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에서 미소년 스캔들?…현실은 7080 경로당이었다는데 [서울지리지]

배한철 기자(hcbae@mk.co.kr) 2024. 8. 18.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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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500년 왕조를 지탱한 이념의 산실
유생들(1904년). 조선시대 사대부는 과거급제가 인생의 최대 과업이었고 이를 위해 반드시 성균관에 입학해야만 했다. [미국 헌팅턴 도서관(잭 런던 촬영)]
“성균관 옆에서 병들어 누우니, 엄동설한에 궁핍하기까지 하구나. 천리 밖 부모님 생각 간절하고, 미천한 한 몸 대궐만 그리웁네(病卧賢館側, 窮冬白雪飛. 懷親千里隔, 戀闕一身微).”

김수인(1563~1626)의 <구봉집(九峯集)> 중 ‘病卧泮中(병와반중·성균관 공부중 병들어 누워)’의 한 대목이다. 경상도 밀양의 선비 김수인은 1608년(광해군 즉위년) 46세에 과거합격 하나만을 바라보고 성균관에 입교했다. 늦은 나이에 객지생활은 고달팠고 중병까지 걸리자 향수병이 심해졌다.

김수인은 장의(掌議·학생대표)로 있으면서 광해군(재위 1608~1623)에게 인목대비 폐모의 부당함을 간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했다. 인조반정 직후 다시 성균관으로 돌아왔지만 결국 과거급제의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죽었다.

홍직필(1776~1852)의 <매산집(梅山集)>에 실린 ‘김수인 행장(行狀)’은 “성균관에 있는 4년 간 명망이 성대하여 상께서 한창 등용하고자 하였는데 공이 갑자기 별세하였으니…”라고 했다.

TV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성균관(成均館) 유생은 ‘젊은 미소년’과 ‘한양 명문가 자제’ 이미지가 쉽게 떠올려지지만, 김수인 예에서처럼 학생 상당수가 지방출신이었고 노인들도 허다했다. 심지어 재학중 학생이 노환으로 사망하는 일도 빈번했다.

젊은 양반(1904년). [미국 헌팅턴도서관(잭 런던 촬영)]
조선시대 과거 하면 ‘한양천리 시험 보러 가는 시골선비’가 깊게 각인돼 있지만 서울의 성균관에서 수년간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으면 급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워낙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과거급제 자체가 어려웠지만 성균관 입학조차도 결코 쉽지 않았다. 성균관은 어떤 기관이고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땠을까.
국비로 교육, 조정의 관리 대부분 성균관 출신, 학생들 자부심 대단
명륜당. 성균관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제1강당이다. 제2강당은 좌측 뒷편의 비천당이다. [배한철기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쓴 명륜당 현판. 현재의 성균관 건물은 임진왜란때 불탔다가 1602년(선조 35) 다시 건축된 것이다. 1606년(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조선에 왔다가 새로 건립한 명륜당 편액을 썼다. 주지번의 글씨가 오늘날까지 보존돼 있다. [배한철기자]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이자 공자에 제사하는 신성한 장소였다. 인재를 교육하고 양성하는 동시에,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공공기관이었던 것이다.

‘성균(成均)’은 널리 인재를 고루 양성한다는 뜻이다. 성균관은 주나라의 대학이 반수(泮水)가에 있었고 반수에 미나리(芹)를 심었다고 해서 반궁(泮宮), 근궁(芹宮) 등으로 기록됐다. 최고 교육기관이라는 의미에서 태학(太學), 공자사당이 있다고 해서 문묘(文廟), 학궁(學宮)으로도 불렸다.

성균관은 국가의 핵심시설인 만큼 조선 태조는 한양천도 직후인 1395년(태조 4) 10월 성균관 건립을 명했고 1398년(태조 7) 7월 완공했다.

주요건물은 공자를 비롯한 유교성현 위패를 봉안한 대성전(大成殿·문묘), 학생들이 강의를 듣는 명륜당(明倫堂)과 비천당(丕闡堂), 기숙사 시설의 학사(동재와 서재), 도서관인 존경각(尊經閣), 식당, 관원 사무실 정록청(正錄廳) 등을 뒀다. 문묘가 전면에, 나머지 교육시설이 뒤쪽에 배치됐다.

