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의 전환의 상상력]시골 없는 도시라는 디스토피아
지난달부터 한 달에 1~2회씩 삼례에 있는 그림책미술관에서 시민들과 함께 시 읽기를 하게 되었다. 전라도 시골 소읍에서 시를 읽는 시간을 갖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공소해질 위험도 있는 일이다. 농촌 지역의 인구 감소가 어느새 ‘자연적’인 현상이 되어버린 현실 속에서 삼례도 나 어릴 적에 비해 인구가 많이 줄어든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다시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인근에서 가장 큰 장이 열렸던 때에 비하면 어림없을 것이다. 그렇다. 삼례는 내가 11세 때 이사 와서 자란 고향이며 아직도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곳이다.
영국의 문화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그의 주저 <시골과 도시>에서 영국의 문학 작품들에 그려진 목가적 전통을 거슬러 올라간다. 베르길리우스로부터 시작해 헤시오도스, 테오크리토스와 모스쿠스까지 목가적 시가 은폐한 농촌 민중의 실상을 환기시킨다. 한마디로 말해 시인들이 노래하는 황금시대, 즉 “노동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산하는 자연”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훗날 나타난 기독교적 자선 개념은 ‘소비의 자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며 “실제로 노동과 생산을 하고, 그 결과물을 생산비율과 상관없이 모두 나눠 갖는” ‘생산의 자선’을 강조한다.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이런 주장이 자신의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나왔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시골에 와서 잠시 목가적인 서정에 잠기는 것은 피할 도리가 없는 것 같다. 영국의 시인들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는 너무도 숨 막히게 팽창하고 지나치게 빽빽하고 따라가기 벅찰 만큼 속도가 빠르다. 혹자들은 에너지 효율 면에서 도리어 도시가 시골보다 생태적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도시일 뿐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도시다. 또 ‘생태’와 ‘효율’이라는 언어는 서로 상극에 가깝다.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잘 알겠으나 그의 시각도 부분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왜냐면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이 모두 노동의 생산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 흘러가는 강물이 노동 생산물인가, 아니면 길가에 핀 들꽃이 그런가. 사실 농업의 생산물마저 노자가 말한 ‘스스로 그러함’으로서의 자연(physis)이라는 근간 없이 불가능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진리이다.
완주군민은 안중에 없었던 공약
그런데 삼례에 시를 읽으러 갔다가 나는 뜻밖의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삼례에서 접한 민심은 전주시와의 통합 문제로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들어보고 또 찾아보니 전주시는 인구 감소와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완주군과 통합하겠다는 것이고, 완주군은 상반된 이유로 반대한다는 것이다. 내가 좀 의아했던 것은 현 전주시장이 완주군과 통합을 지난 선거에서 공약으로 내걸었다는 것인데, 어떻게 그런 무례한 선거 공약이 가능한지 이해가 안 됐다. 완주군과 군민의 의견은 안중에도 없는 공약이기 때문이다.
도농통합으로 농촌이 잃는 것들
전주와 완주뿐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통합 문제는 본질적으로 도시의 문제를 농촌 지역에 떠넘기는 결과를 언제나 남기고는 했다. 도시의 밀집 공간에 들어서기 까다로운 ‘도시를 위한’ 시설을 농촌 지역이 부담하라고 강요하는 게 한결 쉬워지기 때문이다. 이때 농촌에서 사라지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당장 기후위기 시대에 한 뼘도 아쉬운 녹지를 잃을 텐데 그것은 올여름 같은 무더위에 일조하면 일조했지 절대 덜어주지 않는다. 민주주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큰 도시의 행정에 농촌 지역과 농민들이 편입되면 분권의 정도와 수준은 심각하게 훼손되며 거대 행정 시스템 안에서 주민 목소리는 약화되기 마련이다. 이는 완주군민에게나 전주시민에게나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물론 비수도권 지역의 도시가 처한 현실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는 도시에 살든 시골에 살든 함께 고민할 문제인데, 이른바 삶의 질을 언제까지 물질적 지표로만 판단하고 사고해야 하는가 문제다. 우리에게 ‘좋은 삶’이란 것이 돈과 물질이 많으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경제성장이라는 멍에가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니나, 전주나 완주나 오래전에는 같은 동학의 땅이었다. 동학농민군은 전주화약 후 전주에 있는 전라감영에 대도소를 두었으며, 그해 가을에는 삼례에 집결해 2차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동학의 이념 중에는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서로 돕고 살자는 유무상자(有無相資) 정신은 있었어도 힘센 자가 약한 자의 것을 취하라는 말은 없었다. 이런 농민군을 두고 당대 일본의 평화사상가이자 활동가인 다나카 쇼조는 “동학당은 문명적”이라 평하기도 했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30년이 되는 해이다. 1차 봉기가 내부의 질곡을 혁파하자는 것이었다면 2차 봉기는 내부의 질곡을 강제하는 외부를 향한 싸움이었다.
황규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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