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이겼다!" 김칫국 마시는 리더에게 따라오는 이것

이남석 발행인 2024. 8. 18.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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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78
생선과 육류 입에 대지 않은 순신
선조까지 나서 순신의 건강 걱정
셋째 아들 잃고 병 얻은 부인 방씨
왜적 제압하려 조·명 연합군 구성
구원병 요청 후 시간 벌기 난선 왜

위기는 언제나 '끝났다' 싶을 때 찾아온다. 왜군을 섬멸하기 위해 작전을 펴던 1597년 조·명 연합군도 승리에 취하는 순간 역습의 빌미를 제공했다. 비단 전쟁만이 아니다. 정치든 기업이든 마찬가지다. 권력을 잡은 순간에 위기의 씨앗이 싹튼다. 여야 대표가 새 임기를 시작했다. 김칫국을 먼저 마시는 자가 먼저 위기를 만날 거다. 역사적 진리다.

전쟁이든 경쟁이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이순신은 모친상을 당한 정유년 4월 이후 상례에 따라 생선과 육류를 입에 대지 않고 소찬으로 끼니를 때웠다. 전쟁으로 막내아들 면까지 전사했으니 식사다운 식사를 하지 못했다. 그 탓에 건강 상태가 눈에 띌 정도로 약해졌다.

그러자 입부立夫 이순신李純信(무의공)을 비롯 안위, 우치적, 송희립, 제만춘, 이언량 등 제장들은 이순신에게 개소(다시 육식을 하는 것)할 것을 여러 차례 간청했다. 이순신은 요지부동이었다. 12월 5일, 함선 점검 인력을 진도에 보내는 등 공무를 보고 있는데 도원수의 군관이 와서 선조의 분부를 전달했다.

"선전관에게 들어보니 통제사 이순신은 상제라고 하여 앞으로 나아갈 방편을 찾지 않아 여러 장수들이 민망하게 여긴다고 한다. 사사로운 정이야 비록 간절하겠지만 나라의 일이 한창 바쁘다. 또 옛사람이 이르기를 전쟁에 나아가 용맹이 없으면 효孝가 아니라고 했다. 전쟁에서의 용맹은 소찬이나 먹어 기운이 없는 자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예법에도 원칙과 방편이 있다. 반드시 원칙만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니, 그대는 나의 뜻을 깊이 생각해 소찬 먹는 일을 그치고 권도(목적을 위해 상황과 형편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도)를 따르도록 하라."

이 같은 지시는 이순신의 건강을 걱정하던 휘하의 장수들이 여러 경로로 선조에게 건의했기 때문이다. 휘하의 장수들은 이때부터 이순신의 건강 걱정을 털어놓고 수시로 조선 수군의 재건을 위한 여러 방책들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닷새가 지난 12월 10일, 이순신은 조카 해와 둘째 아들 열에게 집안 소식을 들었다. 안타깝게도 부인 방씨는 셋째 아들 면이 전사한 이후 병을 얻고 말았다. 10월 25일 저녁에는 위유사를 지냈던 황신이 전라순찰사가 돼서 이순신의 진중에 찾아왔다. 신뢰를 바탕으로 두 사람은 전라도 연안의 19개 군을 수군에 전속하기로 합의했다. 조·명 연합군의 울산 왜성 공격을 논의한 내용도 오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무렵, 천안 소사평에서 모리수원, 가등청정, 흑전장정 등이 이끄는 왜군을 물리친 명군 수뇌부는 남해안 일대로 물러나 있는 적을 제압하기 위한 대규모 공세를 펼치기로 했다. 조선군도 작전에 참가하는 조·명 연합군을 구성했다.

12월 21일, 경리조선군무 양호를 비롯 마귀, 해생 등 33명의 장수들이 4만명의 대군을 끌고 세 갈래로 나누어 내려갔다. 중로中路의 대장 고책은 군사 1만2000명을, 좌로左路의 대장 이여매는 1만3000명을, 우로右路의 대장 이방춘·해생은 1만1500명을 지휘했다.

조‧명 연합군은 가등청정을 잡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여기에 도원수 권율이 접반사 이덕형, 통역관 송업남 등 소수의 인원을 이끌고 양호의 진영에 합류했다. 충청병사 이시언의 군사 2000명과 평안병사 이경준의 병력 2000명은 좌군에 가담했다. 경상좌병사 성윤문의 군사 2000명과 방어사 권응수의 군사 200명, 경주부윤 박의장의 군사 600명은 중군에 가담했다. 또 경상우병사 정기룡의 군사 1000명과 방어사 고언백의 군사 300명은 이방춘의 우군에 합류했다.

5만여명의 조·명 연합군은 가등청정을 먼저 치기로 하고 울산으로 향했다. 가등청정은 풍신수길이 길러낸 장수로, 축성 전문가이자 왜군 최고의 강경파다. 명나라 장수들이 가등청정을 잡겠다고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가등청정을 잡으면 나머지 왜성들은 쉽게 공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가등청정은 울산 서생포의 본진 외에 도산島山에도 성을 쌓아 전진기지로 삼고 있었다. 경주를 넘어선 조명연합군 가운데 고책의 군사는 언양彦陽 방향에서 진격하다가 마주친 왜군 부대를 격파했다.

왜군 패잔병들은 도산성으로 쫓겨 들어갔다. 서생포에서 머물고 있던 가등청정은 도산성이 공격받는다는 보고를 받고 제일 먼저 도산성으로 들어갔다. 서생포에서는 후속으로 병력 600여명을 차출해 도산성으로 보냈으나 도중에 조·명 연합군에게 전멸하다시피 했다.

다음날인 10월 24일, 조·명 연합군의 좌군은 반구정 일대의 왜군 진영을, 중군은 도산성 주변 진영을, 우군은 태화강의 진영을 휩쓸었다. 도산성 외각에 진을 쳤던 왜군은 큰 피해를 입고 도산성 안으로 모두 피해 들어갔다. 25일 조·명 연합군은 4면을 포위한 채 일제히 공격에 나섰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26일부터는 조선군이 특공대로 들어가 화공을 펼치면서 공략했으나 병력 손실만 입은 채 물러나야 했다.

도산성 안의 왜군은 조·명 연합군의 계속된 포위 공격을 버텨냈으나 어느덧 식량난을 겪게 됐다. 하지만 결정타는 식수 부족이었다. 파주목사 김응서가 성안으로 연결된 급수로를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산성 안에는 우물이 없어 6000여명의 가등청정의 군사는 이중고를 겪었다. 특히, 식수난은 왜군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다. 왜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하게 버텼다. 오줌으로 목을 축이는 정도가 아니라 말의 피와 똥을 짜서 마시기도 했다. 가등청정은 모든 걸 포기하고 자결할 생각까지 품을 정도였다. 조·명 연합군은 '항복을 받아내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라는 김칫국부터 마셨다.

그런데 27일부터 이틀간 큰비가 내렸고, 그 뒤로 날씨가 혹독하게 추워졌다. 왜군은 시급한 갈증 문제를 해소했다. 하지만 양측 군사들 사이에 동상 환자가 속출했고, 이로 인해 양측의 사기가 모두 떨어졌다. 이때 조·명 연합군 총대장 양호는 가등청정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그러자 가등청정은 해를 넘긴 1월 3일에 회담을 하자고 제의했다. 이미 구원병을 요청해 놓은 터라 시간을 벌기 위한 수작이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명군은 새해 첫날부터 다시 성을 공격했으나 또 실패했다. 이런 가운데 2일부터 왜군 구원병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cvo@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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