 받고 세계 유명업체에 납품할 의류를 만들어온 사실이 드러나면서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참사 이후 기업의 인권과 환경 이슈가 부각되면서 프랑스(2017년), 네덜란드(2019년), 독일(2021년) 등 유럽 각국이 공급망 실사법을 제정했다. 또 개별 품목 및 이슈별 공급망 실사 규제가 뒤따랐다. 법무법인 광장의 김수연 연구위원은 8일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이 ‘EU 공급망 실사’를 주제로 연 ‘H-ESG 포럼’에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2019년 (EU를 탄소중립 대륙으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담은) 그린딜을 발표하면서 ESG를 새로운 성장정책으로 삼겠다고 천명한 이후 ESG 규제들이 속속 구체화하고 있는데, 공급망 실사는 최소한 10년 전부터 예견됐던 일”이라고 강조했다.

‘발등에 불’ 떨어진 한국

EU의 공급망 실사로 한국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 됐다. EU는 한국에 다섯 번째로 큰 교역상대이다. 한국 수출의 10% 이상을 차지한다. 상당수 국내 대기업이 공급망 실사의무 대상에 포함될 전망이다. 산업부는 대상 기업을 대략 20여개로 추정한다. 문제는 대기업만이 아니라 공급망 안에 있는 중견·중소 협력사도 함께 영향을 받는 점이다. 대기업마다 협력사는 적게는 수백개, 많게는 수천개에 달한다. 중소기업의 실사지침 위배로 거액의 벌금이 부과되거나 연쇄 거래중단이 일어나면, 개별 기업의 경영난에 그치지 않고 국가경제의 타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한국은 선진국에 진입했지만, 기업의 인권과 환경 경영은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환경과 인권 관련 각종 통계지표가 열악한 현실을 보여준다. 2021년 사고로 사망한 사람은 820명으로, 1만명 당 사고 사망자 수(사고사망만인율)가 0.43명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4위로 최하위권이다. 2020년 기준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24.1명, 초미세먼지 농도는 25.9㎍(마이크로 그램·100만분의 1g)으로, 모두 OECD 꼴찌다.

국제 비영리기구인 기업과인권리소스센터(BHRRC)는 2023년 말 발표한 ‘한국의 인권실사 보고서’에서 “한국 기업들은 인권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국제 표준을 이행하는데도 실패했다”고 지적했다. 기후솔루션 등 국제 환경·인권단체들의 네트워크인 ‘리드 더 차지’가 올해 초 세계 상위 자동차 제조업체 18곳을 대상으로 공급망의 환경·인권 보호 노력을 평가한 결과, 현대차와 기아차는 각각 10위와 13위로 하위권에 그쳤다.

지난 6월말 리튬배터리 제조업체인 아리셀의 화재참사로 23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참사 대책위의 한상진 언론담당은 “아리셀은 최근 3년간 4차례나 유사한 화재사고가 발생했는데도 제대로 예방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 예견된 참사이자 인재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아리셀은 리튬배터리를 국방부에 납품한다. 만약 공급망 실사지침이 시행 중이고, 국내 대기업도 아리셀로부터 납품을 받아 최종제품을 EU에 수출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실사지침 위배로 수천억원 내지 수조원의 벌금을 부과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국내 준비 초보단계

지난 7월초 산업부 주최로 열린 민관합동 세미나에서 EU 공급망 실사지침 대응 모범사례로 SK C&C가 소개됐다. SK C&C는 직접적인 실사지침 적용 대상이 아닌데도, SK의 ESG 경영방침에 따라 자발적으로 대응 준비를 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회사의 최용국 매니저는 “2021년부터 400~500개 1차 협력사를 대상으로 단계적으로 공급망 실사 준비를 시작했고, 2025년에 완료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다른 기업의 경우 대기업은 그래도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중소기업은 준비가 거의 안됐다는 게 중론이다. 대한상의 조영준 지속가능경영원장은 “전반적으로 볼 때 이제 준비 초보단계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국내 경제계는 EU가 수년 전부터 공급망 실사 도입을 예고하는데도, “설마, 설마”하며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시간만 흘려보냈다는 지적을 받는다. 공급망 실사와 직결되는 ESG 관련 법제화에 대해 기업 부담을 내세워 시기상조론을 펴거나 아예 반대한 것은 세상의 변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모습이다. 선진국이 앞다퉈 ESG 공시 의무화를 도입하는데도, 2029년으로 연기를 주장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정부·국회 대응 아쉬움

