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회 영농·생활 수기 가작-일반부문] 공부하기 싫으면 하루 종일 창밖만 보고 와도 돼
도시 떠나 아이와 자연품 안겨
지역 부모와 교육 품앗이 시작
“공부하기 싫으면 하루 종일 창밖만 보고 와도 돼.”
(필자가) 초등학교 5학년 큰 딸아이가 학교를 갈 때 건넸던 말이다. 지금 큰아이가 서른둘이니 벌써 이십년 저쪽의 일이다.
당시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아이에게 “엄마가 화가 나서 하는 말이 아니야”라며 몇번이나 되풀이했던 기억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우리 아이들이 다녔던 학교는 하늘을 담고 있는 아담한 저수지 바로 옆에 있었다. 끝자락엔 야트막한 산이 오도카니 들어서 있다. 산의 모습을 통해 바뀐 계절의 모습을 시시각각 확인할 수 있어 자연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고 살아온 셈이다. 감히 자연의 덕으로 키웠다고 슬그머니 숟가락을 얹어본다.
큰아이는 초등학교 5년 동안 대도시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동생은 미취학. 도시 생활에 익숙한 아이들을 달래 시골로 오기까지 상당한 어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의 여지없이 시골로 와야만 했다. 아빠의 사업이 부도가 났으므로…….
그렇게 시골살이가 시작되었다. 우리 네 가족이 처음 둥지를 튼 곳은 인천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강화읍에서도 차로 이십여분의 거리.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로 들어오는 건 엄청난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열악한 교육환경, 교통, 문화 등등 관점에 따라 포기해야 할 것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중에 가장 큰 걸림돌은 아이들의 교육 문제였다. 심지어 학원을 가려고 해도 차로 30분이 걸린다. 학교에 가거나, 친구 집에 놀러 가는 것조차 차로 데려다주고 데려와야 한다. 온통 불편한 것들과 낯선 것들 투성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아이 친구의 부모님을 만났다는 점이다. 동병상련이라던가. 그 댁도 아이 아빠의 사업이 부도가 났었단다. 공통분모가 있는 부모들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조금 후에 알게 된 사실은 경서 아빠와 우리 남편의 고향이 같았다. 그 댁 형편도 우리와 별반 다를 게 없는지라 역시 아이들의 교육이 문제였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다. 부모들은 ‘품앗이 학습’을 하기로 작당(?)을 했다.
경서 엄마는 영어, 아이들의 같은 반 송현이 엄마는 미술, 나는 국어 과목을 맡았다.
그렇게 부모들의 ‘품앗이 학습’이 시작되었다. 학원이 없는 동네에서 세 가족이 모여 공부를 가르쳐보자는 당찬 계획도 세웠다. 각자의 과목을 가르치고 전공자가 없는 수학은 그나마 자신 있어 하는 경서 아빠가 담당하기로 했다. 욕심부리지 않고 꾸준히 하루에 세장씩만 하자로 목표를 세웠다. 공부할 장소는 우리 집.
학교가 끝나면 아이들은 학교 버스를 타고 우리 집에 모여 매일 정해진 분량을 끝내고 놀기로 했다. 집에 텔레비전을 두지 않았기에 아이들의 놀이터는 응당 바깥이었다. 계절에 따라 놀이는 다양했고 방법은 그때그때 달라졌다. 놀이에 참여하는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아 모두가 오케이 할 때까지 의논하고 또 의논했다.
여름방학에는 마당에 커다란 김장 고무통에 물을 받아 놓는 건 필수였다. 꼬맹이들 대여섯명이 소리 지르며 물놀이를 하는 날은 하늘의 구름도 자기들끼리 뭉쳐서 놀았다. 가진 건 없어도 마음만은 더없이 한가롭고 평화로웠다.
밭에는 상추, 고추, 오이, 토마토, 수박, 참외, 피망, 가지, 감자, 옥수수, 콩, 땅콩, 고구마 등 제철 먹거리들을 최대한 심었다. 그러나 욕심에 비해 수확은 반비례했다. 그도 그럴 것이 농약을 거부하며 키우다 보니 수확량은 당연히 저조할 수밖에. 그래도 좋았다. 아이들과 만나면 마음 편해지는 이웃과 함께했기에.