국비로 교육이 실시되고 조정의 관리들도 대부분 성균관을 거쳐 출사해 성균관 유생들의 자부심은 컸다. 성균관 입학 대상은 소과 합격자인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였다.

조선시대 과거는 소과, 문과, 무과, 잡과로 분류된다. 소과는 대과인 문과의 예비시험으로 국립 중등교육기관, 즉 서울의 4학과 지방향교 소속 유생들이 응시했다. 소과는 사마시(司馬試), 감시(監試)라고도 하며 3년에 한 번씩 실시해 생원과 진사 각 100명을 뽑았다. 생원시는 사서오경(四書五經) 등 유교경전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진사시는 시(詩)와 부(賦) 등 문학능력을 평가했다.

학생들, 지방출신에 고령자 허다···이황, 김인후 등 대학자들 청강생 출신
성균관의 기숙사 중 하나인 동재. 성균관 기숙사는 서재, 동재가 있다. 조선후기 이후 당쟁이 치열해지면서 서재는 노론이, 동재는 나머지 당파가 기숙했다. [배한철기자]
성균관 정원은 개국초 100명이었으나 세종때 200명으로 늘어났다. 정식학생인 생원·진사 뿐 아니라 관료 자제에 입학기회를 주기 위해 일반유생도 청강생 형태로 받았다. 정식학생은 상재생(上齋生), 일반유생은 하재생(下齋生)으로 호칭했다.

대학자와 명신들이 뜻밖에 하재생 자격으로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퇴계 이황(1501~1570)이 하재생으로 수학했다. <퇴계집> 중 ‘퇴계선생연보’에 의하면, 이황은 23세에 상경해 성균관 하재생이 됐지만 다시 낙향했다. ‘퇴계선생연보’는 “많은 이들이 선생(퇴계)의 법도 있는 행동거지를 보고 비웃었다. 서로 상종하는 이는 오직 김인후 한사람 뿐”이라고 했다.

김인후(1510~1560) 역시 하재생이었다. 당시 성균관 유생들이 퇴계를 하재생이라고 무시해 같은 처지의 김인후와 주로 교유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퇴계는 세월이 한참 흘러 초시에 합격한뒤 33세에 정식으로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 학생들의 나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았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상재생은 30대 후반부터 40대 후반 사이에 집중돼 있으며 더러는 70~80대 노인들도 있었다. 1734년(영조 10) 반수(班首) 윤봉삼(尹鳳三)은 84세, 1770년(영조 46) 반수 어필명(魚必溟)은 83세였다. 반수는 최고령자를 칭하는 용어다.

과거에서 9번이나 장원했던 율곡 이이(1536~1584)는 특이한 사유로 성균관 입학을 거부당했다. 유성룡(柳成龍)의 <운암잡록(雲巖雜錄)>에 의하면, 이이가 1564년(명종 19)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유생들이 제지했다. 이이가 젊은 시절 승려를 했다는 이유였다. 퇴계의 제자였던 권문해(1534~1591)의 도움으로 겨우 입교했다.

유생들은 성균관 내 기숙사에 머물며 공부했다. 유생들은 동재와 서재에 나눠 기숙했다. 동재와 서재는 방이 모두 28개였고 한방에서 4명이 생활했다. 애초 생원이 동재, 진사가 서재를 사용했지만 당색 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동재에는 소론, 남인, 북인 유생이, 서재에는 노론 유생이 거처했다.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 대부분은 성균관 밖 반주인(泮主人)이 운영하는 하숙집에 묵었다.

유생들은 유복(儒服)을 입고 유건(儒巾)을 썼다. 시대별로 붉은색, 흑색, 흰색, 청색 등 여러 색의 옷을 섞어 입다가 1758년(영조 34) 당하관 복식이 개정되면서 유생의 복장도 청의(靑衣)로 통일됐다.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윤기(1741~1826)의 <반중잡영(泮中雜詠)>에 따르면, 식사는 밥, 국, 장, 김치, 나물, 젓갈, 자반, 생채가 기본으로 나오고 열흘에 네 번꼴로 생선, 고기 등 특식이 제공됐다. 삼복에는 개고기, 참외, 수박도 맛볼 수 있었다. 술도 매월 초하루와 보름 방마다 지급됐다.

