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위한 변론 [세계의 창]
슬라보이 지제크 |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경희대 ES 교수
2024 파리 올림픽 개막식과 영화 ‘데드풀과 울버린’은 모두 아이러니로 가득한 볼거리를 제공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두 아이러니의 성격은 정반대다. ‘데드풀과 울버린’은 지배 질서에 거리를 두는 듯한 아이러니가 실은 체제에 대한 철저한 순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자기참조적인 농담들과 멀티버스 넘나들기를 활용해 진지한 중심 메시지가 부재한다는 사실을 감춘다. 하지만 연출가 토마 졸리가 예술감독을 맡은 파리 올림픽 개막식은 이와는 전혀 다른 아이러니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일단 이 행사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비판의 한 축은 헝가리 총리 오르반 빅토르의 평가가 잘 대변하는데, 그는 “서구인들은 국민국가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아무도 공통의 문화와 그에 기반한 공적 도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파리 올림픽이 그 증거다”라고 혹평했다. 이번 개막식을 유럽의 정신적 자살의 징후라고 보는 이런 비판과 달리 졸리는 진정한 유럽 유산을 보기 드물게 훌륭하게 펼쳐냈다. 그는 근대 철학의 출발점인 데카르트의 후예답게 그 입장을 개막식에 녹여냈는데, 그것은 자신의 전통이 타자의 ‘기이한’ 전통보다 결코 우월하지 않다는 ‘다문화적’ 경험이다. 우리는 특정한 민족적 뿌리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상대화해야만 진정으로 보편적인 입장에 도달할 수 있다. 이마누엘 칸트가 구분한 이성의 ‘사적’ 사용과 ‘공적’ 사용의 개념을 빌려 말하자면, 민족적 뿌리에 매달리는 것은 특정한 국가적, 종교적, 제도적 틀의 제약 안에서 협소하게 사고하는 이성의 ‘사적’ 사용에 해당한다. 반면, 이성의 ‘공적’ 사용은 이런 경계들을 초월해 세계시민사회 속에서 자유롭게 초국가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파리 올림픽 개막식에서 본 것은 바로 이런 유럽의 해방적 숨결이다. 물론 개막식의 이미지들은 프랑스와 파리에 관한 것들이었지만, 그에 딸린 자기참조적 농담들은 그 광경들이 이성의 사적 사용을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졸리는 프랑스라는 국가까지도 조롱하고 놀리면서 모든 ‘사적’ 제도적 틀과 철저하게 아이러니한 거리를 두는 데 성공했다.
개막식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이 행사가 성소수자 이데올로기로 범벅된 쇼이자 정치적 올바름에 매몰된 행사였다는 비판이다. 이는 완전히 잘못 짚은 비판이다. 이 행사는 우파 국가주의를 비판하긴 했지만, 정치적 올바름의 도덕주의에 대해서는 그보다도 더 신랄한 비판을 했다. 전형적인 정치적 올바름의 입장에서 다양성과 포용성을 어떻게 구현할지 걱정하는 척하며 특정한 포용의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모조리 배제해버리는 대신, 인종과 성별에 관계없이 모두가 마음껏 춤추도록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참수된 머리가 노래하고, 모나리자 작품이 센강을 떠다니며, 반라의 디오니소스 축제를 열고,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수하는 노동자들이 춤추도록 했다. 또 경기장 대신 센강과 역사적인 건물들을 따라 도시 전체를 무대로 삼아, 글로벌하고 다문화적이지만 동시에 프랑스와 파리의 고유성을 강조했다. 이런 아이러니하고 외설적인 스펙터클은 무미건조하고 유머 없는 정치적 올바름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졸리가 상상한 전쟁과 증오가 존재하지 않고 다양성으로 가득한 세계의 반대편에는 러시아의 우익 정치사상가 알렉산드르 두긴이 제시하는 세계가 있을 것이다. 두긴은 앞으로 세계는 미국 심층국가 대 러시아가 주도하는 주권 국가들이 상호 파괴의 공포 속에서 평화를 유지하게 될 것이라며, 도널드 트럼프를 인류의 구원자로 포장한다. 두긴이나 오르반과 같은 우파 국가주의자들에게 졸리는 더없이 윤리적 메시지를 보내며 속삭였다. 개막식을 잘 보고 부끄러운 줄 알라고.
번역 김박수연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당대표 연임 이재명 “윤 대통령, 단독회담 화답 기대”
- [단독] 부산역 아수라장 현장…KTX 궤도 이탈로 ‘찜통역’ 됐다
- ‘중일마’ 파문 확산…대통령실 “일본 사과 피로감 많아” 두둔
- ‘개인정보 유출 논란’ 카카오페이, 가명 정보처리도 안 했다니
- [단독] 국민연금 급여 수준 ‘유지 조항’ 둔다…소득대체율은 유지
- DJ 이후 첫 대표 연임 이재명 “더 유능한 민생 정당돼야”
- “열심히 산 게 무슨 죄야, 내 돈 내놔”…티메프 사태 피해자 뭉쳤다
- 김민희 “홍상수, 당신의 영화를 사랑한다”…로카르노 최우수연기상
- 파출소 순찰차에 갇힌 40대 여성, 36시간 만에 숨진 채 발견
- 기차들 멈춰섰다…‘KTX 신경주행’ 대구서 바퀴 궤도이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