밭에서 막 따낸 까끌까끌한 꼬불이 오이나, 건들면 톡 터질 것 같은 형형색색의 방울토마토,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수박이 어느 틈엔가 자라서 먹을 만한 크기의 수박이 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당연한 경이로움. 겪어보지 않고는 절대 모른다. 농약을 거부한 자연 그대로의 맛을 경험하게 된 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시골살이 경험이 없었던 우리 가족은 어릴 때 풍문으로 들었던 시골살이의 경험들을 모조리 해보고 싶었다. 정월대보름에 하는 쥐불놀이, 깡통 돌리기, 갯벌에서 조개 캐기, 그리고 막연한 동경이었던 개구리 뒷다리 구워 먹기 등.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잔인할 법도 한데 당시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땐 왜 못 느꼈었는지 아이러니다. 개구리 뒷다리를 구워 먹었다는 동네 이장님을 초빙하여 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살아 있는 개구리를 패대기쳐서 기절시킨 후에 뒷다리를… 결국 우리의 거사는 미수로 그치고 말았다. 대신 질경이를 이용해서 제기를 만들었다. 별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신기해했고 즐겁게 동참했다. 장난감이 없던 시절에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서 만든 제기. 자연스럽게 자연을 보호하는 옛사람들의 지혜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질경이로 만든 제기는 며칠이 지나도 재사용이 가능했고, 아이들이 수없이 발로 찼던 제기가 수명을 다하면 아무 데나 던져두면 그대로 거름이 되었다.
‘품앗이 학습’은 의도와는 다르게 규모가 커져만 갔다. 결핍을 결핍으로 두지 않고 풍요로 만들어 내는 모두의 노력 덕분이었다.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자연주의 화가 장쌤과 자칭 강남파 피아노쌤 주쌤이 기꺼이 품앗이 학습의 교사로 와주셨다. 수업료는 최소한의 기름값이 고작이었다. 발 없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갔다. 소문을 듣고 아이들이 늘어난 건 당연했다.
학습 커리큘럼과 간식을 담당하는 내 일도 점점 늘어났다. 나는 일을 놀이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엄청난 양의 일이라도 놀이처럼 하면 그곳이 바로 놀이터가 된다. 여럿이 함께하면 더 재미있고 훨씬 능률적이다. 아이들의 먹거리를 담당하던 나는 도시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 된장을 직접 담가보고 싶었다. 조금은 무모하고 거대한 프로젝트였다. 콩은 농산물 중에서 가장 늦게 수확하는 작물이다. 콩을 수확할 때쯤이면 밭농사가 끝날 무렵이라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다. 마당에 솥을 걸었다. 남편과 아이들은 마당 한편에 불을 지펴놓고 고구마를 굽는다, 밤을 굽는다며 온통 소란스러웠다. 정작 콩 삶기는 뒷전이었다. 그렇게 그날 수업은 ‘메주 만들기’로 진행되었다.
나는 책상을 한편으로 치우고 커다란 김장 봉투와 쌀 포대를 준비했다. 아이들은 2인1조가 되어 각자의 포대에 담긴 삶은 콩들을 발로 밟아 으깨기 시작했다. 포대기 밖으로 밀려나지 않게 살짝 끌어안고 지근지근. 아이들은 서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더 꼭 끌어안고 콩콩거린다. 메주 공장이 돌연 아이돌 공연장이 되었다. 콩이 으깨지면 아이들은 김장 버무리는 커다란 비닐 방석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메주를 만든다. 아이들이 만든 메주에는 하나같이 그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토끼를 만드는 녀석, 하트를 만드는 녀석, 그 옆에서는 메이커도 없는 자동차를 제조하는 녀석. 분명 네모지게 만들라고 버럭버럭 소리도 질렀지만, 아이들은 요지부동이다. ‘못생기면 어떠냐! 아이들 손으로 빚은 메준데. 그래도 맛은 똑같은걸?’이라는 생각으로 굳이 내 손길을 더하지 않기로 했다. 완성된 메주는 생긴 대로 메주다. 적당량의 바람과 햇살과 그늘이 맛있는 메주로 변신시켜 주었다. 자신들이 만든 된장을 밥상에서 만나는 불편한 즐거움? 이는 아이들에게서 들었던 후일담이다.
