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회 영농·생활 수기 가작-일반부문] 하늘 채마밭

관리자 2024. 8. 19.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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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회 영농·생활 수기 가작-일반부문] 김득진 (66·경남 양산시 평산동)
마흔평 남짓 텃밭서 작물재배
옆집 어르신 조언 들으며 농사
김득진씨가 텃밭에서 수확한 가지와 고추를 들어 보이고 있다.

채마밭은 살아 움직이는 화폭이다. 계절을 달리해가며 오브제(objet)를 바꾸곤 하는 마흔평 캔버스. 여름작물인 토마토, 오이, 상추, 옥수수, 해바라기, 고추, 감자, 고구마가 자라고 있다. 시간 흐름에 맞춰 연두색에서 초록으로 캔버스를 물들이는 작물들은 뜸을 들여가며 열매를 맺는다. 나이프로 바탕을 긁어 색감을 드러내는 스그라피토 기법이나 망치와 정으로 돌을 쪼아 석상을 만드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농부를 채마밭 캔버스를 채워나가는 화가라고 불러도 이상할 게 없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텃밭에 쪼그려 앉는다. 누가 봐도 초보 티가 날 것 같다. 눈개승마, 겨자, 셀러리, 쑥갓이 떡잎을 밀치며 새싹을 틔워내는 모습을 신비로운 듯 지켜본다. 그때 어깨너머로 힘차고 느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모종이 땅 냄새를 맡아야 할낀데.”

돌아보니 백발 어르신이다. 마흔평 텃밭을 굽어보는 시선에 걱정이 그득하다. 십년째 채마밭을 일궈왔다니 경험을 앞서는 철학은 없다는 생각에 허리를 깊이 숙인다. 산소통 굴리다가 다친 허리 때문에 그분께 의지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 어르신은 “낮 농사든 밤 농사든 허리가 튼튼해야 해”라고 말했다. 그 후 어르신이 농사짓는 걸 어깨너머로 유심히 지켜봤다. 농기구의 중력을 이용해서 땅을 쪼고, 지렛대 원리로 뒤집었다. 머리를 쓰면 허리 부담을 줄인다는 걸 깨닫고서 텃밭에 들어서면 무릎부터 꿇는 버릇을 들였다. 자세가 낮아지니 작물들과 거리가 좁아졌다. 웅얼거리며 그들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꽃 피워 벌 나비를 불러들이고, 수정해서 열매 맺는 순리를 그들에게 배웠다. 막걸리를 마시던 어르신은 밭멍이 불멍, 물멍 못지않다는 걸 가르쳐주기도 했다.

처음 귀촌했을 때는 막막했다. 엉겁결에 몇가지 모종을 선택했다. 늦은 건 아닐까. 뿌리를 내리긴 할까. 땅심은 관심 두지 않고 종묘상을 찾았다. 작물 몇가지를 사서 돌아왔다. 모종삽이 휘어져 곡괭이로 땅을 팠다. 모종을 가까스로 심어 물을 뿌렸다. 들며 나며 목을 길게 빼고서 새싹 돋기를 기다렸다. 쿠바에선 지렁이를 써서 땅심을 돋운다던데, 허브를 심으면 해충 퇴치가 된다던데…. 내 얘길 들은 어르신께서 허허, 웃으셨다.

“쿠바엔 두더지가 없나 보네. 그게 지렁이 씨를 말려버려. 땅심 돋우려면 거름을 듬뿍 써야 하고.”

나는 어르신 말씀에 뜨끔해서 고개를 들어봤다. 꽃대를 뽑아 올린 대파를 가리키며 저걸 왜 먹지 않느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워서요, 라는 대답에 아끼다 똥 돼, 라며 웃으셨다. 보름이 지난 뒤 밭을 살펴봤다. 여린 잎이며 줄기에 진딧물이 잔뜩 붙어 있었다. 담장 뒤편 머위도 등산객이 죄다 따간 뒤였다. 어르신의 질책을 받아가며 다섯 이랑 텃밭에 옥수수며 오이, 토마토에다 가지도 심었다. 좁은 텃밭이 어르신 잦은 발길에 풍성해졌고, 땅내 맡은 모종들 성장세가 가팔랐다. 어르신 텃밭에 비할 순 없어도 마흔평이 가져다준 보람은 컸다.

