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해 위에 지어진 ‘완벽한 집’···서도호의 거대하고 치밀한 상상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상상
드로잉, 모형, 시뮬레이션 영상으로 시각화
한옥이 날아와 런던 건물 사이에 처박히고
기념비 떠받치는 300명이 움직이는 조각도
“서도호의 머리 속을 들여다보는 전시”
천으로 만들어진 섬세하고 아름다운 한옥집을 기대했다면 조금 당황할지도 모른다. 서도호의 개인전 ‘스페큘레이션스’가 열리는 서울 종로구 아트선재센터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뒤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밝은 주황색 구명복이다. 콘센트까지 섬세하게 천으로 재현한 집과 투박한 구명복은 닮은 구석이 없어 보이지만 서도호에겐 하나로 연결돼 있다.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뻗어 나온 무한한 상상과 사유의 가지 중 하나다.
서울에서 미국 뉴욕으로, 영국 런던으로 삶의 기반을 옮겨온 서도호는 이주의 경험을 통해 집과 공간이 개인과 맺는 관계에 대해 천착한 작품을 선보여 왔다. 천으로 만든 집이 차곡차곡 접어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는 ‘이동하는 집’이란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면, 구명복은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작은 대피소’라는 상상에서 출발했다.
“천으로 만든 집은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제 머릿속에 꽉 차 있는 것들을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지난 16일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서도호가 말했다.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서도호는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가다. 내년 5월 영국 테이트모던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있으며, 미국 LA카운티미술관,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등 해외 유명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국내에선 2012년 리움미술관 전시 이후 12년 만에 선보이는 대규모 개인전이다.
이번 전시에 서도호의 대표작인 천으로 만든 집은 없지만, 그 자리를 거대한 상상이 메운다. 전시명 ‘스페큘레이션스(speculations)’는 사변·추론·사색을 의미한다. “‘만약에’라고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펼쳐지는 작업 과정을 ‘스페큘레이션스’라고 표현했습니다. 천으로 만든 집도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다른 장소로 옮길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죠. ‘만약에’를 통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작품들을 구상할 수 있어요.”
서도호에게 ‘만약에’는 현실의 물리적 제약을 벗어날 수 있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다. ‘만약에’를 통해 불가능해 보였던 아이디어가 현실이 됐다. 이번 전시에선 서도호가 ‘만약에’의 사유를 펼쳐가는 과정을 드로잉, 축소된 모형, 영상 등을 통해 선보인다.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예술감독은 “서도호의 브레인을 다운로드한 듯한 전시”라고 말한다.
1층에 선보이고 있는 ‘다리 프로젝트’는 “완벽한 집은 어디에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서도호가 살았던 서울, 뉴욕, 런던의 집을 등거리로 잇는 지점에 ‘완벽한 집’을 짓는 상상을 한다. 북극해에 집을 짓기 위해서 세 도시를 연결하는 다리를 만들고, 극지의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완벽한 집 S.O.S’(Smallest Ocuupation Shelter)가 태양열 패널과 구조요청 신호기, 부력을 갖춘 구명복 형태로 코오롱 스포츠와의 협업을 통해 ‘현실화’된 아이디어라면, 애니메이션 ‘다리 프로젝트’에는 즐겨 찾던 식당과 같은 장소를 대관람차 형태로 가져오는 기발한 상상도 등장한다. 1층 전시장엔 서도호가 건축가, 생물학자, 물리학자 등과 협력해 아이디어를 발전하며 그려온 드로잉도 함께 전시돼 있다.
2층에선 집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건물에 불시착하고, 다리 위에 박히고, 트럭 위에 실려 이동하는 서도호의 유명 작품들을 축소한 모델과 만들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영상, 드로잉 등을 선보인다. 2010년 리버풀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다리를 놓는 집’(Bridge Home)은 리버풀의 두 건물 사이의 좁은 틈에 전통 한옥이 끼인 모습을 설치해 화제를 불러 모았다. 이번 전시에선 3D 모형으로 축소한 버전을 선보인다.
‘한 문화의 건축물이 날아가 다른 문화의 건축물에 박힌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별똥별’ 연작 가운데 2012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에서 실제로 구현한 작품의 모형도 볼 수 있다. 작은 오두막이 7층 건물 옥상에 모서리에 비스듬히 ‘착륙’한 듯한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제작 영상에서 이 프로젝트를 처음 접한 전문가들은 말도 안 된다며 혀를 내두른다. 서도호의 ‘불가능한 아이디어’는 공학자 등 전문가들의 도전욕과 창의력을 자극해 결국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낸다.
서도호의 또 다른 대표작 ‘공인들’(1988)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워싱턴 D.C. 국립아시아미술관 정원에 설치된 ‘공인들’은 영웅을 기념비 아래로 끌어내린 뒤 좌대를 떠받치는 300명의 대중들에 초점을 맞춘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선 ‘공인들’을 6분의 1로 축소해 서도호가 당초 상상했던 ‘움직이는 조각’(키네틱아트)로 구현했다.
아버지이자 한국 수묵추상의 거장 서세옥 화백이 지은 서울 성북동 한옥은 서도호에게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곳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한 서도호는 집이 개인의 정체성에서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 깊이 탐구하기 시작한다. 서도호에게 집은 “작은 우주이자 정체성을 만드는 공간” “가는 곳마다 가지고 가고 싶은 것”이다.
“아주 어릴 때 살던 집은 재개발되어 허물어진 집도 있지만 성북동 한옥은 아직 남아 있고, 지금도 한국에 오면 그곳에서 지내요. 런던에서 산다고 서울 집이 내 집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어요. 서울집, 뉴욕집, 런던집이 평행하게 같이 가는 거예요. ‘다리 프로젝트’가 그런 생각에서 나온 거죠.”
21세기에 이주의 경험은 보편적이다. 서도호의 작품이 개인의 서사에서 출발하지만, 국적을 불문하고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이유다. 그는 “영국에서 서울의 한옥 집을 천으로 만든 전시를 했는데, 한옥은 영국 사람들에겐 너무 낯선 건축 구조물이다. 그런데 작품 앞에서 우는 관객들이 있었다”며 “많은 이들이 집을 떠나 살기에 지역성을 떠나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개인적 서사에서 발전한 상상과 이야기들이 시대적 문제와 감응하기도 한다. 이번에 처음 선보이는 ‘향수병’은 바닷가에 불시착한 한옥을 물이 채워진 유리케이스 안에 3D 모델로 구현했다. 모래해변에 폐허처럼 부서진 한옥이 처박혀 있고, 물 위로 부서진 집의 파편과 쓰레기가 부유한다. 해변에 난파한 집의 이미지는 난민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북극해에 ‘완벽한 집’을 짓기 위한 프로젝트도 이를 현실화할 방법을 고민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북극의 기후, 지속가능성 등 문제와 부딪힐 수밖에 없으며, 이런 고민이 작품 속에 녹아있다.
서도호와 아트선재센터의 인연은 깊고 오래됐다. 2003년 첫 개인전을 아트선재센터에서 연 이후 21년 만에 다시 아트선재센터를 찾은 것은 김선정 예술감독과의 인연과 우정 때문이다. 서도호는 “작가가 생전에 한 미술관에서 두 번 전시를 하는 기회는 흔치 않다. 2003년 첫 개인전을 김 감독과 함께하고 21년의 시간이 지났는데 한 사람은 큐레이터로, 저는 작가로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료로서 길을 걸어온 우정에 큰 의미를 둔 전시”라고 말했다. 전시는 11월3일까지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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