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의 그라운드] 22세 안세영이 쏘아 올린 5g 셔틀콕 돌직구

김종석 2024. 8. 18.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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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28년 만에 한국 선수로 우승한 안세영. 대한배드민턴협회 제공

배드민턴에 사용하는 셔틀콕은 16개의 깃털로 된 5g 남짓의 무게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시속 300km가 넘는 순간 속도를 기록하기도 합니다. 자칫 그대로 얼굴에 맞았을 경우 크게 다칠 수도 있습니다. 기네스북에 따르면 셔틀콕 최고 순간 속도 기록은 인도의 배드민턴 선수 란키레드가 갖고 있습니다. 그는 2023년 4월 14일 일본 사이타마현 소카에 있는 요넥스 도쿄공장 체육관에서 무려 시속 565km를 찍었습니다.

불현듯 스피드 얘기를 꺼낸 이유는 2024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여자 단식 금메달리스트 안세영(22·삼성생명)이 날린 ‘스매싱’이 한국 스포츠를 뒤흔들고 있어서입니다.

올림픽 결승 경기를 짜릿한 승리로 마친 뒤 날린 작심 발언의 파장이 거대한 쓰나미처럼 배드민턴 코트를 넘어 한국 스포츠 전반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 대한체육회, 대한배드민턴협회가 일제히 진상 조사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안세영 자신도 침묵을 깨고 SNS에 글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안세영의 발언과 주장 내용은 이미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고교 시절 16세 어린 나이로 성인 국가대표에 뽑힌 뒤 7년 동안 온갖 고생 끝에 세계 정상의 자리에 오르도록 숱한 수모와 고생을 겪었다는 겁니다. 부상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선배들 빨래에 스트링 교체도 대신 해줘야 했다는 애환도 흘러나왔습니다. 개인 스폰서를 허용하지 않아 거액의 부를 축적할 기회를 잡지 못한 데 따른 아쉬움도 드러냈습니다. 그러면서 개인 자격으로 국제대회에 나가게 해달라는 주장도 했죠.


<사진> 안세영의 역동적인 플레이. 대한배드민턴협회 제공

안세영이 주목을 받으면서 어제까지 정치 평론을 하던 분도 방송에 나와 스포츠 전문가처럼 이런저런 분석을 내놓더군요. 어떤 매체는 안세영을 대표팀 ‘하녀’에 비유하는 자극적인 제목을 달기도 했습니다. 사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건 삼척동자도 잘 알 겁니다. 

안세영의 고민은 배드민턴 선수뿐 아니라 한국에서 스포츠로 세계 톱레벨에 올라간 선수라면 누구나 한 번 이상 심각하게 해봤을 겁니다. 그만큼 한국 스포츠는 일부 특정 선수의 희생 아닌 희생을 통해 성장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필자는 8년 전인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 끝난 뒤 ‘배드민턴 국가대표 용품의 불편한 진실’이라는 기사를 출고한 적이 있습니다. 잠시 그 내용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의류 라켓 등 일괄 사용 조건 후원금…주니어 육성-국제대회 경비로 사용’ ‘일본에선 경기력 등 감안 선수 개별 계약, 내년 2월 새로운 계약…귀추 주목’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기사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사상 처음으로 일본 배드민턴 금메달의 주인공이 된 마쓰토모 미사키는 미국 업체 윌슨의 라켓을 쓰고 있다. 일본배드민턴협회의 공식 후원사는 일본 요넥스지만 라켓과 운동화에 대해서는 협회가 선수들의 개별 계약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대표팀 박주봉 감독은 ‘선수들의 경기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용품은 개별 선택을 할 수 있게 했다. 선수들은 용품 계약으로 수입도 올릴 수 있다’라고 말했다”라고 흘러갑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마쓰토모가 만약 한국 대표팀 선수였다면 이런 선택은 할 수 없다. 대한배드민턴협회는 의류, 라켓, 신발 등 모든 용품을 특정 업체의 제품만 쓰도록 계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배드민턴협회는 1980년대 초반부터 줄곧 요넥스와 후원 계약을 맺어 오다 8년 전부터 대만 업체 빅터와 스폰서 계약을 했다. 용품 계약을 통해 대한배드민턴협회는 100억 원이 넘는 적립금을 쌓아 재정 자립도를 높였다”라고.

한국 배드민턴 국가대표 선수들이 개인 스폰서를 불허하는 데 따른 고충을 지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이용대 등 톱스타들은 용품업체와 개별 계약 허용, 국제대회 개인 자격 출전 등 이번에 안세영과 비슷한 주장을 내놓았습니다. 결과적으로는 8년 전 뭔가 전향적인 조치가 취해졌더라면 안세영은 ‘분노’ 대신 올림픽 금메달의 ‘희열’과 함께 달콤한 뒤풀이를 즐겼을지도 모릅니다.


