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회 영농·생활 수기 가작-청년부문] 내일을 여는 우리

관리자 2024. 8. 19.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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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회 영농·생활 수기 가작-청년부문] 김수로 (31·전남 고흥군 도양읍)
토마토 재배 실패서 교훈 얻어
주어진 일 성실하게 실행 첩경
김수로씨가 전남 고흥 스마트팜 혁신밸리에서 수경재배가 끝난 작물의 줄기를 정리하고 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했던가. 오랜 명언을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아보려 했지만 쉬이 털어 내기엔 너무 비싼 수업료였다. 토마토 농사 2년 차, 내 집 마련의 꿈도 아직 이루지 못한 초보 농부에게 수천만 원에 달하는 손해는 가혹하게만 느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격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지난해 값이 좋았다는 얘기에 너도나도 심은 탓이었다. 여름이 가까워지며 시장에 물량이 쏟아졌고, 인건비와 운임을 생각하면 버리는 게 나을 지경이었다. 결국 남편과 나는 당초 계획보다 이르게 농사를 접어야 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일은 제법 순탄하게 흘러갔다. 작년 여름에 심어 겨울을 무사히 넘긴 토마토는 봄을 맞아 싱그럽게 몸집을 키워냈고, 기온이 점점 오르자 가지마다 굵은 알을 맺었다. 자라는 속도가 빨라져 새벽에 작업을 시작해도 해가 저문 뒤에야 끝났다. 수확하는 날엔 허리가 아픈 것을 견디며 토마토를 무게에 따라 나눠 포장한 뒤 층층이 쌓아 올렸다. 일을 마치고 가지런히 정렬해 있는 토마토 상자를 보고 있으면 고단함이 날아가는 듯했다.

간절히 기다리던 아기가 찾아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지금은 온실을 빌려 농사를 짓고 있지만, 훗날 우리만의 농장을 지어 예쁜 집에서 아이와 함께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잠들곤 했다.

순조로운 나날에 마음이 풀어진 탓이었을까? 언젠가부터 토마토가 이상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기온이 높은 시기에 나타날 수 있는 ‘배꼽썩음병’이었다. 예년보다 이른 여름이 찾아왔다고는 해도 단지 날씨 탓으로 보기엔 병이 번져 나가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빨갛게 익은 열매부터 아직 초록색으로 달린 것까지 점점 썩어 들어갔고, 버리는 토마토가 1t들이 자루를 가득 채웠다.

원인은 한 번의 실수와 우리의 무지였다. 수경재배를 하고 있어 여러 가지 비료를 처방에 맞게 섞은 뒤 물에 희석해 주는데, 배합을 잘못해 토마토에 꼭 필요한 영양분이 충분히 공급되지 않은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수확량은 급감해 반 토막이 났고, 토마토가 회복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운전하면서도, 자기 전에도 배꼽에 구멍이 난 것처럼 까맣게 썩은 토마토가 떠올랐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곱씹으며 후회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조금만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하루를 마친 뒤 텔레비전을 함께 보며 웃음소리로 채웠던 저녁 시간은 걱정 어린 한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태어날 아기를 생각하면 덜컥 겁이 났다. 경제적인 문제와 더불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다. 내 잘못으로 아이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과장된 생각이라고 마음을 달래보았지만 두려움은 가슴 한편에 남았다.

여느 때처럼 남편과 농장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데, 문득 햇볕에 그을린 그의 얼굴이 많이 어두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항상 에너지가 넘치던 남편에게 그늘이 진 것을 보며 언제까지 지나간 일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겐 서로가 필요했다. 서로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만이 건넬 수 있는 위로가 필요했다. 난 그에게 말했다. 괜찮다고,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비싼 수업료 낸 셈 치자고.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그동안 당신 정말 잘해오지 않았느냐고. 내년에 더 잘해보자고.

생각해 보면 처음 겪는 일은 아니었다. 과거에도 그랬다. 미래를 생각하면 막막하고 자신감이 사라졌던 때가, 그럼에도 길을 찾아 한 걸음씩 내디뎠던 때가 말이다.

내가 토마토와 처음 인연을 맺은 건 6년 전 뉴질랜드에서였다. 당시 농업계 학교 학생들이 지원할 수 있는 해외연수 프로그램이 있어 대학 졸업 후 1년여간 준비한 끝에 뉴질랜드 땅을 밟았다.

