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막을라꼬” 중국어·춤 배움의 열정…인형극 사회봉사도

박호걸 기자 2024. 8. 18.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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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번 버스가 간다 <9> 노인복지관

- 동래구노인복지관서 여가생활
- ‘유튜브 검색하기’ 교실은 북적
- “우리 할배 알려주려 배웁니더”
- 다른 층에선 중국어 수업 한창
- “中 방송 보려고” “여행 가려고”

- 강사 없어진 택견, 자발적 운영
- 회원들끼리 알려주며 활동 이어
- 인형극단은 매년 어린이집 공연

남을 여(餘)에 , 겨를 가(暇). 여가는 말 그대로 남는 시간이다. 세월은 훌쩍 지났고, 이제는 남아도는 게 시간인 나이가 됐다. 그토록 갈망하던 ‘여가 시간’에 무얼 하고 보내야 할까. 국제신문 77번 버스는 노인 여가의 핵심 거점, 노인 복지관을 찾아 활기찬 노년을 보내는 이들을 만났다.

지난 9일 오전 부산 동래구노인복지관 대강당에서 열린 라인댄스 프로그램에 참석한 노인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박호걸 기자


▮“죽을 때까지 배우고 싶다”

지난 9일 오전 9시 부산 동래구노인복지관 3층 스마트정보화실은 16명의 노인으로 가득 찼다. ‘나도 이제 스마트인’ 수강생이다. 이들의 시선은 유튜브로 영상을 검색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강사 A 씨의 입에 집중됐다. A 씨는 “우측 상단에 돋보기 모양 보이죠? 여기를 톡 치고 보고 싶은 것을 적으면 됩니다. 음식 영화, 원하는 거 뭐든 적어보세요”라고 말했다.

실버인형극단 ‘아이키퍼’ 소속 노인들이 인형극 연습을 하고 있다. 박호걸 기자


누군가 영화 보는 방법을 묻자 A 씨는 “영화는 저작권이 있어요. 그런데 오래된 영화는 저작권이 풀려서 무료로 볼 수 있는 데가 있습니다. ‘○○○’을 검색해 보세요. 여기서 오래된 고전 영화 보시면 됩니다. 다만 중간에 광고는 되도록 눌리지 마시고, 데이터가 많이 들어서 와이파이 되는 곳에서 보세요”라고 설명했다.

“아이고, 애러버라.”, “우리가 영화를 우예 찾겠노.”, “○○○에서 찾아보라 안 카나.” 쉬는 시간이 되자 수업 시간에 진도를 따라가지 못한 나이 많은 학생의 탄성이 터져 나온다. 일부 학생은 강사에게 다가가 질문을 쏟아낸다. “이래이래 하는 거 맞지예? 아, 이래하면 되네. 요새 영화는 없는 교?”

현대 미디어 환경을 따라가는 것이 벅차지만 활용도는 최고다. 노 모(79) 할머니는 “카카오맵도 설치해 지도도 보고, 네이버에서 차 시간도 검색하고 실생활에 많은 도움이 된다. 집에 가서 할배한테도 자랑하고 가르쳐주고 너무 좋다”고 말했다.

복지관 4층에서는 중국어 수업이 한창이었다. 강사 B 씨가 책을 한 권 들고 말했다. “칭 웬, 쩌 쓰 선머(실례합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16명의 학생이 큰 소리로 답했다. “쩌 쓰 이 벤 슈(그것은 책입니다).” B 씨가 성조를 달리하며 선창하자, 학생들이 따라 한다. 수업은 대부분 원어로 진행됐고, 함께 오래 배운 덕분인지 활기가 넘쳤다.

수업 중 강사가 뒤에서 취재 중인 기자를 앞으로 불렀다. 여기저기서 중국어가 쏟아졌다. “저는 중국어를 전혀 못 합니다”고 말하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중국어를 공부하느냐고 묻고 한국어로 답해달라 부탁했다. “CCTV(중국 기간 방송) 보려고”, “친구와 중국 여행 가려고”, “치매 안 걸리려고” 등 다양한 대답이 나왔다.

이광숙(81) 할머니는 이 반의 우등생이다. 2015년부터 매주 2회씩 중국어 강의를 듣고, 집에서 예·복습도 꾸준히 한다. 이 할머니는 “예전에 상하이에 여행 가서 조식을 먹는데 수박이 다 떨어졌더라고. 그래서 중국어로 ‘수박을 하나도 못 먹었다’ 말하니까 직원이 깜짝 놀랐지”라며 “언젠가 함께 수업하는 친구들과도 중국에 여행 가고 싶어”라고 말했다. 언제까지 배울 계획이냐 물었다. 그는 “난 언어를 배우는 게 너무 좋아. 걸어 다닐 수 있을 때까지 복지관에서 배우고 싶어”라며 웃는다.

