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나무 얼굴아 붉어져라, 가을 오게

한겨레21 2024. 8. 18.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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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임의 산들산들]훼손된 땅에서 기세등등하게 자라는 개척자, 소금 묻은 열매와 전통 요리 즙장·한방 재료 오배자로 유용한 나무
일러스트레이션 차지우(중 1 학생)

붉나무는 야생에 정말 흔하다. 누가 돌보거나 보살피지 않아도 알아서 큰다. 억척스러운 기질로 뿌리를 내리고 양분을 모아 군락을 이루는 식물이다. 산을 깎으면 으레 생기는 비탈진 곳이나 척박한 땅에서조차 기세등등하게 자란다. 특히 도로를 내거나 건물을 짓기 위해 깎아낸 황폐한 땅을 서둘러 녹화시키는 능력이 대단하다. 그러한 이유에서 나는 붉나무를 소개할 때 엄지를 치켜들며 이렇게 말한다. 붉나무야말로 훼손된 땅을 복원하는 선구자요, 개척자라고.

여름 짧은 꽃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요즘 붉나무꽃이 제철이다. 잔별을 닮은 상아색 꽃 수십 송이가 다닥다닥 모여 커다란 고깔 모양 꽃차례로 핀다. 붉나무는 우리나라 전역에 살기 때문에 느지막한 여름 어느 동네를 가든 그 화사한 꽃을 감상할 수 있다. 붉나무는 암수딴그루다. 암꽃과 수꽃이 서로 다른 나무에서 핀다. 어떤 게 암그루이고 어떤 게 수그루인지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가늠이 된다. 꽃가루를 팡팡 내뿜는 수그루가 암그루보다 화려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수컷 공작의 깃털처럼, 수컷 각시붕어의 푸른 무늬처럼, 수컷 사슴풍뎅이의 뿔처럼 붉나무 또한 수그루의 꽃이 암그루보다 더 두드러진다. 암그루의 꽃은 비교적 단정하고 차분하다. 밑씨가 든 씨방을 지키려 꽃받침과 꽃잎이 씨방을 야무지게 에워싼 모습은 결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미의 본능적인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일까 싶다. 바야흐로 수정에 성공한 암꽃은 딴딴하게 열매로 익을 것이다. 영근 씨앗은 땅에 흩뿌려져 그다음 생을 이어갈 것이다.

반면에 수꽃은 꽃가루를 탈탈 남김없이 분출하고 나면 이내 시든다. 붉나무 수그루의 생애에서 반짝거리는 꽃의 시간, 참 짧다. 하지만 허망하지만은 않으리라. 수꽃에서 출발한 꽃가루가 암술머리에 닿고 밑씨를 만나 장차 씨앗으로 여물 것이므로. 꽃의 진정한 의미와 꽃의 미래를 비로소 드러낼 터이니. 어떤 사람은 붉나무 열매의 시간, 다시 말해 꽃 지고 난 후를 꽃이 필 때보다 더 기다리기도 한다. 붉나무 열매가 인간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만개한 붉나무꽃. 허태임 제공

붉나무의 다른 이름은 염부목(鹽膚木)이다. 한자 그대로 ‘소금 염’(鹽)+‘피부 부’(膚) 나무라는 뜻. 열매 거죽에 소금처럼 짠 하얀 가루가 생겨서 얻은 이름이다. 실제로 바다 멀리 산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소금 대신 붉나무 열매 표면에 소복이 내려앉은 그 분말을 썼다. 두부 만들 때 간수로도 넣었다. 짠맛을 내지만 정작 그 가루에 나트륨 성분은 없다고 한다. 신맛을 담당하는 사과산(말산)이 주를 이루는데, 인간의 혀는 그 맛이 소금처럼 짜다고 느낀다는 것.

열매처럼 생긴 벌레집을 찾아라

붉나무에는 열매처럼 생긴 벌레집이 생긴다. 진딧물의 한 종류인 ‘오배자면충’이 붉나무잎에 기생하여 만든 딱딱한 덩어리, 충영(蟲癭) 말이다. 붉나무 충영을 가리켜 한방에서는 오배자(五倍子)라 부른다. 붉나무 몸에 혹 같은 집을 짓기 시작한 진딧물은 세대를 거듭하며 개체수를 늘린다. 유월 접어들며 생기기 시작한 충영이 팔월에 이르면 족히 다섯 배는 부풀어 아기 주먹만 해진다. 오배자, 즉 ‘다섯 배(五倍) 열매(子)’라는 뜻의 이름은 거기서 나왔다. 여름을 통과하며 몸집을 양껏 키운 오배자는 가을이 되면 성장을 멈춘다. 그 무렵 오배자면충 진딧물은 벌레집 구멍을 뚫고 바깥세상으로 나온다. 벌레집 하나에는 수백에서 수천 마리의 진딧물이 산다. 약재로 쓰는 건 진딧물이 탈출하기 전의 충영이다.