공부 강도 높고 시험도 매년 20회 시행, 대신 성적 우수자에는 과거급제 혜택 부여
교육과정은 △경학공부인 강경(講經), △의(疑), 의(義), 논(論), 부(賦), 표(表), 대책(對策) 등의 문장 공부인 제술(製述)이 양대축을 이뤘다. 문과시험을 대비한 과목들이다.

재학중 다양한 시험을 치렀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정조(재위 1776~1800) 후반 성균관 과시 횟수는 한해 총 20회나 됐다. 성적우수자는 문과급제 혜택을 줬다. 정약용(1762~1836)은 1783년(정조 7) 생원이 됐고 이후 성균관 시험에서 7차례 입상한 후 1789년(정조 13) 2월 춘도기(春到記·봄 졸업시험)에서 1등해 문과급제 자격을 받았다.

성균관 교육에서 유생만큼 중요한 것이 교관이다. 성균관 최고관직인 대사성은 정3품 당상관으로 유생교육에만 집중하도록 겸직을 금지했다. 대사성을 포함해 성균관 교육을 전담하는 교관은 총 14명이었다. 교관들은 근무기간이 다른 관직에 비해 길어 임명을 기피했다.

임금 중에서 정조가 이례적으로 성균관에서 숙식했다. 1790년(정조 14) 2월 24일 정조는 명륜당에 행차해 유생들을 불러모아 시험을 치른 후 명륜당 마당에서 수행한 신하, 유생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이어, 명륜당에서 잠을 잤다. 이튿날 문묘에 작헌례(酌獻禮·국왕이 친히 참배하고 술잔을 올리는 제례)를 행한 뒤 근신 4~5명과 함께 벽송정(碧松亭)에 올랐다.

<홍재전서> 중 ‘일득록’에 의하면, 정조는 “(벽송정은) 경성에서 아름다운 기운이 듬뿍 서린 장소로 학문을 연마하고 교양을 쌓는 장소로 삼기에 알맞다”며 대사성에게 아름다운 소나무를 더 심어 울창하게 보이게 하라고 지시했다.

벽송정은 성균관 뒤편, 현재 성균관대 도서관 일대의 소나무숲이었다. 정자건물이 실제 있지는 않았고 푸른 소나무 숲이 정자처럼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은 공부에 지친 학생들의 휴식처였다. 과거가 있는 날이면 학부모들이 벽송정에 올라 자식들의 시험을 구경했다.

성균관 강당은 과거시험장, 응시자 몰려 압사 사고도
작자미상 평생도 중 삼일유가(조선시대). 과거 급제자가 3일간 스승, 친척 등 주변 사람에게 인사를 드리러 다니는 일을 묘사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성균관은 예조와 함께 과거시험장으로 사용됐다. 1800년(정조 24) 3월 21일 순조의 왕세자 책봉을 기념하는 과거가 거행됐다. 문과 시험장은 1소를 예조와 육조거리에, 2소를 성균관 비천당에, 3소를 명륜당에 설치했다. 이날 실록은 “3개소의 참가자가 도합 11만1838명이었고 거둬들인 시험지는 3만8614장이었다”고 했다.

과거시험장은 응시자가 넘쳐나며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숙종실록> 1686년(숙종 12) 4월 3일 기사는 “거자(擧子·응시자)들이 앞다투어 (비천당) 뜰 안으로 먼저 들어가려고 하다가 쓰러져 밟혀 죽은 사람이 8명이나 되었고 그 나머지 다쳐서 목숨이 거의 끊어지게 된 사람도 매우 많아서 반교(泮橋·성균관 동쪽 다리) 밖에 울부짖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했다.

조선후기 성균관 주변, 종로 명륜동과 혜화동에는 성균관과 문묘를 관리하고, 유생들의 학업을 지원하는 노복과 그 가족들이 거주했다. 반촌(泮村)이라 불린 교육특구다. 반촌에 사는 사람들을 반인(泮人)이라고 했다. 반인들은 오로지 성균관 업무에 복무하기 위해 다른 부역에서는 면제됐다.

반촌에는 3000여호가 거주했고 이들에게는 소 도살권이 부여됐다. 소를 잡아 성균관에 공급하고 나머지는 판매해 생계를 꾸렸다.

