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행복 갈구한 삶…주변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애 충실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 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2024. 8. 18.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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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12> 이병주의 행복론: ‘행복어 사전’ 1

- 동서고금 넘나든 인문학의 보고
- 괴테·니체·카프카·공자까지 담아
- 삶은 괴로운 과정이란 전제 뚜렷
- 어울림 욕망도 불행 증거라 일갈

- 보여주기식 인생살이는 낭비라며
- 사회규율 아랑곳 않는 일탈 동경
- 나림의 행복론은 미완의 진행형

사막에 불시착한 나폴레옹 같은 인물이 1970년대 서울에서 행복을 찾아 헤맨다. 고상한 품성에 따듯한 인물이다. 서울대학 문리대를 수석 졸업하고, 500대 1 경쟁의 신문사 교열기자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한 수재다. 귀티 나는 얼굴에 키도 헌칠하고, 로맨틱하다. 여성에게 인기가 많아 여난(女難)이 그치질 않는다. 서재필은 행복을 찾아 동서고금 명저를 독해하고, 개성 강한 동료들과 어울리며, 현장 이곳저곳에서 몸소 부딪쳐 본다.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이병주문학관에서 만난 ‘행복어 사전’. 행복에 관한 나림 이병주 작가의 사색이 짙은 인문의 향기 속에서 펼쳐진다.


▮나를 찾아서 행복 찾아서

서재필은 무용인(無用人)으로서 삶을 위해 사직한다. 시대에 대한 반감인지, 세상에 대한 저항인지, 뒤늦은 자기 정체성 찾기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그저 센티멘털리즘인지, 굳이 사서 고생하는 길로 간다. 안으로는 작가 지망생 겉으로는 백수를 자처한다. 원래 백수가 과로사하는 법. 백수 서재필은 안팎으로 좌충우돌이다. 과연 행복 찾기는 난제다. ‘행복어 사전’은 나림 이병주의 행복론이며, 서울 풍물지다. 나림은 한국 사회 만화경(萬華鏡)을 시종 농담처럼 그리고 있다.

‘행복어 사전’은 나림 인문학의 보고다. 괴테, 쇼펜하우어, 니체, 루드비히 마르쿠제부터 체호프, 카프카, 스트린드베리, 사빈코프, 사로얀, 헨리 밀러를 거쳐 미셸 푸코와 알렝 투렌 그리고 공자의 “기서호(其恕乎)”부터 장호(張祜)의 ‘종유회남(縱遊淮南)’까지 동서고금을 종횡무진한다. 뷔페처럼 풍성하고 단정하게 차린 클래식 식탁이 그저 황홀할 따름이다. 고전 읽기의 의미는 책 한 권을 통해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수발(秀拔)한 두뇌와 깊은 인정을 만나 대화할 수 있다는 점인데, ‘행복어 사전’은 고전 더미에 풍덩 빠지는 즐거움 한마당이다.

다만 나림 행복론의 출발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나림은 먼저 프로이트의 말을 인용한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는 의도는 애초에 신의 창조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한 걸음 더 나간 헨리 밀러의 말도 있다. “하느님은 불과 엿새 동안에 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하니 살기에 불편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엉뚱한 데가 있고 신경질조차 있는 하느님이라 칠 일째는 아예 손을 놓아버린 까닭으로 대신 우리들이 땀 흘려 일해야만 하는 것이다.”

▮은근한 자신감

이병주문학관에 전시되어있는 작가가 쓰던 만년필. 전민철 기자 jmc@kookje.co.kr


산다는 건 괴로운 일이란 전제가 분명하다. 행복은 그런 고통 속에서도 잘 살아가려는 지혜를 모색하는 것이다. 행복론은 지혜가 필요하지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니며, 총론으로서 행복론은 존재할 수 없고 그저 각론이 있을 뿐이라는 게 나림 행복론의 시작이다.

‘행복어 사전’은 3장이다. 남녀가 번갈아 작성해야 하는데 2장은 공저를 제안했던 여성 측이 참여하지 않아 빈칸으로 남았고, 그나마 3장에서 미완성으로 그쳤다. 함께 사전을 만들어가기로 약속한 서재필과 차성희는 서로 알아 갈수록 차이가 드러나 결국 연인도 못 되고 부부도 되지 못한다. ‘행복어 사전’ 제1장은 ‘행복을 위한 모든 조건을 단연 거부해야 한다’이다. 서재필은 좋은 머리에 성적으로는 늘 1등이지만 출세의 한 지표인 판검사가 되려 하지 않는다. 이유는 남의 일을 따져 들고 판단하는 일에 생리적인 외포(畏怖)를 가졌기 때문이다.

남의 사정을 꼬치꼬치 캐묻는 게 아니라는 마음가짐이 진하다. 사실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두뇌가 아니고 요령이다. 요령 있게 다듬어진 지식을 교양이나 지혜라고 하진 않는다. 그러니 대재(大才)는 시험에 곧잘 낙제한다.