정부는 2022년 초 EU의 공급망 실사지침 초안이 나오자 본격적인 대응 준비에 나섰다. 수출 중소·중견기업 ESG 지원 시범사업 착수회의를 열었고, 그해 말에는 산업부 조직개편으로 신통상전략지원관을 신설했다. ‘공급망 실사 대응을 위한 K-ESG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것도 그 무렵이다. 2023년부터는 매년 수출 중소·중견기업에 대해 공급망 ESG 리스크를 진단·개선하는 컨설팅 지원을 시작했다. 한국생산성본부의 최영락 본부장은 “첫해 수출기업의 신청을 받아 500곳에 컨설팅 지원을 했고, 올해도 500곳을 추가 지원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올해 4월 공급망 실사지침이 유럽의회를 통화한 이후 정부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산업부는 5월과 7월 자동차, 배터리 업계와 각각 간담회를 갖고 대응 방안을 점검했다. 수출 중소·중견기업을 위해 코트라와 함께 온라인에서 공급망 실사지침 대응 웨비나를 열고, Q&A 자료집도 배포했다. 7월말에는 산업부, 대한상의, 11개 업종별 협회가 모여 ‘산업 공급망 탄소중립 얼라이언스’를 출범하고, 민-관합동으로 산업 공급망 탄소데이터 플랫폼을 구축하기로 했다. 산업부 윤선영 신통상전략과장은 “8월말 이후 경제단체, 업종, 지역별 설명회를 계속 가질 계획”이라며 “남은 3년간 열심히 준비해서, ESG 규제로 인한 위기를 기회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정부가 그동안 나름대로 대응 준비를 했지만, 기업들이 뒤늦게 호떡집에 불이 난 것처럼 허둥대는 것을 보면,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실사지침을 적용받는 국내 기업이 몇 개인지조차 정확한 통계가 없는 현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지난해 9월 국회에 한국판 공급망 실사법(기업의 지속가능 경영을 위한 인권환경보호에 관한 법률안)이 정태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주도로 공동 발의됐지만, 여당의 반대에 막혀 지난 5월말 21대 국회 임기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됐다. 조영준 원장은 “중견·중소기업이 공급망 실사에 개별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기 때문에 정부·국회가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일본은 체계적 준비

일본도 공급망 실사로 인해 자국 기업들의 준비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한국과 비슷한 처지다. 일본 정부는 5~6년 전부터 단계적이고 체계적으로 기업 지원 서비스를 준비·구축해 왔다. 일본은 환경실사는 환경성, 인권실사는 경제산업성으로 이원화해서 대응하는 게 특징이다. 환경성은 전 세계적으로 공급망 내 인권 및 환경 분야에 대한 기업의 책임이 강조되자, 2019년 환경실사연구회를 발족해서, 2020년 공급망 환경실사 입문을 발간했다. 2023년에는 환경경영시스템을 활용한 환경실사 실천 가이드북을 발간했다.

일본은 공급망 내 인권 보호를 중시하는 국제 흐름에 맞춰 2020년 ‘기업과 인권에 관한 국가행동계획’(NAP)을 발표했다. 경제산업성은 이를 바탕으로 2021년 도쿄증권거래소 상장기업의 공급망 실사 대응 상황을 진단하기 위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응답기업의 69%가 인권정책을 수립하고, 52%가 인권실사를 시행한다고 응답한 것을 보면, 일본 기업의 인권경영 대응은 한국보다 앞섰다고 볼 수 있다. 경제산업성은 2022년 공급망 내 인권실사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고, 2023년에는 공공조달 입찰에 참여하는 기업들을 상대로 가이드라인에 따라 인권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어 인권에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식별 및 평가 절차, 사례를 담은 참고자료를 내놓았다.

향후 과제는

공급망 실사를 선진국의 무역장벽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ESG 시대를 맞아 반드시 넘어서야 할 과제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한국 기업들이 비록 선제 대응에는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박영아 변호사는 H-ESG 포럼에서 “지금처럼 (공급망 실사에) 소극적 대응으로 그칠 경우 인권· 환경 보호와 해외시장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ESG 규제에 대한 경제계의 부정적 인식에도 변화가 요구된다. 일본은 비교적 일찍부터 법제화 대신 가이드라인을 중심으로 지원했지만, 한국은 그렇기 하기에는 너무 늦은 측면도 있다. 박영아 변호사는 “ESG 규제가 기업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자율성에 기초한 지원만 강조하고, 법제화 등 선제 대응은 산업전략상 불리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착각”이라면서 “EU 등 국제 추세는 기업의 의무와 책임을 강화하는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곽정수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선임기자 jskwak@hani.co.kr, 녹취 김효진 보조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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