삼십년 살아온 아파트가 저층이 되고 말았다. 주위가 온통 고층 아파트로 채워진 탓이다. 젊은 부부가 떠난 자리를 낡은 가구 앞세운 노인들이 메웠다. 계단에서 맞닥뜨리는 이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실버타운이란 이름이 어울렸다. 아파트에 들어서기만 하면 맥이 풀렸다.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도시에서 한시바삐 벗어나고 싶었다. 새로운 거처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녔다. 모임에서 건축을 전공한 친구를 만났다. 그가 선뜻 농막을 추천했다. 시골에서 산 경험이 없으니 입을 꾹 닫고 있었다. 열악한 조건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던 탓이다. 친구는 까탈스럽게 군다는 듯 눈을 흘겼다, 모임을 끝내고 구글 지도를 살폈지만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익히 알고 있는 문장이 떠올랐다. 진리는 가까운 곳에 있다고. 그제야 폐업 후 버려뒀던 땅이 생각났고, 곧바로 현장으로 차를 몰았다. 20년 지난 조립식 건물은 폐허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 괸 물에서는 잡초가 웃자라 있었다. 이걸 손봐서 살아갈 수나 있을까. 입맛을 다시다가 담장 바깥을 둘러봤다. 개나리 담장 따라 생겨난 낯선 덱이 눈에 띄었다. 말끔하게 단장된 길을 따라 산을 톺아 올랐다. 100m쯤 올라가니 식수용 수도꼭지가 설치되어 있었다. 오른쪽엔 마을 지킴이 역할을 하는 당산도 보였다.

나무 그늘에 앉아 지적도를 펼쳤다. 돋보기를 들여다보며 농막 놓을 곳을 점 찍었다. 테두리를 그려넣다가 구거, 글씨를 찾아냈다. 개울 한쌍이 짝을 이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여기에다 꿈에 그리던 집을 지으라는 계시라 여겼다. 나무 그늘에 누워 설핏 졸았다. 벚나무 가지 위에 까치들이 모여 한참 동안 짹짹거렸다. 얼마 후 개울로 자리를 옮긴 놈들이 발을 담그고 찰방거렸다. 나는 거기를 까치 마을회관, 까치 목욕탕이라 이름 지었다. 참새들도 텃밭 이랑을 옮겨 다니며 흙 목욕에 바빴다. 꿈이란 걸 알면서도 마당 여기저기를 살폈다. 낡은 건물이 뿜어내는 앤티크의 향기가 마당의 잡초랑 호흡을 맞추는 걸 그제야 볼 수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머릿속이 온통 농막 배치도로 채워졌다. 지적도와 줄자를 챙겨 실버타운을 나섰고, 차를 몰아 현장으로 내달렸다. 꿈에서 본 까치 몇 마리가 나무 위를 날고 있었다. 낡은 건물과 산 사이에 버려진 땅. 지적도를 펼치고 컨테이너 놓을 곳을 측량했다. 손으로 풀을 꺾어가며 삭정이로 경계 표시를 마쳤다. 서쪽이 산으로 가려진 곳이어서 네시가 되지 않았는데 땅거미가 깔렸다.

텃밭이 딸린 농막 부지는 마련됐지만 세세한 구조는 정하지 못했다. 컨테이너가 좋겠는데 그걸 구할 방법을 몰라 고민했다. 당근에서라면 어렵지 않을 거야. 난방이랑 전기 공사, 정화조 설치는 어쩌지? 기초 공사는 혼자서 할 수 있을까? 농막 꾸미는 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 판단이 옳은지 건축 전공자 친구에게 물어봤다. 그가 농막 카탈로그며 견적서를 보내왔다. 나는 대뜸 비싼 거 아니냐고 물음표 이모티콘을 보냈다.

“식민지 삼아 몸을 혹사시킨 대가라 생각해. 이젠 누려야 할 때 아니야?”

친구 얘기에 농막 골조를 떠올려봤다. 지붕은 아스팔트 슁글, 바닥은 각 파이프, 벽체는 편백으로 마감하고 단열재를 촘촘하게 넣는다고 해서 마음이 놓였다. 거실이며 현관이 남쪽을 향하는 것도 맘에 들었다. 삼대를 적선해야만 가질 수 있는 남향집에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곧바로 계약하자고 전화를 걸었다. 레미탈을 써서 농막이 내려앉지 않도록 기초를 만들고, 내부에는 어릴 때부터 갖고 싶었던 앤티크 오디오랑 커피 기구를 갖추기로 작정했다. 몸에 착 감기는 이불에다 레이스 커튼이며 간접조명이라면 분위기가 살겠지. 생각만으로도 입꼬리에 웃음이 매달렸다. 텃밭과 농막이 어울린 풍경화가 푸른 하늘에 어른거렸다.

어르신이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멧돼지가 고구마밭을 파 엎었다며 허탈해하신 게 엊그제였는데. 내가 심은 옥수수도 조심하라며 당부하셨는데. 마을회관에 들러 어르신 안부를 묻는다. 몸이 편찮아서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병문안 가야 하나. 급한 마음에 폰을 꺼내 키패드를 두드린다. 폰에서 맥 빠진 목소리가 건너온다.

