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베인 자의 사후 운명은… 잘린 머리를 누가 들고 있는지 보라[김영민의 본다는 것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2024. 8. 18.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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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잘린 머리통 그림의 의미
적의 머리를 든 유디트와 다윗… 다시는 살아날 수 없는 죽음 선언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 든 생 드니… 죽음을 긍정해 새 삶 얻었다는 것
희생 넘어선 순교의 의미 강조
《2024년 파리 올림픽 개막식이 남긴 이미지 중에는 잘린 머리통을 들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다. 전 세계의 남녀노소가 보는 개막식에 잘린 머리통이라니, 이것은 지나치지 않은가. 퇴폐적이지 않은가. 글쎄, 이 정도가 퇴폐적이라면, 일본 문인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무주공 비화’에서 묘사한 잘린 머리는 뭐라고 부를 것인가. ‘무주공 비화’의 주인공 호시마루는 용맹을 떨칠 기회를 찾고 있는 어린 사무라이다.》




잘린 머리통 그림들을 어떻게 음미할 것인가. 만테냐의 그림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든 유디트’에서 적장의 목은 유디트의 손에 완전히 장악되었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익스프레스 트리뷴 홈페이지
참전을 기다리며 성 안을 배회하던 중, 그는 그만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어둠이 내리자 여리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성 안 깊숙이 자리한 방에 모여 참수당한 적장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있는 게 아닌가. 나비 날개처럼 고운 손으로 적장의 머리통을 지극정성으로 씻고 매만지고, 그 끔찍한 머리통을 어여쁘게 단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장면을 본 호시마루는 역겨움이 아니라 존재를 뒤흔드는 쾌락을 경험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여리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적장의 잘린 머리통을 씻기고 단장하는 모습에 왜 그토록 매료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 소설은 답하지 않는다. 다만 탐미적인 문장으로 그 퇴폐성을 어루만질 뿐. 호시마루가 목격한 장면 대신, 무사의 용맹한 전투 장면을 삽입했다면 어땠을까. 어쩐지 지루하지 않았을까. 무인들이 싸우다니 그것은 당연하고 건전하지 않은가. 건전한 만큼 그것은 지루하다. 호시마루가 목격한 장면 대신, 무사의 잘린 머리가 말발굽에 짓이겨지는 장면을 삽입했다면 어땠을까. 물론 그것은 끔찍하지만 어쩐지 지루하지 않았을까. 무인의 목이 베이다니 그것은 당연하고 건전하지 않은가. 당연한 만큼 그것은 지루하다.

그러나 곱디고운 여인들이 거칠고 거친 적장의 잘린 머리통을 씻기고 단장하는 장면은 다르다. 한때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노라고 기세 높던 무사가 한없이 무력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무력을 결여한 아름다운 여인들이 그 사나웠던 무사의 머리를 섬세하게 어루만진다. 희롱당하지 않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무사의 머리가 지극히 고운 손에 의해 희롱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여인들은 성사에 임하는 성직자처럼 정성껏 희롱하고 있으니, 그것은 희롱이라기보다는 희롱의 예식에 가깝다. 그 예식을 통해 피 흘리던 머리통이 극도로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바뀌는 것이니, 여기에 지루함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이 퇴폐적인 장면을 목격한 호시마루는 이 기억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한다. 오히려 강한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적장의 잘린 머리가 부럽다! 나 자신 목이 잘려 저 아름다운 여인들의 고운 손에 희롱당하고 싶다! 나 자신이 죽을 수 없다면 다른 식으로라도 그 경험을 반복하고 싶다! 마침내 호시마루는 적장의 머리를 잘라 오려고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든다. 그의 몸이 적진을 향할 때 그의 마음은 퇴폐의 심연을 질주한다.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다’에서도 골리앗의 목은 다윗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 원래의 몸에 다시는 연결될 수 없는 죽음을 선언한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익스프레스 트리뷴 홈페이지
이러한 ‘무주공 비화’를 떠올릴 때, 목 잘린 마리 앙투아네트 정도는 퇴폐적이라기보다는 건전해 보인다. 실로, 잘린 머리는 서양 회화사에서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소재다.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달라고 한 살로메 이야기, 거인 골리앗을 죽이고 목을 베어 든 소년 다윗의 이야기, 적장의 목을 베어 조국을 구하는 유디트, 괴물 메두사의 목을 베는 페르세우스, 목 잘려 죽은 그 많은 그리스도 전통의 순교자들. 서양 미술사를 개관하는 미술관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이 같은 그림을 마주하게 된다.
반면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통을 들고 있는 경우는 자기 죽음을 새로운 의미로 긍정하는 경우가 많다.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한 마리 앙투아네트도 자기 머리를 자기 손으로 들고 있음으로써 처형된 이후 얻게 된 새로운 정체성을 암시한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익스프레스 트리뷴 홈페이지
이 잘린 머리통 그림들을 어떻게 음미할 것인가. 잘린 머리통은 정확한 죽음을 지시한다. 그래서 상대의 목을 벤 사람은 떨어진 머리가 원래의 몸에 다시는 연결될 수 없음을 선언한다. 만테냐의 유디트 그림을 보라. 적장의 목은 유디트의 손에 완전히 장악되었고, 그 머리는 적장의 발과 거의 같은 위치에 있다. 이제 그 머리와 그 발은 영원히 한 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다윗 그림을 보라. 골리앗의 목은 다윗의 손에 완전히 장악되었고, 골리앗의 머리통은 몸과 완전히 다른 쪽을 향하고 있다. 이제 골리앗의 머리와 발도 다시는 한 몸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목 베인 자들은 부활한다. 자기 머리통을 타인의 몸에 이식해서 부활하는 게 아니라, 머리가 잘린 채로 부활한다. 자기 손으로 자기 머리통을 들고 있다는 것은 자기 죽음을 일단 긍정한다는 것이다. 나는 엄연히 죽었다. 엄연히 죽었기에 비로소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리하여 순교자들은 희생자가 되는 데 그치지 않고 죽음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은 주체로서 그다음 생을 살아간다.

그리스도교를 프랑스에 전파한 생 드니는 자신의 잘린 머리를 들고 있고, 석쇠 위에서 구워져 죽은 라우렌시오는 석쇠를 들고 있고, 산 채로 피부가 벗겨져 죽은 바르톨로메오는 자신의 살 껍질을 들고 있고, 눈알이 뽑혀 죽은 루치아 성녀는 뽑힌 눈알을 들고 있다. 그들이 들고 있는 머리통과 석쇠와 살 껍질과 눈알은 모두 자신이 누군지를 나타내는 정체성의 표지다. 나는 이렇게 죽었지만, 그것이 전혀 부끄럽지 않고, 그 죽음으로 인해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고 말한다.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 등장한 마리 앙투아네트도 자기 머리를 자기 손으로 들고 있음으로써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된 것이 아닐까.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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