곶감 만들기 수업도 아이들에겐 인기가 좋았다. 강화도 남쪽에 사는 김씨네 감농장에서 가져온 장준감. 아이들과 둘러앉아 감자칼로 껍질을 벗긴다. 처음엔 감자칼을 쓰는 게 서툴러서 툴툴거리던 환이. 한 박스가 끝나갈 즈음엔 선수가 되었다. 감자칼 쓰는 게 위험하다는 선입견으로 시키지 않았다면 못 했을 경험을 통해 아이들은 또 한뼘, 영혼의 지평을 넓혔을 것이다. 강화도의 은근한 바람과 부드러운 햇살로 말린 곶감은 아이들의 추억 한 편에 자리하여 추운 겨울을 달달하게 만들어 주기도 할 것이다.
겨울이 오기 전 ‘품앗이 학습’의 한 해 마무리를 근사하게 할 ‘거리’를 논의하던 부모와 아이들은 문화소외지역인 우리 동네만의 문화를 만들기로 했다.
주인공은 아이들이다. 그간 배워왔던 것을 연습하여 발표하기로 했다.
부모들은 십시일반으로 먹거리를 준비하고 아이들은 시와 그림과 음악과 춤을 각자의 개성대로 준비했다. 장쌤은 광목에 그림을 그리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안내판을 만들었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현수막이 완성되었다. 행사의 기획과 공연 연출은 오롯이 아이들의 몫이었다. 어른들이 의논하는 자리에 아이들은 놀면서 참여했고 수시로 자신들의 의견을 발표했다. 외면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신중하게 참고했다.
가을이 깊어 가고 먹거리도 풍성한 가을 날 저녁, 우리 집 마당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뚝딱뚝딱 만들어진 야외무대는 농협 창고의 팔레트를 빌려와서 급조했다. 초등학교에서 빌려온 관객용 플라스틱 의자, 그리고 외포리 교회에서 빌려온 앰프와 마이크까지. 필요한 모든 것은 발품으로 구색을 갖추었다. 아쉬운 대로 완벽했다.
아이들이 학교 방과 후 교실에서 배운 바이올린과 첼로, 플루트 연주는 피아노 선생님의 반주가 있어 더욱 돋보였다. 아직 연주가 서툰 꼬맹이들은 무대 위에서 춤을 추고, 시를 낭송했다.
마당에는 아이들 자신들이 쓴 시에 그림을 그려서 이젤에 올려두었다. 글씨를 읽으라 켜놓은 전등이 마당 구석에 있는 감나무의 감들처럼 보기에도 좋았다.
마당 뒤편에서는 진아 아빠와 효준이 아빠가 아이들이 공연을 하는 동안 고기를 굽는다.
적잖은 사람들의 입을 책임지려면 초벌구이는 필수다. 집게로는 턱없이 모자라 목장갑 두개를 겹쳐 끼고 손으로 뒤집어가며 고기를 구워냈다. 연주자의 음악 소리와 삼겹살 굽는 냄새가 묘한 하모니를 이루어낸다. 좀 시골스러워도 근사했다.
진정한 아마추어 연주자들을 위해 프로 음악가와 유명 문인들도 초대했다. 그분들 보수는 숙식 제공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기꺼이 와주셨다. 우리들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해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덕분에 공연의 품격은 높아졌고, 주민들은 가만히 앉아 유명인을 만났다.
이제 제일 중요한 관람객 모시기. 아이들은 직접 초대장을 만들고 초대의 글을 써서 들판에 핀 강아지풀, 코스모스등 들꽃들을 초대봉투에 끼웠다.
제일 먼저 드리고 싶은 한분, 아랫논 병채할아버지다.
평생 한번도 공연을 본 적이 없다던 병채 할아버지는 논에서 일하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시간 맞추어 오셨다. 앞집 큰할아버지랑 같이. 뭘 가져와야 할지 몰라 박카스 선물세트 하나 샀다며 쭈뼛쭈뼛 검정 비닐봉지 하나 건네신다.
관람객 의전을 담당하는 울 꼬맹이들, 나름 로얄석으로 할아버지들 모셨다.
“안녕하세요, 동네 식구들 여러분. 지금부터 제 1회 작은어울림을 시작하겠습니다.”
일곱살 보듬이의 사회로 외포리 저녁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십여년 전의 그 작은어울림, 지금은 강화도의 필팸장학재단으로 더 커졌다. 각자의 위치에서 제 역할을 하다가 일년에 두번 모인다. 그때의 그 녀석들도 있고, 뜻을 같이 하는 새 식구들도 있다. 커피값 모아 강화도 청소년들에게 장학금도 주고 각자의 재능도 기부하고.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 그 녀석들, 각자의 자리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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