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양, 퇴학, 탈영, 안락사? …파란만장했던 알랭 들롱

김은형 기자 2024. 8. 18.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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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남성 배우를 대표하며 '세기의 미남 배우'로 사랑받았던 알랭 들롱이 자택에서 18일(현지 시각) 별세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 등이 유족 발표를 인용해 보도했다.

'태양은 가득히'(1960) '한밤의 암살자'(1967), '시실리안'(1969), '암흑가의 세 사람'(1970) 등에 주연을 맡아 1960년대 프랑스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알랭 들롱은 조각 같은 외모와 서늘한 눈빛, 퇴폐적인 분위기로 범죄를 저지르고 파국을 맞는 주인공을 주로 연기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신드롬과 같은 인기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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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 “밑바닥 연기 때 매력 발산”
‘태양은 가득히’. 한겨레 자료사진

프랑스 남성 배우를 대표하며 ‘세기의 미남 배우’로 사랑받았던 알랭 들롱이 자택에서 18일(현지 시각) 별세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 등이 유족 발표를 인용해 보도했다. 향년 88.

‘태양은 가득히’(1960) ‘한밤의 암살자’(1967), ‘시실리안’(1969), ‘암흑가의 세 사람’(1970) 등에 주연을 맡아 1960년대 프랑스 영화의 전성기를 이끈 알랭 들롱은 조각 같은 외모와 서늘한 눈빛, 퇴폐적인 분위기로 범죄를 저지르고 파국을 맞는 주인공을 주로 연기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신드롬과 같은 인기를 누렸다.

알랭 들롱. 한겨레 자료사진

1935년 파리 교외에서 태어난 알랭 들롱은 4살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입양 보내졌다가 양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생모에게 돌아와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보수적인 가톨릭 기숙학교에서 6번이나 퇴학을 당하는 등 반항적인 10대를 보내며 성장했다. 열네살의 나이에 학업을 포기하고 푸줏간에서 일하다가 해군에 자원입대 해 인도차이나 전쟁에 파병되기도 했다. 군대에서도 부대 차를 훔쳐 탈영해 11개월간 감옥에 갇히는 등 문제를 일으키다가 1956년 불명예 제대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이후 술집 웨이터와 세일즈맨 등을 전전하던 그는 젊은 배우들과 어울리면서 칸국제영화제에 놀러 갔다가 그곳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제작한 미국의 영화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 눈에 띄며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셀즈닉과 함께 할리우드 진출을 준비하던 그는 이브 알레그레 감독을 만나면서 ‘여자가 다가올 때’로 1957년 프랑스에서 데뷔했고 이후에도 주로 프랑스 영화에 출연하며 이력을 쌓아나갔다.

세 번째 출연작인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1960)는 알랭 들롱을 세계적인 스타 반열에 올린 작품이다. 부잣집 친구를 죽인 뒤 그의 행세를 하는 톰 리플리역을 통해 그는 부드러운 얼굴 속에 소시오패스적 욕망을 숨긴 이중적인 모습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아름다운 외모 속에 비열한 욕망이나 잔인한 본성을 숨긴 이중적인 이미지는 이후 출연작들에서 계속 변주되면서 알랭 들롱의 꼬리표처럼 새겨졌다.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에세이 ‘남자들에게’에서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며 “알랭 들롱은 미남이다.(…)그러나 그 미는 하층계급 남자의 것이다. 그런 만큼 밑바닥 인생을 연기할 때 그의 매력이 살아난다”고 썼다.

알랭 들롱이 2019년 5월 칸영화제 명예 황금종려상 수상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후 알랭 들롱은 ‘한밤의 암살자’, ‘시실리안’, ‘암흑가의 세 사람’ 등 장 피에르 멜빌, 앙리 베르누이 등이 연출한 프랑스 범죄 누아르 영화에 출연하면서 이 장르 영화의 번성기를 이끌었다. 1960년대 초 그가 출연한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예술영화 ‘로코와 그의 형제들’(1960), ‘레오파드’(1963)가 각각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으며 이탈리아 영화계에서도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거장 감독들과 걸작 영화를 다수 찍었지만 그 자신은 중년이 될 때까지 주요한 연기상을 받지는 못해 지나치게 뛰어난 외모 때문에 연기력이 저평가된 배우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1980년대에 직접 영화 연출에 나서기도 했지만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1990년 프랑스 정부는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했고, 2019년 칸영화제는 공로상에 해당하는 명예 황금종려상을 시상했다.

2019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을 해오며 2022년 건강이 더 악화하면 안락사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안락사 논쟁을 불 지피기도 했다. 알랭 들롱은 1999년 스위스에 이민을 갔는데 스위스는 프랑스와 달리 안락사가 허용되는 국가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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