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운의 사색(史色)] "악취 진동하고, 감시 살벌해도" 노벨상 카뮈가 저격한 상대는…
◆ 매경 포커스 ◆
"엄마가 오늘 죽었다.
아니 어제였던가. 잘 모르겠다."
본인을 낳아준 모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에도
그의 표정은 심드렁합니다.
무미건조하게 회사에 모친상을 알리고
휴가를 씁니다. 고향으로 가는 버스에서도
그의 얼굴에선 어떤 슬픔의 편린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멀고 먼 친척의 상갓집에
할 수 없이 가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소설 '이방인' 주인공 뫼르소는
좀처럼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알제리-프랑스인(알제리-프랑세스·
식민지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 사람들)인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여인과 사랑을 할 때조차도 좀체
기분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다 이글거리는 태양의 강렬함에 취해 한 아랍인을 총으로 살해합니다. 사형을 언도받을 때조차 그는 반성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이방인'은 '부조리주의(absurdism)'의 대표작으로 통합니다.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하고 불확실성에 의해 움직인다는 통찰. 그 속에서 목적을 찾아나선 합리적인 인간은 좌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세계의 작동 질서인 혼돈에 몸을 맡긴 뫼르소는 어쩌면 '진리'를 깨달은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게 카뮈의 생각이었습니다. 부조리한 인물을 통해 세계의 작동 방식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구현한 것이지요.
이 작품을 썼을 때 알베르 카뮈의 나이는 고작 스물아홉. 30대가 되기 전에 그는 이 작품으로 세계적 대문호의 자리에 오릅니다.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은 한 번씩 이런 상상을 해봤을 것입니다. 뫼르소는 카뮈의 자화상일 것이라고. 그도 뫼르소만큼이나 부조리함으로 가득한 인물일 것이라고.
소설은 작가의 작품 세계를 투영하겠지만, 카뮈는 뫼르소와는 결이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신의 에너지를 뿜어내는 '태양'과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도 절절했지요. 뫼르소와의 공통점은 알제리-프랑세스라는 사실뿐입니다. 그만큼 카뮈는 정열이 가득한 위인이었지요.
어머니를 사랑한 청년 카뮈
"엄마, 지금처럼 엄마가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어요."
1957년 10월17일 오전 스웨덴 한림원은 알베르 카뮈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합니다. '이방인'을 발표한 지 15년 만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44세, 역대 노벨상 수상자 중 두 번째로 어린 나이였습니다. 카뮈는 그날 알제리 빈민가인 벨쿠르로 전보를 하나 쳤습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어머니 카트린에게 향하는 편지였습니다. 뫼르소와 달리 그는 어머니를 끔찍이 아꼈습니다. 가난하고 비루한 삶 속에서도 카뮈를 응원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카뮈의 가족은 알제리에 거주하는 프랑스인이었습니다. 제국주의가 본격화한 프랑스는 1830년부터 알제리를 지배하고 있었지요. 그때 많은 프랑스인들이 새로운 삶을 꿈꾸며 알제리로 넘어왔습니다. 카뮈의 조부도 이때 알제리로 넘어온 사람이었지요. 어머니 카트린과 카뮈는 모두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 알제리-프랑세스였습니다.
'알제리 드림'이 모두 실현된 건 아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부호의 꿈을 품고 넘어왔지만, 북아프리카의 삶은 억척스럽기만 했습니다. 프랑스 본국에서만큼이나 가난하고 비루한 삶의 연속이었지요. 프랑스 본토인들은 알제리-프랑세스를 '검은 발'이란 의미의 '피에누아르'라고 부르며 경멸했습니다. 카뮈의 집안이 바로 '피에누아르'였지요.
