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 딸 “아버지, 평생 나라 되찾으려 애써”

뉴욕/윤주헌 특파원 2024. 8. 19.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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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 독립운동 기록 발굴’ 이해경씨, 뉴욕한인회로부터 감사패 받아
의친왕의 다섯째 딸 이해경 여사가 15일 미국 뉴욕한인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저는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받으신다고 생각하고 받겠습니다.”

15일 미국 뉴욕 맨해튼 뉴욕한인회관에서 열린 79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의친왕의 딸 이해경(94) 여사가 뉴욕한인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여사는 의친왕이 미국 버지니아주(州) 로어노크대에서 유학하던 시절 한인 청년들과 독립운동을 한 기록을 찾아내 공개하는 등 미국에 있는 조선 관련 자료를 찾고, 미 현지에서 워싱턴 DC에 있는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환수 운동을 펼치는 등 재외 한국 유물 반환에 노력한 공로로 이날 감사패를 받았다. 이 여사는 2013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조선 왕실의 투구와 갑옷을 돌려달라며 일본 정부에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날 본지와 인터뷰를 한 이 여사에게 그동안의 활동을 부친에게 말한다면 뭐라고 할 것 같은지 묻자 “아버지는 함부로 말도 붙이기 어려웠던 존재”라면서 “(말씀을 드리면) ‘네가 그랬어?’라며 웃으실 것 같다”고 했다.

1930년 5월 의친왕의 다섯째 딸로 태어난 이 여사는 세 살 때 생모와 헤어지고 이후 의친왕비의 손에 자랐다. 경기여고와 이화여대 음악과를 졸업한 뒤 미국 용산 기지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했다. 당시 알게 된 미군의 도움을 받아 1956년 미국으로 건너와 텍사스 메리 하딘 베일러 여대를 졸업했다. 당시 의친왕비가 사준 피아노를 팔아 비행기표 값을 하고 수중에는 80달러만 있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1959년부터는 뉴욕에서 생활했다. 일주일에 10달러를 내는 방 한 칸 얻어 살며 하루에 5달러씩 받고 식당 종업원으로 일했다. 또 일본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맨해튼에 있는 일본 다카시마야 백화점에서 4년, 한국의 유치원 격인 데이케어센터에서 4년을 일하며 영주권을 얻었다. 1969년엔 미 컬럼비아대 도서관 사서가 되어 1996년까지 27년 동안 일했다. 이 여사는 “당시 한국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아 한국과 관련된 책이 많이 필요했다”면서 “도서관에 들어오는 책을 고르는 일을 담당했는데 한국 역사책을 특히 많이 사들였다”고 했다.

1997년엔 아버지 의친왕의 행적을 알리는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라는 회고록을 냈다. 도서관에 있는 책으로 공부하면서 썼다고 했다. 이 여사는 “우리 집안이 결국 책임을 못 지고 나라를 잃었지만, 아버지는 그게 너무 속상해서 평생 어떻게든 나라를 되찾기 위해 열심히 뛰셨다”고 했다.

2010년 초엔 1910년 단돈 5달러에 일본에 강제 매각됐던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반환을 위한 모금 운동도 직접 벌였다. 이달 초 미 워싱턴 DC 역사보존위원회는 이 공사관을 미국의 국가 사적지로 등록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여사는 “몇 년 전만 해도 어려울 것만 같았던 일이 현실화되니 감개무량하고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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