대강당에는 라인 댄스 수업이 한창이었다. 라인 댄스(Line Dance)는 말 그대로 여러 사람이 줄지어서 같은 동작을 취하는 춤이다. 스포츠 댄스처럼 파트너와 짝짓지 않고 대열 속에서 춤을 춘다.

“꽃 피는 봄이 오면 내 곁으로 온다고 말했지.”

윤승희 노래 ‘제비처럼’이 흘러나오자 4열 횡대로 서 있던 28명의 어르신은 익숙한 듯 동작을 취했다. 양손 검지를 대각선으로 찌르고, 앞뒤로 스텝을 밟다 박자에 맞춰 손뼉을 쳤다. 어렵지 않은 동작이었지만, 단체로 줄 맞춰 춤을 추니 여느 군무보다 멋스러웠다.

김명숙(77) 할머니는 라인 댄스 때문에 활기를 되찾았다. 김 할머니는 “할 일 없이 집에서 폰만 보다가 3년 전부터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한 시간씩 라인 댄스를 배우고 있다. 근육도 붙는 것 같고, 허리도 펴지고 너무 좋다”며 “특히 춤 동작을 외우고 이를 직접 동작하기 때문에 치매를 예방해 준다”며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건강·행복 찾는 동아리

오후 4시 대강당 바닥에 푹신한 매트가 깔렸다. 택견 동아리 ‘새김’ 회원은 줄지어 대형을 갖췄다. 누군가 “얼른 하입시다”고 재촉하자 강사 대신 강민기(88) 회장이 중앙에 자리했다.

“오금치기, 시작”하고 강 회장이 외치자 회원들이 ‘이크 에크’ 하며 박자를 세며 동작을 취한다. 20개 동작으로 구성된 기본 체조가 약 20분 진행되고 본격적인 택견 수련이 시작됐다. ▷빗 밟기 ▷길게 밟기 ▷발 따귀 ▷ 칼 잽이 ▷학치 지르기 등 22개 택견 동작이 1시간 동안 계속됐다.

복지관에는 수업 외 동아리 활동도 활발하다. 매주 월·수·금요일 오후 진행된다. 원래 진행되던 택견 수업이 강사 사정으로 없어지게 됐는데, 학생들이 ‘우리끼리 수련을 계속하자’고 해 시작됐다. 남성 회원이 많을 거로 생각했는데 이날 참석자 16명 중 13명이 여성이다.

총무 김숙자(84) 할머니는 “원래 에어로빅 하다가 사범님이 멋있어서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자만 하는 운동인 줄 알았는데 전신 운동에 관절까지 풀려 여자가 하기도 너무 좋다”고 말했다.

강 회장은 “친구와 함께 등산했는데 너무 산을 잘 타더라고. 나는 무릎도 아프고, 허리도 아파 제대로 못 가겠는데 말이야. 비결을 물으니 택견을 한다더라고. 그래서 시작했는데 너무 운동이 좋아. 이 나이까지 아직 무릎 주사 한 번 안 맞았다”고 자랑한다.

사회봉사를 하면서 보람을 찾는 동아리도 있다. 복지관 소속 12명의 노인이 참여하는 실버인형극단 ‘아이키퍼’다. 이들은 매년 동래구 내 어린이집을 찾아 인형극 봉사를 한다. 올해는 지난 4월부터 매주 2시간을 투자해 아동성범죄 예방 인형극 ‘꽃은 어떻게 피나요’를 준비하고 있다. 지난 14일 첫 공연을 시작으로 총 13회 공연이 계획돼 있다.

김영순(84) 할머니는 2016년부터 인형극 봉사로 자신도 위안을 받는다. 김 할머니는 “내가 애 키울 때는 사는 게 바빠서 사랑을 듬뿍 주지 못했어요. 그런데 인형극 하면서 애들한테 사랑을 주고, 애들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인형을 보고 좋아하는 걸 보면 너무 행복해요”라고 말했다.

택견과 인형극 동아리 외에도 동래구노인복지관에는 서예 한문 컴퓨터 동아리도 있다. 이 중 영상 제작 동아리 ‘스위시’는 공모전까지 출품한 실력자들로 구성됐다. 복지관은 장소와 간식, 그리고 노인 일자리 강사를 지원해 줄 뿐 나머지는 모두 회원 스스로가 운영한다.

동래구노인복지관 정지희 관장은 “동래구 유일의 복지관이고 위치도 좋아 많은 어르신이 이곳에서 여가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확장을 했는데도 부족할 정도”라며 “분기별 모든 프로그램이 조기 마감되고, 대기자도 많아 추첨을 통해 기회를 드리고 있다”고 말했다.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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