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교수들 잇단 사직...지역 대학 병원이 먼저 무너지고 있다
사표 쓴 지역 대학 병원 교수, 올 상반기만 작년 전체 사직자 80%
강원대·충남대·경상대·충북대 순...서울 수도권과 대도시로 옮겨
전문의 중심 병원 계획에 연쇄 이동...지방 필수 의료 붕괴 악순환
충청권에 있는 국립대 병원서 중증 심장병 환자 진료를 하던 A 교수는 최근 의대 교수직을 내려놓았다. 그는 심장박동이 망가진 심부전 환자를 진료하고, 인공 심폐 보조 장치(에크모·ECMO)와 인공 심장 이식을 관리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지난 4월에 열린 대한중환자의학회에서는 ‘심장 중환자실 생존율 향상’에 대한 논문으로 우수상을 받았다.
그러나 A 교수는 오는 9월부터 서울 인근 심장 전문 병원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전국적으로 심장 중환자를 전문으로 보는 의사는 이제 20명도 채 되지 않는다”면서 “(의료 사태 이후) 같이 일할 동료와 후배, 제자들이 없는데, 증증 고난도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에 더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 사직하고자 한다”고 소셜미디어(SNS)에 사직의 말을 남겼다.
◇지방 국립대 병원을 떠나는 교수들
강원대병원 내과 B 교수는 최근 병원을 그만두고, 서울의 대학 병원 수도권 분원으로 이직했다. 그는 강원도 춘천에서 갑성선 질환과 골다공증 환자를 의욕적으로 진료하고 연구하던 중진 교수였던 터라, 강원대 교수진은 그의 빈자리를 아쉬워하고 있다.
충북대병원 심장내과 C 교수는 충북 지역에서 유일하게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부정맥을 전기 침으로 심장 벽을 지져서 고치는 의사다. C 교수는 이제 시술을 접고 그동안 보던 환자를 정리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올가을 서울의 대학 병원으로 자리를 옮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당분간 충북 지역에는 부정맥 치료 시술을 하는 심장내과 의사가 없게 된다. 이 병원의 심장내과 D 교수는 지난 3월 병원을 그만두고, 부산의 종합병원 순환기내과 소장으로 자리를 옮긴 바 있다. 그는 급성 심근경색증 환자의 좁아진 관상동맥을 넓히는 스텐트 시술을 주도적으로 해왔었다.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정책에 항의하며 전국 전공의 9000여 명이 병원을 이탈한 의료 공백 사태가 6개월을 넘어가면서 해당 지역서 거점 병원 역할을 하던 지방 국립대 병원 교수들의 사직이 크게 늘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김윤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보건복지부를 통해 받은 자료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2024년 상반기 전국 국립대 병원 교수를 그만둔 이는 223명이다. 이는 2023년 사직자의 80%에 육박하는 수치다.
사직 교수들은 주로 비(非)수도권인 지방 국립대 병원 소속이며, 사직률이 가장 높은 곳은 강원대병원(춘천 소재)으로 전년도 대비 올해 상반기 사직 교수 수가 150% 늘었다. 그다음으로는 충남대병원(분원, 세종) 125%, 경상국립대병원(분원, 창원) 110%, 경상국립대병원(본원, 진주) 100%, 충북대병원(청주) 94% 순으로 나타났다.
복귀하지 않는 전공의들이 실제로 병원을 떠난 사직율은 57%로 집계됐다. 사직률이 가장 높은 진료과는 방사선종양학과(75%)였으며, 다음으로 흉부외과(63%), 산부인과(61%), 소아청소년과(60%)였다. 필수 의료이면서 기피 성향을 보였던 진료과의 사직률이 높았다.
◇지역 병원 인프라 무너질 위기
지방 국립대 병원 사직 교수 상당수는 서울이나 수도권 대학 병원 또는 인천, 부산 등 대도시 종합병원으로 이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또는 교수직을 버리고 대학 병원에서 진료만 하는 의사 이른바 촉탁 의사로 신분을 바꾸었다.
국립대 병원을 사직하고 종합병원으로 옮긴 E 진료과장은 “전공의 이탈 등으로 대학 병원 본연의 중증 필수 진료가 어려워진 데다 가르칠 전공의와 학생이 없으니, 교수로 남아있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며 “국립대 병원 교수 임금이 전문 병원이나 종합병원 의사의 절반도 안 되니, 상당수 지방 국립대 병원 의사들이 이직에 들썩이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 병원을 살리고 지역 의사를 양성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의대 증원 정책이 의정 갈등과 전공의 공백, 의료진 이탈로 이어지면서 역설적으로 지방 대학 병원과 지역 종합병원이 가장 크게 타격을 입고 있다. 대학 병원이 전문의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전망에 수도권에 전문의 수요가 늘면서 지역 의사의 연쇄 이동도 일어나고 있다. 경남 진주의 한 종합병원 원장은 “대도시 병원에 전문의 수요가 많아지면서 마취과 전문의와 응급의학과 전문의가 병원을 대거 그만두고 떠났는데, 새로운 의사를 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난감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지방 국립대 병원 존립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국회 문정복(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교육부가 제출한 국립대 병원 현황 자료(2020년~2024년 상반기)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국립대 병원 16곳의 올해 상반기 빚이 1조3924억원이다. 지난해 전체 차입금 1조3158억원을 넘어선 수치다.
충남대병원 분원(세종)은 상반기 기준으로 누적 포함 2813억원의 차입이 발생했다. 본원인 충남대병원(대전) 차입까지 합하면 3774억원이다. 다음으로는 창원경상대병원(2567억원), 경북대병원(1822억원) 순이었다. 의료진 부족으로 입원 환자, 수술 건수, 외래 진료가 전년 대비 20~36% 감소한 탓이다. 이 같은 상황은 사립대 병원도 마찬가지다. 의료 공백 사태 이후 모두 비상 경영에 돌입했고, 병상 가동률을 줄이고, 의료진 무급 휴가 등으로 버티고 있다. 현재 거의 모든 의과대학이 부속 대학 병원에서 지원금을 받아 학사 운영을 하는데, 현재의 대학 병원 경영 악화는 정원이 늘어날 의대 교육의 질에도 악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전국의대교수 비상대책위원회의 소속 한 교수는 “하반기에 의료 공백 사태에 지친 대학 병원 교수들의 이탈이 가속화되고, 중증 환자, 응급 환자 진료 공백은 더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며 “정부가 내후년 의대 정원 전면 재조정 같은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거나, 전공의 복귀를 포기하고 대학 병원 필수 의료 인력 확보를 위한 긴급 지원책을 내놓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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