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소리] 고통은 아래로 흐른다
내가 소시민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티몬·위메프 정산 지연 사태’를 살펴보며 처음 든 생각은 “그럼 이제 해피머니 상품권을 못 쓰는 거야?”였다. 선물로 받은 채 사용하지 않은 3만 원어치 해피머니 상품권이 떠 올라서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 상품권이 반드시 필요했을 누군가를 쉽게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런 사태가 용돈 없는 청소년들에게 줄 영향이 걱정됐다.
나 역시 용돈 없는 청소년이었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중학교 시절 절반은 운동부 생활을 했고, 고등학교는 아침 점심 저녁이 모두 제공되는 기숙사에서 지냈기에 돈 쓸 일 자체가 많지 않았다. 주말이면 삶은 감자나 계란을 싸 들고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몇 권의 책을 번갈아 읽었다. 책을 유달리 좋아해서라기보다는 청소년이 무일푼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가 도서관밖에 없어서였다.
하지만 학교생활 내내 수도승처럼 혼자 지내기는 힘들었다.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시기였고, 함께 영화도 보고 카페도 가고 싶었다. 그런 나에게 ‘문화상품권’은 바깥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였다. 교내 대회나 외부 공모전 등에서 수상을 하면 상장과 함께 여러 종류의 상품권을 부상으로 받을 수 있었다. 시장에서만 사용 가능한 온누리 상품권을 줄 때도 있었지만, 가장 선호하고 또 자주 받았던 건 역시 해피머니 상품권이었다.
해피머니 상품권을 좋아하는 이유는 범용성 때문이었다. 웬만한 서점이나 영화관 등에서 모두 사용이 가능했고, 제휴 업체에서라면 외식이나 쇼핑도 할 수 있었다. 재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백일장을 중심으로 여러 공모전을 준비했고, 꽤 많은 상품권을 부상으로 받았다. 덕분에 용돈이 없어도 친구들과 약속을 잡으며 마음 졸인 적 없었다.
물론 상품권인 만큼 현금처럼 자유롭게 사용하기는 어려웠지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영화 값을 상품권으로 미리 계산하면 친구가 커피를 샀다. 제휴가 되어 있는 식당에서는 내가 통 크게 밥을 사기도 했다. 그러면 다음 만남에서는 꼭 친구가 밥을 샀다. 누가 미리 말하지 않아도 지켜지는 나름의 약속이 있었다.
가끔 친구와 헤어진 후에 상품권이 남으면 인근에서 가장 큰 서점이었던 남포문고에 들렀다. 도서관에서 마음에 드는 제목의 책을 고르는 일도,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몇 시간씩 읽고 싶은 책을 찾는 일도 싫지 않았지만, 신간 코너에 가지런히 놓인 때 묻지 않은 새 책을 집을 때의 두근거림은 특별했다. 어쩌면 책이 정말로 좋아진 건 그때부터였을지도 몰랐다.
돌이켜보면 그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친구들에게 부탁하거나 빚지는 게 부끄러워 방법을 강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자격지심 없이 타인과 나란히 마주한 경험은, 스스로를 긍정하고 돌볼 수 있는 기회도 함께 만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환경이나 상황 때문에 마지못해 결정된 게 아니고, 그 하나하나가 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소중한 조각들임을 그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세계는 온전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약속이 또다시 무너졌기 때문이다. ‘티몬·위메프 정산 지연 사태’는 복잡해 보이지만 본질은 간단하다. 이커머스 기업 큐텐의 자회사인 티몬과 위메프에서 소비자에게서 받은 상품 대금을 입점 업체들에게 지급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다. 그 돈은 어디로 갔을까? 큐텐은 2024년 2월 있었던 위시플러스 인수에 상품 대금을 전용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받는다. 적어도 업체들에게 지급해야 할 돈을 다른 곳에 사용한 건 분명하다.
깨진 신뢰는 우리 사회 곳곳에 상흔을 남긴다. 수십억의 피해를 입은 기업들, 상품 대금을 정산받지 못한 소상공인, 결제 취소로 오랜 시간 준비한 여행이나 일상의 계획이 망가진 소비자들의 고통이 상처 위로 흘러내린다. 하지만 고통은 여전히 차고 넘쳐서 가장 낮은 곳으로, 가장 힘없고 약한 이들에게로 낙수(落水)된다.
그렇기에 소시민인 나는 걱정이다. 거대한 고통의 가장 아래, 하찮고 사소해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곳에서 자라는 세계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 여물지 못한 세계에 침입할 고통이 생생해 돌아보게 된다.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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