서재필은 남에게 보여주려고 인생을 낭비하지 말자는 신조가 뚜렷하다. 페더고그(pedagogue·남을 가르치기 좋아하는 사람·교사)가 즐비한 학계도 적성에 맞지 않고,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도 취향이 아니다. 출세 부 명예를 좇는 것보다 자기 성찰에 힘쓰고 자기 통찰하려 애쓰는 게 진짜 행복에 훨씬 가깝다는 생각이다. “가난하지만 빈궁하지 않게”와 “비굴하지 않고 기죽지 않는 당당함”인데, 소시민을 지향하는 자유인이다. 대시민도 프롤레타리아도 싫다. 소시민 만세! 말하자면 은근한 자신감을 지닌 외류(外流)다.

▮오지랖과 풍류

사실 사람 내면에는 여러 자아가 있다. 있는 그대로 현실 자아, 사회 규율에 영향을 받는 당위 자아, 본인이 되고 싶어 하는 이상 자아 등이다. 성공한 사람 또는 행복한 사람은 대체로 현실 자아와 이상 자아를 중시하고 당위 자아는 다소 소홀하다. 행복은 경쟁에서 선두에 서려 애쓰는 것보다 자기 취향에 충실한 데 있다. 서재필이 살려는 인생이 바로 그것이다. 준수한 자질과 조건을 갖추고도 사회 수요에 무심하고, 혼자의 시간과 공간을 즐긴다.

어울리고 싶어 하는 사교 욕망은 자신이 불행하다는 방증이며,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생긴다는 의식이 확고하다. 정중하고 예의 반듯하나 사회 규율엔 아랑곳하지 않는다. 눈치 안 보고 태연하게 일탈한다. 양심의 가책 없이 자기모순을 범할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영혼이다. 다소 지나친 동정심과 의협심에 우연이 연속되고 우연에 따른 인연도 연속되지만 원래 로맨틱한 사건은 로맨틱한 사람에게만 생긴다. 나림의 중편소설 ‘마술사’에 관한 한 언론인의 표현대로 “세상에 따뜻하게 개입하는 오지랖과 풍류에서 모든 일은 시작된 것이다.”

세상에 원칙이 없어도 안 되지만, 원칙에 사로잡혀서도 안 된다. 서재필은 일반론을 거부한다. 니체 용어로 하자면, ‘예외자의 정신’이 충만하다. 예외자란 그 시대 지배적인 의견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이다. 인습에 복종하고 그 근거를 불문에 부치는 보통 사람과 달리 묻거나 따지고 혼자 일어나 아니라고 말하려니 버겁다. 그러나 자유롭다. 절충적으로 타협하지 않는 기백이 멋스럽다. 하지만 대가는 가혹하다. “나는 나에게 부적합한 시대에 태어났다”는 말이 있다. ‘그곳에서 나의 부재를 느끼는 사람’은 외롭다.

서재필도 사막에 불시착한 나폴레옹류의 인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 겨울 파리처럼 엉거주춤 서서 러시아워 풍경을 바라보며 어디로 향하는 러시란 말인가 하고 묻는다. 사막을 내부에 지닌 사람 사한(砂漢)은 슬프다. 행복해지기 어렵다.

▮웁살라

사람은 나름대로 살 수밖에 없지만 모처럼 좋은 재료를 갖고 형편없는 인생을 만들어선 안 된다. 기본은 해야 한다는 다짐으로 다양한 연애를 거쳐 “이 세상에서 한 여성의 불행을 건지는 것도 장한 일 아닌가” 하며 결혼한다. “인간의 지고 지대한 행복이란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릴 수 있는 심성에 있고 노력에 있다”는 철든 마음가짐도 한다. “어머니를 소중히 하는 사람은 마누라도 소중히 한다”며 아내에게 충실하려 애쓴다.

서재필은 루드비히 마르쿠제의 ‘행복의 철학’을 번역하고, 약한 자에겐 호랑이처럼 덤비고 강한 자에겐 고양이처럼 아첨하는 소인들과 맞서기도 하며, 나름의 방법으로 나폴레옹이 되려 한다. 하지만 ‘하룻밤 오십 킬로그램의 몸둥아리를 팔아서 육백 그램의 쇠고기를 사 먹는 창부’에게 연민을 느껴 간첩신고 사건에 휘말리고, 결국 서울역 구두닦이 소년을 일없이 동정하다 간첩으로 오인 구속된다. 혹독한 취조 중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며, 하룻밤 사이에 곤충이 되어버린 그레고리 잠자에 공감한다.

나림은 평소 “페사디나의 청년들은 달나라에 로켓 쏘아 올릴 궁리로 바쁜데, 한국의 청년들은 거리에서 최루탄과 싸운다”며 안타까워했다. 나림은 무혐의로 풀려난 후 우울증에 시달리는 서재필을 북유럽으로 보낸다. “무용인의 각오로 게으르지만 않는다면 기막힌 진실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맑은 영혼의 과학자 박문혜의 초청으로 ‘웁살라 엘리트’의 산실로 간다. 서재필이 웁살라대학 출신 작가 스트린드베리처럼 기막힌 성취를 이룰지, 따뜻한 오지랖으로 새로운 로맨스 만들기에 몰두할지, 나림은 열린 결말로 마무리한다.

나림의 행복론은 진행형이며 미완성이다.

※ 이 QR 카드를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하면 ‘나림 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시즌 1’ 강좌(오는 8월 26~9월 30일 매주 목요일 오후 7시부터) 신청서를 작성·제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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