<사진> 경기력에 민감한 라켓과 신발의 개인 후원을 허용하고 있는 일본 배드민턴 대표팀. 일본배드민턴협회 홈페이지

문체부 고위 관리는 “안세영 선수가 결승 직후 격정을 토로하는 모습을 보면서 느낀 게 많았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 순간 그런 얘기를 꺼냈을까. 아마 결승 전날에도 경기뿐 아니라 본인의 발언 내용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되뇌었을 것 같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이 관리는 “요즘 사회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안세영 선수 또래의 MZ세대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차원에서라도 개선할 부분이 많아 보인다”라고 지적하더군요.

대한배드민턴협회는 일부 선수의 개별 후원을 허용하면 스폰서업체의 후원 규모가 크게 줄어 선수 육성이나 국제대회 출전 비용 등을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다고 항변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과거에도 협회 관계자는 “특정 선수를 위해 용품 계약을 풀어 줄 때 스폰서 금액이 60∼70%까지 줄어들게 된다. 어려운 국내 현실을 참작할 때 (용품 계약을 풀어 주는 건) 쉽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고충은 프로스포츠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한때 프로야구단도 용품업체와 일괄 계약을 한 적이 있습니다. 톱스타가 별도 계약을 하면 후원 규모가 크게 줄어들 수 있어서죠. 

하지만 요즘은 경기력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배팅 글러브, 스파이크 등은 용품 후원에서 빠지고 의류 후원에 치중하는 게 대세입니다. 프로스펙스와 계약한 프로야구 LG 관계자는 “만약 언더셔츠처럼 단체 계약 리스트에 들어가는 품목을 다른 브랜드로 착용할 때 블랙아웃(브랜드 노출을 못하게 로고 등을 검게 칠하는 행위)을 해야 한다”라고 설명하더군요. 


<사진> 프로야구 LG의 간판스타 김현수. LG트윈스 홈페이지

이번 파리올림픽 배드민턴 혼합복식에서 동메달을 딴 일본의 와타나베 유타는 중국 브랜드 리닝의 라켓과 신발을 신고 뛰었습니다. 일본 배드민턴 대표팀의 공식 후원사는 요넥스였는데도. 말레이시아 배드민턴 대표팀 역시 요넥스의 후원을 받고 있는데 일부 개별 선수의 별도 스폰서 계약을 둘러싼 논란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스포츠 마케팅 관련 박사 출신의 전 프로야구 구단 사장은 이런 글을 SNS에 남겼습니다. ‘팀 후원은 스타 선수가 있기에 가능하거나 혹은 최소한 수월해진다. 즉 스타 선수가 없다면 팀 후원은 성사되기 쉽지 않다.’ 스타 선수의 개인 후원이 팀 후원 때문에 제약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선 ‘(팀 후원 때문에) 팀의 재정을 확보해야 좋은 선수 영입도 하고, 인프라나 저변 확대에 투자도 하고, 저연봉 선수를 보호하고 혜택을 배분하며 육성할 수 있다. 더군다나 비인기 종목이나 작은 규모의 단체로서는 더욱더 간절해진다.’라고 하더군요. 

그는 또 안세영 같은 선수의 희생에 대해선 ‘후배들 혹은 종목의 저변 확대 등을 위해 그리고 자신이 성장해 온 과정에서의 혜택을 환원하는 개념도 일부 참작할 수밖에 없다’라면서도 ‘독보적인 선수의 경우 팀 후원 계약 때 별도 광고모델 등 추가 옵션 계약으로 별도 지원하는 방안’을 해법으로 제시했습니다. 

이 프로야구단 역시 의류 스폰서를 교체할 당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이미 개인 후원을 받고 있는 고참 선수들이 흔쾌히 팀과 어린 선수들을 위해 다른 의류 후원을 양보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늘어난 스폰서십 수입 덕분에 추가 선수 영입, 시설 투자 및 팬 서비스 확대가 가능했으며 이렇게 늘어난 팬덤은 다시 스타 선수에게 환호하는 선순환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대한배드민턴협회 역시 한국 배드민턴 역사에서 몇십 년 만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안세영의 존재감을 인정하고 다양한 보상책을 미리 제시했으면 어땠을까요. 

삼성물산과 삼성증권에서 테니스부 감독으로 이형택 조윤정 정현 등을 발굴해 세계적인 수준의 선수로 키웠던 주원홍 대한장애인테니스협회 회장은 스폰서십 관리에도 선각자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당시 삼성 소속 선수들은 삼성 계열의 의류를 의무적으로 입게 돼 있었지만, 제품의 품질과 너무 떨어진다는 지적이 많아지자, 감독이었던 주 회장은 글로벌 브랜드와 별도 계약을 맺어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까지 이끌었습니다. 또 개별 스폰서 계약을 원하는 선수에게는 가령 세계 랭킹 100위 이내 진입 또는 50위 이내 진입 등의 과제를 제시한 뒤 이를 달성하면 허용해 줘 동기부여를 주기도 했습니다.