나는 어릴 때 덩치가 작았고 병치레도 잦았다. 입안이 자주 헐어 아구창(구내염)을 달고 살았다. 생전의 우리 할머니는 정성껏 달인 오배자 물을 내게 자주 먹였다. 쓰고도 떫은, 군내 나는 그 맛 때문에 어린 나는 붉나무를 고약한 나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식물분류학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야 오배자가 염증을 다스리는 데 효험 있는 약재임을 알았다. 중국에서는 붉나무에 부러 상처를 내고 진딧물을 주입하는 방식으로 오배자를 대량 생산한다. 국내 약재상에도 중국산 오배자가 국내산보다 더 많이 유통되는 편이다. 우리 할머니는 동네 뒷산이나 집 주변에 자라던 붉나무에서 오배자를 직접 수확했다.

그걸로 삼베에 물도 들였다. 오배자 물이 어떤 날에는 비둘기색으로 들었다가, 또 어떤 날에는 제비꽃 색이 되기도 했다. 서로 다른 농도의 잿빛과 보랏빛으로 채색된 옷감이 빨랫줄에 걸려, 볕을 받고 바람에 흔들리며 말라갔다. 그 휘발의 시간 동안 가슬가슬한 천들 사이를 오가는 게 나는 정말 좋았다. 널어놓은 삼베에선 오배자를 삶을 때 밴 역한 냄새가 났다. 비위에 거슬리면서도 어쩐지 나는 그 냄새에 자꾸만 끌렸다. 냄새가 어느 정도 빠질 무렵 할머니는 천이 바싹 마른 것을 점검하고 천을 거두었다. 그러면 뒷산은 붉나무 단풍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붉나무 여문 열매. 허태임 제공

붉나무는 너무 붉어서 이름도 붉나무다. 가을에 단풍나무보다 일찍 붉은 단풍이 무척 아름답게 든다. 산과 들, 경작지와 벌채지, 민가와 폐가 가리지 않고 무리를 이루며 사니, 붉나무 단풍이 장관을 이루는 장소도 많다. 그중에 강원 춘천과 대구를 잇는 중앙고속도로 절개지에는 붉나무가 이룩한 고혹할 만한 절경이 있다. 소백산 죽령을 통과해 치악산을 넘는 동안에는 고속도로 휴게소나 졸음쉼터에 자꾸만 차를 세우게 된다. 붉나무 풍경을 감상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으므로. 그러니 가을에 중앙고속도로를 달리게 되면 그 음미의 시간까지 넉넉히 반영해서 운행 시간을 잡아야 할 것이다.

콩 데운 덩이를 말똥에 묻는 붉나무 즙장

붉나무 새순을 데쳐서 나물로 먹기도 한다. 장을 담글 때도 선조들은 붉나무를 썼다. 여름철에 주로 담가 먹는 즙장(汁醬)이 있다. 곱게 빻은 메줏가루를 보릿가루, 고춧가루와 함께 찹쌀죽에 섞은 뒤 소금에 절인 푸성귀를 박아 넣고 익힌 장, 집장이라고도 하는 발효 음식. 여름에 우리 할머니는 보리밥이랑 궁합이 좋다며 즙장을 즐겨 드셨다. 여름철 시절 음식이라고 했다. 텃밭에서 키운 오이나 고추를 장에 넣는 식인데, 어떤 단계에서 붉나무잎을 넣으면 그렇게 별미일 수가 없다고 했다. 숙성 기간이 짧아 담근 지 며칠 뒤면 먹을 수 있고 새콤하고 엇구수해서 보리밥과 잘 어울린다던, 할머니의 할머니한테 배워 익히신 거라며 나에게 비법도 알려주셨다.