카뮈가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사망합니다. 어머니 카트린은 장애를 앓고 있으면서도 남의 집 허드렛일을 맡아가며 아들을 사랑으로 키웠지요. 청각장애로 말을 못했지만 그녀는 늘 아이에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아이가 가장 필요로 하던 것이었지요. 그의 집은 빈민가에 있었지만, 사랑만큼은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빼어난 글솜씨를 뽐내다
알제리의 뜨거운 태양빛과 어머니의 사랑은 카뮈의 글솜씨를 영글게 만들었습니다. 초등학생인 그는 또래보다 뛰어난 문장력으로 학교 선생님들을 놀라게 했었지요. 장성한 뒤에도 '글쟁이'가 된 데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가난한 사람에게 그는 연민을 느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그의 작품은 언제나 고통받는 약자를 대변합니다. 사회에 첫발을 '언론'에 디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프랑스로부터 억압을 받는 알제리인의 이야기를 쓰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는 프랑스인이지만, 그의 고향은 알제리였습니다. 어머니와 가족들이 살아가는 곳. 그래서 마음이 저리는 곳.
'알제-레퓌블리켕'의 청년 기자 카뮈는 카빌리라는 지역에서 빈곤하게 살아가는 알제리인을 취재합니다. '카빌리의 비참'이었습니다. 프랑스 정부의 억압적 식민 정책을 정면으로 고발한 작품이었지요. 감성적인 문체를 씨실로, 촌철살인의 언어를 날실로 삼아 만든 위대한 르포. 그가 직조한 기사 속에서는 카빌리 지역의 고난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가난한 알제리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모습을 투영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식민지 알제리에서 프랑스 본국으로
"저 신문을 폐간시켜라."
카뮈의 펜촉은 프랑스의 식민 정부를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총독 정부가 카뮈가 일하고 있는 알제-레퓌블리켕을 압박하기 시작했지요. 카뮈는 결국 사랑하는 '조국' 알제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의 언론사 '파리 수아르'에서 편집기자 일자리를 얻게 되었지요. 100만부에 달하는 부수를 자랑하는 유력지였지만, 그는 그곳에서 단 한 글자도 쓰지 않았습니다. 권력과의 유착 관계가 의심되는 언론사였기 때문입니다.
정의에 대한 관점이 남달랐던 카뮈는 일갈합니다. "글에 자부심이 있는 글쟁이라면, 아무 데나 글을 써선 안 된다."
그렇다고 그가 완전히 펜을 꺾은 건 아니었습니다. 기사 대신에 그는 문학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시지프 신화' '이방인' '오해'가 이때 잉태된 작품이지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대혼돈이 어쩌면 그의 작품에 투영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의'라는 개념이 멸종위기에 처한 시대,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개인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조리한 뫼르소는 야만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일지도 모르겠지요.
카뮈는 그렇다고 소설 속 부조리한 개인처럼 삶을 포기하며 살지 않았습니다. 나치 독일과 전쟁을 벌이는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물밑 지원하는 기관지 '컴뱃'에서도 기자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모든 '이념'에 비판적이었던 카뮈
"공산주의는 정답이 될 수 없다."
해방 이후 카뮈는 동료 지식인들과 대립합니다. '소련'에 대한 비판 때문이었습니다. 카뮈는 사회주의자였지만,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는 해방구가 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를 비롯한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비판에 매몰돼 공산주의를 낙관한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었지요. 후에 소련이 헝가리 부다페스트 시민을 학살하자 "유엔이 개입해 사태를 해결하라"고 주문한 것도 카뮈였습니다. 좌파 지식인들이 모두 침묵했을 때였습니다. 카뮈는 날카로움을 잃지 않는 지성이었습니다.
1954년 카뮈는 기로에서 자주 방황합니다. 자신의 조국 '알제리'에서 독립전쟁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민족해방전선(FLN)은 더 이상 프랑스의 압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베트남에서 호찌민이 이끄는 베트남 독립동맹군이 프랑스로부터 독립에 성공한 것도 영향을 줬습니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25만명이 사망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었습니다.
