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뇌물에 흔들린 明장수 꾸짖어…노량 진격 선봉서 최후
- “한 척 배도 그냥 보내지 않겠다”
-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 준비
- 왜군의 탈출협상에 넘어간 진린
- “남해 가겠다” 협공서 빠지려 해
- 그들은 포로 된 동포… 장군 격노
- “왜적 살리고 백성 죽이려 하나”
- 전투 이틀째 새벽 총탄에 순국
10월3일[11월1일] 맑음.
도독(진린)이 유 제독의 비밀 서신에 따라서 초저녁에 공격을 개시해 밤이 자정에 이르도록 계속 싸웠다. 그러나 유정의 육군은 나팔 소리만 내며 제대로 호응하지 아니했다. 그 결과 명 수군의 사선(沙船) 19척과 호선(虎船) 20여 척만 불에 탔을 뿐 별 소득이 없었다. 진린 도독이 화가 치밀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안골포만호 우수가 탄환에 맞았다.
10월4일[11월2일] 맑음.
이른 아침에 또 배를 몰고 나가 종일 적과 싸웠다. 적들은 갈팡질팡하며 황급하게 성 안으로 달아났다.
10월5일[11월3일] 맑음.
서풍이 크게 불어 각 배들이 간신히 정박하고 전투 없이 하루를 지냈다.
10월6일[11월4일]
맑았으나 서북풍이 크게 불었다. 도원수(권율)가 군관을 보내어 편지를 전하는데, “유 제독(유정)이 후퇴하여 달아나려고 한다”고 했다. 통분할 일이다. 나랏일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
10월7일[11월5일] 맑음.
아침에 송한련이 군량 4섬, 조 1섬, 기름 5되, 꿀 3되를 바치고, 김태정이 쌀 2섬 1말을 바쳤다.
10월8일[11월6일] 맑음.
10월9일[11월7일]
육군이 이미 (순천 부유로) 철수하였으므로 도독과 함께 배를 거느리고 바닷가 정자에 도착하였다.
10월10일[11월8일]
좌수영(여수)에 이르렀다.
10월11일[11월9일] 맑음.
10월12일[11월10일] 맑음.
나로도에 이르렀다.
(이후 10월13일부터 11월7일까지는 빠져있음.)
▶무술년(1598년) 11월
소서행장의 철수 날짜를 전해 들은 이순신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를 결심한다. 남의 나라에 와서 싸우는 명의 장수들이야 왜적의 뇌물 공세로 흔들릴 수 있어도 조선의 대장 이순신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조선의 사직과 백성이 받은 참혹한 7년 세월의 한(恨)을 “한 척의 적선도 그냥 돌려보내지 않음”(片船不返)으로써 풀고자 했고, 침략자를 응징함으로써 땅에 떨어진 정의를 세우고자 했다.
11월8일[12월5일]
명나라 도독부에 가서 위로연을 베풀어 종일 술을 마시고 어두워져서야 돌아왔다. 조금 있다 도독(진린)이 또 보자고 청하기에 다시 나아갔다. 보자고 한 이유는 도독이 육군으로부터 “순천 왜교의 적들이 10일경에 철수하여 도망가니 수군이 급히 진군하여 돌아가는 길을 끊어 막으라”는 기별을 받았다는 것이다.
11월9일[12월6일]
도독과 함께 일시에 함대를 움직여서 백서량(白嶼梁)에 가서 진을 쳤다.
11월10일[12월7일]
전라좌수영(여수) 앞바다에 가서 진을 쳤다.
11월11일[12월8일]
묘도(猫島)에 가서 진을 쳤다.
11월12일[12월9일]
<날짜만 나와 있다.>
*** 이날 아침 소서행장의 왜군은 철수 준비를 마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 했는데, 왜교성(순천왜성) 앞 묘도에 늘어서 진을 치고 있는 이순신과 진린의 함대를 보고는 경악했을 것이다.
11월13일[12월10일]
왜선 10여 척이 장도(獐島, 여수 율촌면 장도인데, 왜교성과는 아주 가까운 거리의 작은 섬이다. 지금은 매립되어 육지가 되었다)에 모습을 드러내어, 곧바로 도독과 약속하고, 수군을 거느리고 쫓아갔다. 왜선은 성으로 물러나 움츠리고 온종일 나오지 않았다. 도독과 함께 장도로 나아가 진을 쳤다.