“일하다가 허리를 삐었어. 곧 낫겠지.”

지하수 펌프실 콘크리트 공사를 부탁한 생각에 뜨끔하다. 낮 농사든 밤 농사든 허릿심이 요긴하다고 하시더니. 보름이 지나고 한달이 흘러가도 어르신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폰을 열어 통화기록을 찾고 버튼을 누른다. 신호음이 오래도록 울린다. 건너편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간병인인데요. 치료 중이셔서 대신 받았어요.”

간이 철렁한다. 그토록 정정하시던 어르신이 여태 병원에 계시다니. 전화를 끊고 어르신 밭을 둘러본다. 몇차례 내린 비로 이랑과 고랑 분간이 쉽지 않다. 두달이 채 되지 않았는데 잡초 투성이다. 쳐다보기 상그러워 인상 찌푸리다 시선을 돌린다. 덱을 따라 피어난 아카시아랑 찔레꽃 향기가 코를 찌른다. 현기증에 이마를 짚는 순간이다. 산책 나온 부녀회장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며칠 후 유적지 답사갈 건데 함께 가자고 꼬드긴다. 거기 끼려니 몸져누운 어르신이 눈에 밟힌다. 작년 행사엔 어르신도 끼어 너무 재밌었단 말에 숙연해졌고, 웃자란 풀을 보며 신세를 갚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린다.

유적지 답사를 떠나는 날이다.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에 솟아오른 해가 더없이 붉고 환하다. 마을에 관광버스가 들어선다. 울긋불긋한 사람 꽃들이 그림자를 지우며 나타난다. 저마다 손을 맞잡거나 어깨를 치며 인사를 나눈다. 이장이 나서서 사람 꽃송이들 숫자를 헤아린다. 빠진 꽃은 없는지 확인하고서 차례대로 차에 오르라고 말한다. 뒤이어 술이며 음식이 담긴 상자가 짐칸에 실린다. 먼저 차에 오른 사람 중 누군가가 내 나이가 어때서, 노래를 시작한다. 뒤에 오르던 사람들이 노래를 따라 부른다. 느리게 이어지던 노래가 끝나기 전에 관광버스가 시동을 건다. 마지막으로 차에 오른 이장이 내게 손을 흔든다. 나도 두 손을 높이 치켜들어 답례한다. 버스는 노랫소리를 퍼뜨리며 천천히 마을을 벗어난다.

뒤돌아서 농막으로 돌아오던 중 낯선 광경과 맞닥뜨린다. 여간해선 보이지 않던 트럭 한대가 마을로 접어들고 있다. 트럭 짐칸에는 꽃으로 둘러싸인 상여가 올려져 있다. 정차한 트럭에 가까이 다가가 본다. 종이를 오려 만든 꽃들이 상여를 빼곡 메웠다. 트럭 문짝을 잡고서 넓은 면을 살펴본다. 바깥엔 작약, 다음엔 하얀 국화며 철쭉이 나란히 꽂혔고, 안쪽에는 달맞이며 모과꽃으로 치장되어 있다. 상여 윗부분 네 모서리에 꽂힌 당귀꽃은 어르신 인품인 양 목을 빼고 있다.

어디선가 왁자지껄 소리가 들린다. 골목에서 몰려나온 청년들 목소리다. 삼베옷에 두건을 쓴 그들은 죄다 낯설다. 요령을 든 청년이 적재함 문짝을 열고, 두 사람이 짐칸에 올라간다. 위아래 보조를 맞춰가며 신호를 건네고, 들썩거리던 상여가 땅에 내려진다. 제각각 맡은 자리에 선 청년들이 무명 베필을 어깨에 걸친다. 요령을 쥔 청년이 상여 앞을 막아선다. 노끈을 거머쥔 그가 메기는소리를 내지르고, 상두꾼들이 받는소리로 화답한다.

평생 일군 집을 두고 그림 같은 논밭 두고 황천길이 웬 말인가
어허야 어허야 어기넘차 어허야
북망산천 멀다 해도 집 떠나면 북망일세 가네 가네 나는 가네 텃밭 두고 나는 가네
어허야 어허야 어기넘차 어허야
저승길 급하대도 당산 할매 뵈어야지 그리던 텃밭 유화 낙관마저 찍어야지
어허야 어허야 어기넘차 어허야

좁은 덱 따라 상여가 옮겨간다. 상두꾼의 밀고 당김에 맞춰 휘청거리면서도 균형을 잡는 상여, 전기 자전거로 오르내리던 어르신 모습을 연상시킨다. 차분하면서도 너그러운 시선으로 텃밭을 둘러볼 어르신의 너털웃음이 꽃숭어리 사이에서 삐져나올 것만 같다. 당신이 길러낸 작물들을 향해 하늘 채마밭으로 가자는 신호인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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