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보다 강한 눈빛’ ‘세기의 미남’ 알랭 들롱 잠들다

박은주 기자 2024. 8. 1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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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들롱이 1960년 주연 리플리 역을 맡은 영화 ‘태양은 가득히’. 친구 필립을 죽이고 요트를 몰아 항구로 돌아오는 장면이다. 들롱은 이 영화로 세계적 스타덤에 올랐다./게티이미지코리아

“저는 특별했어요. 요즘 배우는 상상도 못 하겠지. 내가 살았던 것과 비슷한 삶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아요. 은퇴하는데 전혀 후회가 없어요.” “나는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잘생겼던 것 같아요. 여자들은 내게 사로잡혔어요. 내가 열여덟 살 때부터 쉰 살 때까지.” 알랭 들롱은 지난 2017년 영화계 은퇴를 선언했지만, 그의 직설 화법은 은퇴한 적이 없다.

‘프랑스 영화의 수수께끼 같은 천사’로 불렸던 세기의 미남 배우 알랭 들롱(Alain Delon)이 18일 프랑스 두시(Douchy)에서 89세로 별세했다. 그의 세 자녀는 이날 “알랭 들롱이 나빠진 건강과 사투를 벌이다 자택에서 가족과 루보(반려견)가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

1950년대 이후 프랑스 ‘누벨바그(새로운 물결)’ 황금기를 이끈 대중 스타로 ‘태양은 가득히’ ‘암흑가의 두 사람’ ‘한밤의 암살자’ ‘볼사리노’ 등 영화 90편에 출연하며 전 세계적 인기를 끌었다.

영화학자 데이비드 톰슨은 알랭 들롱을 두고 “프랑스 영화의 수수께끼 같은 천사, 1967년에 겨우 서른두 살이었고, 어쩌면 여성적이었다. 하지만 치명적이거나 강력하다고 생각할 만큼 진지하고 깨끗했다. 들롱은 훌륭한 배우라기보다 ‘놀라운 존재감’ 그 자체”라고 했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정다운

미남 배우를 넘어 ‘놀라운 존재감’

1935년 알랭 파비앵 모리스 마르셀 들롱(본명)으로 태어난 그의 어린 시절은 불우했다. 파리 외곽 소(Sceaux)에서 태어났으나 부모 이혼으로 네 살 때부터 위탁 가정에서 자라다 재혼한 어머니와도 살았다. 가출, 7번의 퇴학, 정육점 직원 등을 거쳐 17세에 입대, 베트남 사이공 해군 기지에서 복무하다 군 차량을 훔친 죄로 불명예 제대했다. 전역 후에는 파리의 도매시장인 레 알(Les Halles)에서 잡부로 일했고, 카페 종업원, 비서 등 다양한 삶을 살았다. 프랑스 여배우와 만나며 칸 영화제를 방문했다가 할리우드의 가장 유명한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의 눈에 들었다. 제작자가 영어를 배우라고 했지만, 그는 계약을 파기하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할리우드 영화에 그다지 많이 출연하지 않은 것은 이런 이유다.

1957년 데뷔작 ‘여자가 다가올 때’ 이후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0년 작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로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다.

‘태양은 가득히’와 비슷한 삶

관객들에게 이 미남 배우는 ‘톰 리플리’의 현실판처럼 인식됐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씨(The Talented Mr. Ripley)’가 원작인 ‘태양은 가득히’는 부자 청년 디키 그린리프를 살해한 리플리의 이야기다. 거짓을 사실로 믿고 싶어하는 ‘리플리 증후군’의 그 리플리를 충실히 연기했다. 관객은 거짓말하는 살인자에게서 슬픔을 봤다. 방탕하고 천진난만한 부자를 경멸하며 동시에 동경하는 가난한 자의 슬픔. 작가 필리프 라브로는 들롱을 두고 “그는 기쁨보다 슬픔에 더 잘 어울린다”고 했다. 감독은 들롱에게 디키 역할을 제안했지만, 그는 리플리를 고집했다.

세계적 흥행은 한국도 비켜 가지 않았다. 영어권 제목인 ‘보랏빛 오후(Purple Noon)’ 대신 프랑스 제목을 충실히 의역한 ‘태양은 가득히(太陽がいっぱい)’를 그대로 쓴 것도 신의 한 수였다. 미남 배우에게 ‘한국의 아랑 드롱’이라는 수식을 바치는 것도 이때 생긴 전통이다. 첫 영광은 당연히 배우 신성일이 가져갔다.

1967년 장피에르 멜빌 감독의 ‘한밤의 암살자(Le Samourai)’에 트렌치 코트를 입은 ‘사고하는 범죄자’로 선풍을 일으켰다. 그가 가장 사랑한 장르는 ‘필름 누아르(범죄 영화)’. 1973년 작 ‘암흑가의 두 사람’은 결국 교수형당하는 범죄자 알랭 들롱과 그를 감싸는 보호감찰관 장 가뱅의 연기 호흡이 호평을 받았다. 들롱은 장 가뱅과 연기할 때 가장 빛났다.

“범죄자들, 배우가 되기 전부터 내 친구였다”

실제로 범죄자와의 친분도 감추지 않았다. 그의 과거 보디가드가 총을 맞은 채 가방에 담겨 쓰레기장에서 발견되며 프랑스 사회는 알랭 들롱이 조연으로 나오는 ‘현실 범죄 드라마’를 보게 됐다. 들롱의 친구가 살인범으로 지목된 것이다. “내가 아는 갱스터 대부분은 배우가 되기 전부터 내 친구였다. 그들이 뭘하건 신경쓰지 않는다. 각자 자기 행동에 책임지면 된다.”

우익 정당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과 오랜 친구로 진보 노선을 거침없이 비판해 왔다. 특히 사형제 폐지와 동성 결혼 허용을 비판했다. 2019년 칸 영화제가 그에게 ‘명예 황금종려상’을 준다고 하자, 진보 진영은 강하게 반발했다.

‘세기의 미남’도 자연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2019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스위스에서 요양을 해왔다. 그의 아들은 “스위스에 거주하는 아버지는 상황이 닥치면 주저하지 않고 안락사를 택할 것”이라 말했다.

수많은 여성과 결혼하거나 동거했지만, 그가 가장 사랑한 여성은 영화 ‘크리스틴’(1958)에 함께 출연한 독일 여배우 로미 슈나이더(1938~1982)였다. 잡지 기자와 인터뷰하며 자살로 사망한 그녀를 떠올리면서 과거의 편지 문장을 꺼냈다. “비스콘티 감독은 우리가 서로 닮았다고 했었어. 분노, 두려움, 불안의 순간에 둘 다 미간에 V 자가 그려진다나. 렘브란트 자화상에 그려진 ‘렘브란트의 V’라고 하네. 하지만 지금 잠든 당신을 보면, ‘렘브란트의 V’는 사라졌어.” 이제는 그의 얼굴에서도 ‘렘브란트의 V’가 지워지고, 편안한 얼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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