카뮈는 어느 한편을 지지하지 못했습니다. 알제리의 '완전한 독립'은 자신과 같은 알제리-프랑세스의 추방을 의미했습니다. 아무리 알제리를 사랑했더라도 그는 '압제자' 프랑스의 시민일 뿐이었습니다.
렉스프레스지 논설위원 자리에 선 카뮈. 그는 끊임없이 사설을 통해 평화를 외쳤습니다. 그저 글로써만이 아니라 양측을 휴전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지요. 마침내 1956년 1월 22일 프랑스 정부와 알제리 FLN의 첫 대화가 열렸습니다. 카뮈가 모색한 제3의 길이었습니다. '이방인' 속 차갑디 차가운 뫼르소와는 달리 카뮈의 삶은 용광로처럼 달아올라 있던 셈입니다. 스웨덴 한림원이 이례적으로 젊은 작가 카뮈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에도 이 같은 '진정한 윤리의 참여정신'이 작용했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러나 카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충돌은 계속됩니다.
1960년 1월 4일 프랑스 중북부의 작은 마을 '빌블르뱅'. 이곳에서 큰 자동차 사고가 일어납니다. 조수석에 타고 있던 사람이 즉사하는 대형 사고였습니다. 그 사람은 '알베르 카뮈'였습니다. 그의 나이 고작 46세. 사랑하는 어머니를 두고 먼저 떠난 것이었습니다. 같은 해 8월 그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알제리 빈민가 벨쿠르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아들을 대문호로 키웠던 그 자리, 그곳에서였습니다. 카뮈와 어머니 카트린이 사랑한 알제리는 그들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인 1962년 3월 완전한 독립을 쟁취합니다.
'작가' 카뮈는 문학사에 영감을 남겼다면, '인간' 카뮈는 행동하는 지성이 무엇인지를 제시했습니다. 그가 노벨상을 수상한 후 스웨덴 웁살라대에서 강연한 내용을 옮겨 적습니다.
"예술가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시대의 범선'을 타고 있습니다. 이 범선에 악취가 풍긴다 해도, 감시원들이 지나치게 많다고 해도, 예술가는 자기 몫의 노를 저어야 합니다."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며, 교조주의에 빠져들지 않았던 알베르 카뮈. 그가 오늘날 세상을 봤다면, 무엇이라 했을지. 그의 촌철살인의 언어와 감성적인 문체가 절실한 요즘입니다. 너무나 많은 폭력이 아직도 만연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경도된 이념에 저항하는 지성이 너무나 부족한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 알롱달롱한 이야기를 생각하는 사색(史色)입니다. 소란한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역사의 숲으로 독자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재미 혹은 의미, 두 미(美) 중 하나는 반드시 챙기겠습니다.
[강영운 기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잔치는 제가 초대해야죠”...올림픽 3관광 김우진, 고향서 ‘한턱’ 쐈다 - 매일경제
- “새벽 5시부터 줄 서” 성심당에 또 열광했다…이번엔 뭔가 했더니 - 매일경제
- “다른 곳은 최소 4억인데” 종로에 있는 실버타운, 보증금 3천만원…알고보니 이 회사가 운영 -
- 증시 붕괴에 놀란 개미들, 이번주 또 밤잠 못잔다…美연준 잭슨홀 미팅에 쏠린 눈 - 매일경제
- “집에서 노는 의대생 아들 어쩌죠”…개강 코앞인데 꿈쩍않는다는데 - 매일경제
- “지하도 아닌데 차량 200대 이상 불에 탔다”…전기차 화재로 난리난 포르투갈 - 매일경제
- “열차 화장실 안까지 승객으로 가득 차”…KTX 궤도이탈에 대혼란 - 매일경제
- 카라 한승연, 빌딩 시세차익 200억...‘부동산 퀸’답네 - 매일경제
- “인생샷 포기 못해”…달리는 열차 매달렸다가 머리 ‘쾅’ - 매일경제
-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선수단 해단식 취소 일파만파 [이종세의 스포츠 코너]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