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회담과 광복절 기미가요
정세라 여론미디어부장
기미가요로 시작해, 임시정부 정통성을 흔드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 찬양 다큐로 끝났다. 중간에 뒤집힌 태극기를 끼워 넣은 건 살짝 쳐둔 양념 같은 것. 한국방송(KBS)이 광복절 하루 동안 벌인 일이다.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은 죄가 없지만, 모든 콘텐츠는 맥락이라는 옷을 입는다. 광복절 0시가 ‘땡’ 치자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오페라가 방영됐다. 기미가요는 일왕의 치세를 찬양하며 수천년 이어지길 기원하는 내용이다. 일제 강점기 황민화 정책의 하나로 이 땅에서 강요됐던 아픈 역사도 있다.
케이비에스는 의지로 관철한 이승만 다큐 방영과 달리 기미가요 오페라 송출은 미처 살피지 못했던 ‘불찰’이라며 파문 진화에 나섰다. 광복절 당일에 올린 사과문은 나흘째 케이비에스 누리집 첫 화면을 장식 중이다. 또 당일 ‘뉴스 9’도 “‘나비부인’에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연주되는 만큼 사전에 적절성 여부를 면밀히 검토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사과했고, 박민 사장도 이튿날 고개를 숙였다. 심상찮은 여론에 부적절한 편성의 과오를 인정하고 납작 엎드린 셈이다.
이제 궁금한 건 케이비에스가 ‘자인한’ 과오에 대한 사후 조치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엔 이미 수많은 민원이 접수돼 있다. 최근 ‘날치기 연임’ 비난 속에 새 방심위를 꾸린 류희림 위원장은 국회에서 “112 범죄 신고와 119 화재 신고처럼 민원 심의를 잠시라도 멈출 수 없어서 시급하게 위원장을 호선했다”고 말했다. 케이비에스가 사장까지 나서서 수차례 사과한 중차대한 문제 관련 민원들이 쏟아졌으니, ‘시급하게’ 심의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상 방심위는 민원이 접수되면 문제의 방송 내용을 심의에 올릴지 말지와 제재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방심위 누리집은 민원 신청 범위와 관련 규정에 대해 상세히 안내하고 있다. 방송 민원 관련 자주 묻는 말(FAQ) 항목을 보면, ‘국민 정서에 위배되는 방송 프로그램 내용’도 민원 범위에 들어간다. 이는 방송심의규정상 25조(윤리성)와 27조(품위유지), 28조(건전성) 등에 저촉되는 사안이다. 특히 25조엔 ‘③방송은 민족의 존엄성과 긍지를 손상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민족 존엄성 조항’이 있다.
앞서 2014년 제이티비시(JTBC) 예능 프로그램인 ‘비정상회담’은 일본인 출연자가 등장할 때 배경음악으로 기미가요를 내보냈다가 민족 존엄성 조항에 저촉돼 법정제재를 받는 첫 사례가 됐다. 당시 ‘방송은 품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시청자의 윤리적 감정이나 정서를 해치는 … 표현을 하여서는 안 된다’는 27조(품위유지) 조항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결국 민족 존엄성 조항을 적용해 법정제재인 ‘경고’를 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사실 비교하자면, ‘비정상회담’보다는 공영방송 케이비에스 사례가 더 엄중할 수밖에 없다. 다른 날도 아닌 광복절 새벽에 공영방송에서 ‘임(일본 ‘천황’)의 시대는 천 대에 팔 천대에 조약돌이 바위가 되어서 이끼가 낄 때까지…’라 찬양하는 기미가요의 선율을 울려 퍼지게 했으니 말이다.
앞서 ‘류희림 방심위’는 정치심의·과잉심의 남발이란 비판을 받으면서도 문화방송(MBC) 등을 상대로 역대급 법정제재들을 쏟아냈다. 방심위 산하 선거방송심의위는 엠비시가 총선 기간 날씨 예보에서 미세먼지 지수를 ‘파란색 1’ 그래픽으로 표현한 걸 두고도 법정제재 최고 수위 바로 아래인 ‘관계자 징계’까지 의결했다. 광복절 기미가요 건은 관련 규정의 존재, 사안의 중대성, 방송사의 과오 자인, 법정제재 전례 등을 종합했을 때 제재를 어느 수위로 조율할지 궁금해진다.
그나저나 광복절 새벽에 기미가요와 기모노로 점철된 콘텐츠를 내보내는 무신경의 뿌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케이비에스 사쪽은 광복절 기미가요 파문을 ‘제작진의 불찰’로 설명하지만, 노조 쪽은 현 경영진의 시스템 실패이자 실무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꼬리 자르기로 바라본다.
이 사태에서 윤 정부의 ‘친일’ 행보와 역사전쟁이란 맥락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운 건 ‘명품 백’을 ‘조그마한 파우치’로 바꿔 부르며 용산에 주파수를 맞추던 박민 사장 체제의 케이비에스를 그간 목격해왔기 때문이다. 마침 이번 광복절은 친일 시비에 휘말린 인사의 독립기념관장 임명으로 치열한 역사전쟁이 벌어지던 국면이 아닌가. ‘공영방송을 친일·극우 방송으로 만들 참이냐’는 언론노조의 외침이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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