안세영 사태 이후 침묵으로 일관한다는 비난을 사고 있는 소속팀 삼성생명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라는 지적입니다. 


<사진> 삼성증권 테니스부 시절 이형택과 주원홍 감독. 테니스 코리아 자료사진

대한배드민턴협회는 1970년대 직원 한 명에 1년 예산은 200만 원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협회의 한 임원은 고향인 경기 이천의 정미소를 팔아가며 협회 살림에 보태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들어 협회는 비로소 요넥스와 8만 달러 후원계약을 맺으며 배드민턴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2009년에는 대만 브랜드 빅터와 4년 동안 220만 달러의 파격적인 조건으로 계약하기도 했습니다.

한국 배드민턴의 고공비행은 물론 대표팀 단체 후원 계약과 합숙 훈련 위주의 강도 높은 트레이닝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젠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선배들의 충고는 꼰대의 대명사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한국에서 국가대표를 오래 한 선수들에게 흔히 듣는 말이 있습니다. “태극마크를 달고 대표팀으로 오래 뛰고 싶은데 선수촌 생활은 하고 싶지 않아요.”

안세영 역시 비슷한 심정일 겁니다. 7년 전 안세영이 처음 국가대표가 됐을 때 한국 배드민턴의 전설로 현재 안세영의 소속팀 삼성생명 감독인 길영아는 필자에게 이런 조언을 대신 전달했습니다. “대표팀에서는 새벽부터 진행되는 강도 높은 훈련이 버거울 수 있어요. 잔심부름 등 막내로서 해야 할 일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성격이라 잘 이겨내며 즐길 것 같아요.”

길영아 감독 역시 10년 넘게 대표 선수로 활약하며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배드민턴 혼합복식에서 김동문 현 원광대 교수와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누구보다 대표 선수의 마음고생을 잘 알기에 오히려 이번 안세영 사태에 대해선 안타까움만 표시할 뿐 다른 언급을 자제하고 있더군요. 게다가 파리올림픽에서는 아들인 김원호가 혼합복식 은메달을 차지해 사상 첫 모자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됐지만 대놓고 기뻐하지 못할 처지가 됐습니다.

안세영은 자신의 심경을 담은 글에서 “제가 궁극적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불합리하지만 관습적으로 해오던 것들을 조금 더 유연하게 바뀌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에 대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공방전이 아닌 제가 겪은 일에 대한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있기를 내심 기대한다”라는 소망을 밝혔습니다. 체육회와 문체부에서 진상을 파악할 것이란 소식에 대해선 ”누군가가 관심을 두고 점차 규정과 시스템을 바뀌며 변화해 나간다면 저뿐만 아니라 미래의 선수들도 조금 더 운동에 집중하고 케어받는 환경에서 운동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하더군요.

안세영의 말대로 수십 년간 불합리하고 관습적으로 해오던 것들이 하루아침에 전부 달라지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안세영과 그 주변 인사들도 이런 점만큼은 이해했으면 좋겠네요.

협회는 개인 스폰서를 인정해 주는 한편 다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야 하지 않을까요. 문체부도 소중한 세금이 헛되게 새어나가는 일이 없이 적재적소에 흘러 들어갈 수 있도록 눈을 부릅떠야 할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신입직원이라고 커피 심부름이나 택배 픽업 등을 시키는 간 큰 선배가 있을까요. 위계질서가 아무리 강한 운동부라도 ‘막내=주전자 당번’이라는 등식도 변해야 할 때가 됐습니다. 


 <사진> 주니어 시절 안세영의 모습. 김종석 제공

아쉽게도 안세영은 올림픽 이후 큰 대회인 재팬 오픈과 코리아오픈에 부상을 이유로 불참 선언을 했습니다. 특히 목포에서 열리는 코리아오픈은 모처럼 홈팬 앞에서 특유의 허슬 플레이를 보여줄 절호의 무대로 팬들의 기대 또한 컸을 텐데 안타깝게 됐습니다. 

안세영은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에 출연해 셔틀콕으로 송판을 쪼개는 장면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번에도 라켓을 뽑았으니 어떤 변화라도 일으키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소통이 그 첫 번째 단추입니다. 

무엇보다 몸과 마음이 모두 단단해진 안세영의 컴백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김종석 채널에이 부국장(전 동아일보 스포츠부장)

글= 김종석 기자(tennis@tenni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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