※ 소서행장은 명나라 유정 제독의 뒷도움을 받아 이날 먼저 10척을 시켜 탈출해 나가려 했던 것이다. 묘도에 있던 이순신의 수군이 이를 물리치자 왜적은 더 이상 탈출을 시도하지 못했다. 그래서 소서행장은 진린과 뇌물로써 탈출 협상을 시도한다.
11월14일[12월11일]
왜선 2척이 강화를 하자고 바다 가운데까지 나오니 도독이 왜통사(倭通事, 왜 통역관)를 시켜 왜선을 맞이하고, 조용히 한 개의 홍기(紅旗)와 환도(環刀) 등의 물건을 받았다. 오후 6시에 왜장이 작은 배를 타고 도독부로 들어가서 돼지 2마리와 술 2통을 도독에게 바치고 갔다.
11월15일[12월12일]
이른 아침에 도독에게 가보고 잠시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왜선 2척이 강화 교섭을 위해 두세 차례 도독의 진중을 드나들었다.
※ 이날 이순신과 진린이 만나 한 이야기는 아래와 같았다 한다.
진린은 “나는 잠깐 소서행장을 버려두고 먼저 남해로 가서 그곳에 있는 적들을 토벌하려고 하오” 말하니, 이순신은 “안 되오, 남해에 있는 사람들은 적이 아니라 모두 포로가 된 우리 동포들이오”라 했다. 진린이 다시 말했다. “그러나 이미 적에 붙었으니, 적과 마찬가지 아니오.” 이순신이 다시 답했다. “귀국 황제가 왜적을 무찔러 조선 사람을 구하라 보냈는데 도독은 도리어 적을 살려 보내고 우리 백성을 죽이려 한단 말이오.”
부끄러움을 느낀 진린은 이순신을 위협하기 위해 허리에 찬 칼을 빼 들고 “이 칼은 우리 황제께서 내게 주신 칼이요.” 자기 말에 거역하면 누구도 죽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이순신은 위협에 굴하지 않고 말했다. “한번 죽는 것은 아깝지 않소. 나는 이 나라의 대장이 되어 결코 적을 놓아주고 우리 백성을 죽일 수는 없소.” 이렇게 이순신은 애국심으로 진린을 제압했고 진린은 결국 이순신과 함께 노량으로 간다.
11월16일[12월13일]
도독이 부하 장수 진문동을 왜군의 진영에 들여보냈다. 얼마 있다가 왜선 3척이 말 한 필과 창, 칼 등의 물품을 가져와 도독에게 바쳤다.
11월17일[12월14일]
어제 복병장(伏兵將)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만호 조효열 등이 왜의 중선(中船) 1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로부터 바다를 건너려 하는 것을 발견하고 한산도 앞 바다까지 쫓아갔다. 왜적은 해안에 배를 두고 육지로 달아났다. 왜선과 군량은 전부 포획했지만, 명나라 군사들이 와서 빼앗아 가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빈손으로 돌아와서 그 전말을 보고했다.
****이날 일기 이후의 일: 이날 저녁, 소서행장의 진영에서 이상한 횃불이 높이 올랐다. 소서행장을 구하러 남해에 모여든 시마즈, 소오 등의 일본 진영에서도 호응하는 횃불이 마주 올랐다.
뇌물을 받은 진린은 무슨 이유를 붙여서라도 왜적의 탈출을 묵인하고 싸우지 않으려 했으나 이순신의 불같은 애국심 앞에 그도 함께 싸우기로 한다. 조·명의 연합함대는 다음 날(11월18일) 밤이 어둡기를 기다려 뱃머리를 남해로 돌린다. 마지막 노량해전은 이렇게 시작한다.
18일 밤늦게 시작된 전투는 익일 낮까지 계속되었고 이순신은 이날 새벽 동 틀 무렵 적의 총탄에 맞아 순국한다. 임진년(1592) 1월1일부터 쓰기 시작한 그의 진중일기도 이날(무술년 11월 17일)의 일기로 끝나고 참혹하고 지루했던 임진 7년 전쟁도 그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린다.
◇의역 난중일기-이순신 깊이 읽기를 통한 난중일기 연재는 69회로 여기서 모두 끝나고, 다음 회에는 결산 토론을 실을 예정입니다.
※ ㈔부산여해재단·국 제 신 문 공동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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