15세기와 16세기 조선 시대 100여 년 동안 차례로 기록된 3대 요리책 ‘산가요록’ ‘수운잡방’ ‘계미서’에 하나같이 붉나무 즙장이 등장한다. 여름철에 수확한 곡식과 채소를 넣어 만드는데, 붉나무잎이 들어간다고 정확하게 기록돼 있다. 과정은 이렇다. 나흘에서 닷새 정도 콩을 물에 불려 밀기울(밀을 빻아 체로 쳐서 남은 찌꺼기)을 섞어 찐다. 데운 덩이를 붉나무잎으로 싸서 일주일가량 띄운 뒤 햇볕에 말리고 빻아 메줏가루를 만든다. 거기에 소금을 섞고 채소가 잠기도록 독에 담아 말똥에 묻는다. 이 과정에서 붉나무잎을 쓰는 이유를 여름철에 구하기 쉽고 잎의 크기가 커서 공기의 순환이 좋으니 숙성에 제격이라고 문헌은 설명한다.

붉게 물들어가는 붉나무 단풍. 허태임 제공

붉나무는 옻나무와 같은 혈통의 옻나무과 식물이다. 옻나무만큼 강한 독성은 없을 것이라고 보지만, 그럼에도 옻나무와 유사한 디엔에이(DNA)를 갖고 있으니 심하게 옻을 타는 사람이라면 붉나무 또한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 둘은 형태적으로 쉽게 구분이 된다. 옻나무와 붉나무를 비롯해 옻나무과 식물 모두가 잎줄기를 중심으로 작은 잎이 여러 장 깃털처럼 모여 달린다. 그중 붉나무 저 혼자만 잎줄기에 기다랗게 날개와도 같은 깃이 달려 있다. 또 하나, 붉나무는 잎 가장자리에 톱니처럼 깔쭉깔쭉하게 베여 들어간 자국인 거치(鋸齒)가 물결 모양이다. 그에 비하면 옻나무는 비교적 매끄러운 편이다.

수입산 정원수를 취급하는 업계에서 티피나옻나무라 부르는 나무가 있다. 우리 붉나무와 같은 속의 형제 식물인데, 붉나무보다 옻나무가 더 익숙하니 편의상 옻나무를 따와서 학명의 가운데 단어 ‘티피나’를 붙였다. 국가표준식물목록의 정식 이름은 미국붉나무다. 북아메리카 중동부 지역이 원산지이고 서양에서 관상용으로 널리 재배한다. 열매가 사슴뿔을 닮아서 사슴뿔붉나무라고도 부른다. 강렬한 색감의 단풍이 근사하고 열매는 겨울철 새들의 먹을거리가 된다고 사랑받으며 널리 심어 기르는 식물. 미국붉나무의 진짜 매력은 무엇보다 민속 식물로서의 가치일 것이다. 우리 붉나무처럼 미국붉나무도 열매 가장자리에 사과산(말산) 성분의 하얀 가루가 생긴다. 그 신맛을 내는 가루로 ‘인디언레모네이드’라 불리는 청량음료를 만든다. 아메리카 선주민 사이에서는 그래서 미국붉나무를 식초나무라고 한다. 새콤달콤한 맛이 나는 젤리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열매와 잎을 넣어 새금한 향이 나는 담배를 만들어 태우기도 한다.

고속도로 절개지 사면을 덮은 붉나무. 8월 중순 개화가 한창이다. 허태임 제공

제대로 대접 못 받는 우리 붉나무, 정원에 모셔진 미국붉나무

어릴 때부터 가깝게 지낸 붉나무와 나는 정이 너무 들었다. 그래서 붉나무를 보면 어느 계절에도 허투루 지나치지 못한다. 아무 데서나 잡목처럼 자라는 성정 때문인지 붉나무가 제대로 대접을 못 받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그게 못내 서운하다. 우리 붉나무는 모른 채 수입한 비싼 미국붉나무를 정원이나 공원에 심어 기르는 장면을 목격할 때는 더욱 그렇다.

우리 붉나무가 얼마나 멋진 나무인지를 다시 나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정원에 심어 가꾸는 나무에 그러하듯이 좀더 정성껏, 다정하게 붉나무를 대해도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자연이라는 정원에서 지금 붉나무는 천연하게 그러나 매우 찬란하게 꽃을 피우고 있다. 열매라는 거룩한 단계로 나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잎을 붉게 칠하고 가을을 데려올 것이다.

허태임 식물분류학자·<나의 초록목록> 저자

*연재 소개: 식물학자가 산과 들에서 식물을 통해 보고 듣고 받아 적은 익숙하지만 정작 제대로 몰랐던 우리 식물 이야기. 4주마다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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