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러 갈 때 목숨 걸지 않도록”…화성 향한 희망버스의 외침
참여자들 ‘파란 리본’ 추모
민주노총 “정부는 어디 있나”
재발 방지 대책 마련 등 촉구
지난 17일 오후, 여전히 불탄 2층의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는 화성 아리셀 리튬전지 공장 앞으로 전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였다. 이날 주최 추산 약 50개 도시에서 출발한 버스·승합차 100여대가 2500명가량을 태우고 왔다. 이들은 영정이 줄지어 있는 분향소에서 묵념 후 하얀 국화를 내려뒀다. ‘진심 어린 사과만이 진실을 여는 첫걸음’ ‘안전한 세상이 되길’ 등 각각의 바람이 담긴 문구를 파란 리본에 눌러 담아 공장 펜스에 걸었다.
서울에서 출발한 ‘희망버스’ 8대 중 1대에 기자도 함께 탔다. 2호차 ‘종교버스’에 탑승한 한 수녀는 “가장 힘든 일을 겪을 땐 외롭지 않나. 추모 집회에서 연신 감사하다고 한 유가족을 보고 희망버스를 타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한 예술가는 “일하러 갈 때 목숨 걸고 가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 한 대학원생은 “유가족들의 눈물이 마음에 응어리처럼 남았다”며 몸을 실었다.
사회적 연대의 대표적 상징이 된 희망버스는 2011년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 김진숙씨의 복직 투쟁 과정에서 시작됐다. 지금까지 23번 희망버스가 운행했다. 밀양 송전탑 반대 농성장에,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등에게 모였던 마음이 이번엔 화성 아리셀 리튬전지 공장으로 향했다. 사고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기 위해서다.
화성 아리셀 참사는 지난 6월24일 발생, 23명의 노동자가 숨지고 8명이 다쳤다. 희생자 중 17명이 중국 동포, 1명이 라오스 출신의 이주노동자였다. 23명 중 15명은 여성이었다. 유가족들은 지난 55일 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날 희망버스 참여자들도 폭염 속 투쟁에 함께했다. 2500명이 2㎞를 걸었다. 세월호 참사 생존자 장애진씨의 아버지 장동원씨(54)는 “참사가 계속 되풀이되니 이런 연대가 이어지는 듯하다”며 “처참하게 23명이 죽었는데 책임지는 사람이 없지 않냐. 국민이 죽어나가는데 그게 무슨 사회냐”고 말했다. 충남 천안에서 15년 동안 원어민 강사 생활을 한 케이트(54)도 “한국인이고 외국인이고 할 것 없이 한 공간에서 정말 많은 사람이 죽었다”며, 동남권 조선소에서 용접일을 하는 이주노동자 A씨도 “(참사 소식에) 슬펐다”며 길 위에 함께 섰다.
“책임자 처벌을” “더는 이런 일 없기를” 위로와 함께 전한 희망
더위에 얼굴이 익은 이들이 거리행진을 마치고 화성시청 옆 유가족 쉼터로 운영되고 있는 모두누림센터에 도착했다. 유가족 40여명이 숨진 가족들의 사진을 들고 희망버스 참여자들을 맞았다.
백기완버스·종교버스·기후버스 등 부문별 버스 대표자와 시민들이 무대에 올라 유가족들에게 위로와 연대의 마음을 건넸다. 서울 강서구에서 아내, 초등학생 아들 둘과 함께 온 직장인 한범승씨(51)는 “한 명 한 명 얼굴을 자세히 본 것은 오늘 분향소에서 처음”이라며 “너무 어리다.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그는 “한국 사회에 이주민이 엄청 많고 그들도 사회 구성원이지만, 많은 이가 그들을 못 본 체하는 것 같다”고 했다.
경북 구미에서 온 이지영 금속노조 한국옵티칼하이테크지회 사무장은 “아리셀 공장과 불탄 우리 공장이 닮아 가슴이 많이 아팠다”며 “옵티칼지회는 화재를 핑계로 청산한 외투기업에 맞서고 있고 7개월째 두 노동자가 고공 농성 중이다. 함께 투쟁하고 함께 승리하자”고 했다.
곧이어 노란 해바라기와 ‘오늘도 안녕’이란 문구가 새겨진 카키색 티셔츠를 입은 유가족들이 무대에 섰다. 유가족들은 “저희의 안녕은 6월24일 이후로 멈췄다. 처음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현재는 50일 넘도록 아무런 진상이 규명되지 않아 억울해서 거리로 나섰다”고 했다.
김태윤 아리셀 산재피해 가족협의회 공동대표는 “참사 당일 비상구에 완성품을 쌓아두지 않았다면, 폭발 시 빨리 도망치라고 교육했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참사 이전 3년 동안 있었던 4번의 폭발 사고 원인을 관계당국이 확인했다면 지난 55일은 안녕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우리 가족들은 불법 파견을 통한 불안정 고용 상태에서 자신이 어느 회사에서 일하는지도 모른 채 죽어갔다”고 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13일 아리셀에 대한 산업안전보건 특별감독 결과를 발표했다. 함께 발표한 안전대책엔 불법 파견 등 고용구조 개선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고 위험성 평가 제도 등이 크게 개선되지 않아 ‘맹탕’이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노동부는 아리셀의 중대재해처벌법·파견법 등 위반 여부에 관한 수사 결과는 추후 발표한다고 했다. 유가족들은 현재 민관합동기구를 통한 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처조카 김재형씨를 잃은 유가족 공민규씨는 “아리셀은 유가족에게 합의금 수령을 종용하고 박순관 아리셀 대표 등 임직원에 대한 처벌불원서를 들이밀었다”며 “우리 가족들을 데려다가 업무 지시를 해놓곤 유가족에게 이렇게 압박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라고 했다. 유가족들은 아리셀 측에 개별 합의 접촉을 중단하고 협의회와의 제대로 된 교섭에 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조만간 박 대표 구속 수사를 촉구하는 청원도 시작한다.
무대 위에서 희생자들의 이름을 읊은 김진희 민주노총 경기도본부장은 “사회적 참사의 원인을 밝히고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오롯이 피해당사자와 시민의 몫이라는 것을 이번 참사에서 다시 확인했다”며 “정부는, 국가는 어디에 있냐”고 외쳤다. 유가족 중 누군가는 얼굴을 찡그렸고, 누군가는 안경을 벗어 눈물과 땀을 닦아냈고, 누군가는 무표정으로 바닥만을 응시했다.
박채연 기자 applau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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