황윤석(1729~1791)의 <이재난고(頤齋亂藁)> 1771년(영조 47) 4월 11일 기사는 “태학 노예에게는 도사(屠肆·푸줏간)를 생업으로 삼아 생계를 꾸리도록 허가하였다. 반촌 남쪽 돌다리(관기교·성균관 남쪽 대명길 주변의 다리) 안쪽에는 동서로 삼천여 호가 산다”고 했다.

도성도 중 성균관과 반촌(조선시대). 붉은 원이 성균관이다. 우측 아랫쪽의 관동 일대가 성균관 교육특구인 반촌이다. 문묘와 성균관을 관리하고 유생들을 지원하는 노복들이 거주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송시열 집터 암벽에 새긴 증주벽립 각자. 증주벽립은 증주의 학문인 성리학을 굳건히 세운다는 뜻이다. 각자는 서울국제고와 서울과학고 사이 골목에 위치한다. 성균관 북동쪽 기슭에는 아름다운 명소가 산재해 유력자들의 집터와 별장이 많았다. [배한철기자]
아파트 밑에 깔려있는 증주벽립 각자. [배한철기자]
반인들은 반주인으로서 하숙집이나 원룸 주인처럼 성균관 유생, 과거시험을 보러 반촌에 머무는 응시생, 한양에 출사하는 관료 등에게 숙식과 편의도 제공했다.

유본예(1777~1842)의 <한경지략(漢京識略)>은 “영남의 유생과 벼슬아치는 서울에 오면 모두 반민의 집에 거처를 정해 머문다. 서울에 사는 유생들도 과거에 응시할 때는 반촌에 머물러 제각기 반주인을 정해 두었다”고 했다.

반촌은 과거시험과 관련한 온갖 정보가 모이는 정보의 집합지였고, 상소 모임, 독서 모임 등 유생 모임도 반촌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반촌에는 주점도 널려 유생들은 풍류를 즐기며 더러는 기생과 인연을 맺었다.

조선전기의 문신 최숙정(1433~1480)의 <소요재집(逍遙齋集)>은 “성균관 시절 기생 일지홍(一枝紅)과 사건이 좀 있었지. 하지만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가면서 15년간 못봤네. 어느 날 저녁 벗들과 한창 술을 마실 때 일지홍을 발견하고 이름을 물어보니 과연 옛날의 그 기생이더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유림통제 어용단체 전락···광복후 성균관대로 부활
성균관 유생들이 머리에 쓰던 유건. [국립민속박물관]
성균관이 고등교육기관이었다면 4학은 중등교육기관이었다. 4학은 5부 중 동부, 서부, 남부, 중부에 세운 동학, 서학, 남학, 중학을 함께 아우르는 명칭이다. 4학에는 양인 이상이면 입학이 가능했고 8세가 되면 입학을 허가했다. 15세 전후의 연령층이 많이 재학했으며 간혹 20세 이상도 공부했다. 4학의 정원은 100명으로, 교육과정은 성균관 진학을 목표로 편성됐으며 성균관에서 교관을 파견해 가르쳤다.

<경성부관내지적목록(1917)>, <경성시가도(1927)> 등 일제강점기 문헌과 지도에 따르면, △중학은 ‘종로 중학동 83’ 케이트윈타워 △동학은 ‘종로 6가 62’ 흥인지문공원 일원 △남학은 ‘필동 1가 24’ 매경미디어센터와 중부세무서 사이 △서학은 ‘태평로 1가 62’ 조선일보에 위치했다.

성균관은 조선말기 이후 혼란 속에 위상을 급속도로 잃어갔다. 결국 1911년 경학원(經學院)으로 개편되며 전국 유림을 통제하는 어용단체로 전락한다. 그러나 광복후 성균관대가 설립되며 교육기관으로 다시 부활하게 된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구봉집(김수인). 매산집(홍직필). 퇴계집(퇴계선생연보). 운암잡록(유성룡). 반중잡영(윤기). 홍재전서(정조). 이재난고(황윤석). 한경지략(유본예). 소요재집(최숙정)

2. 성균관과 반촌. 서울역사박물관. 2019

3. 조선시대 서울의 교육과 학문.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4

4. 근대시기 사부학당 터의 위치 확인과 공간 변화과정에 대한 고찰. 이순우. 향토서울. 제89호. 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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