좋은 기회를 얻어 기쁜 마음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 가득했다. 마음 같아선 해외연수를 마치는 대로 농업 현장에 몸담아 나만의 농장을 꾸리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땅과 자본금이 전무한 상태였다. 청년 농부들을 위한 저리 융자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억대의 빚을 안고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일단은 무엇이든 열심히 배워보자는 마음으로 뉴질랜드로 향했다. 현지 학교에서 이뤄진 수업은 생각했던 것보다 즐거웠다. 영어로 진행하는 강의를 따라가기가 벅차기도 했지만 새롭게 알게 된 다양한 원예작물을 가꾸는 방법과 여러 농업의 형태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학교에서는 작물을 세심히 관찰하고 돌보는 자세를 강조하곤 했다. 결국 농사의 성패를 가르는 것은 선진 영농 기술이 아닌 내가 기르는 작물과 땅, 자연에 애정을 갖는 것이라는 걸 느꼈다.

이론 수업을 마치고 실습을 시작한 곳은 방울토마토 유리온실이었다. 그곳의 토마토를 처음 맛봤던 순간은 여전히 선명하다. 방금 수확한 열매를 옷자락에 쓱쓱 문질러 입에 넣자 붉은 열매 안에 알알이 맺힌 과육이 터지며 달콤함과 상큼한 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이제껏 먹어본 그 어떤 토마토와도 비길 수 없는 맛이었다. 토마토를 썩 좋아하지 않던 내가 즐겨 찾게 된 건 그즈음부터였다.

맛있는 토마토를 키우는 데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50~60명에 달하는 작업자들은 숙련도에 따라 다른 업무를 맡았다. 내가 주로 했던 일은 수확과 하엽 제거였다. 빽빽하게 들어찬 토마토 사이에서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쉼 없이 손을 놀리고 있으면 굵은 땀방울이 비 오듯 쏟아졌다. 숨 막히는 더위에 차가운 물을 팔과 다리에 뿌려 열을 식히기도 했다.

처음 실습을 시작했을 땐 예상을 뛰어넘는 고된 작업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루 9시간, 주 6일을 무더운 온실 안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몸은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일을 더 잘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쌓아갔고, 일과를 마친 뒤 토마토에서 묻어 나온 진액으로 노랗게 물든 팔을 문질러 닦을 때마다 조용한 성취감을 맛보았다. 누군가에겐 단순 반복 작업의 일상일지라도 내게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내일을 그리는 오늘이자, 나의 가치를 만들어 가는 일이었다.

그때의 경험이 운명처럼 나를 이끌었는지 모른다. 4년 뒤 나는 미래 농업을 꿈꾸는 남자를 만나 결혼했고, 직장을 다니며 모은 돈을 보태 토마토 농사에 뛰어들었다.

온실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다고는 하지만 직접 농장을 운영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실전에 들어서자 여러 실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해가 저문 뒤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곁순을 따다 토마토의 머리 부분인 생장점까지 잘라 버린다든가, 멀쩡한 열매를 기형과와 혼동해 모조리 따버린다든가…. 그야말로 초보적인 실수들은 내게 끊임없이 겸손을 가르쳤다.

크고 작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우리는 점점 성장했다. 남편과 함께 언젠가는 우리만의 토마토 농장을 짓자는 꿈을 키웠다. 비록 뼈아픈 실패를 겪었지만 그건 곧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을 얻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말처럼 단단해질 일만 남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난 일을 곱씹으며 마음 아파하는 대신 앞을 보며 달려가고 있다. 1~2년 차 매출과 3.3㎡(1평)당 생산량을 계산해 다음 작기에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세웠고,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과제들을 의논했다. 남편은 필요 작업과 병해충, 광량, 기온 등을 월별로 직접 기록한 재배 매뉴얼에 여름철 뿌리가 영양분을 더 잘 흡수할 수 있는 방법과 온습도 관리 등 병해 예방법을 꼼꼼히 보완했다. 토마토에 주는 물 역시 기계로 영양 성분과 농도를 정확히 확인한 뒤 공급하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과제는 ‘온라인 판매 확대’다. 기존엔 대부분의 물량을 계약재배로 납품하거나 공판장에 출하했는데, 소비자와 직거래하면 유통마진이 없어 최소 30% 이상의 좋은 가격을 받을 수 있다. 지금 운영하는 온라인 쇼핑몰은 아직 규모가 작지만 고객들의 반응이 좋다. 농장에서 직접 토마토를 받아볼 수 있어 더 신선하고 믿을 수 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오는 8월에 시작하는 다음 작기에는 온라인 쇼핑몰을 다양한 방식으로 홍보해 사람들에게 우리의 토마토를 더 널리 전하는 것이 목표다.

농사에는 지름길이 없다. 성실하고 꾸준하게 주어진 일을 해 나가는 것만이 내일을 열어가는 길이다. 실패하더라도 도망치지 않고 문제에 의연히 맞서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태어날 아기에게 당당한 부모가 될 수 있도록, 대단한 성공은 하지 못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도록 주어진 매 순간을 힘껏 살아내고 싶다. 전 생애에 걸쳐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꽃들처럼, 묵묵히 뿌리를 뻗으며 자라나는 나무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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