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에 치여 논문 쓸 엄두도 못 내" 임상시험 건수, 5년 내 '최저'

박정렬 기자 2024. 8. 18.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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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대학병원의 40대 신경과 교수 A씨는 올해 연구 논문을 한 편도 쓰지 못했다.

올해 식약처 승인을 받고 환자모집을 완료한 임상시험은 총 21건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는 총 33건의 임상시험이 환자 모집을 완료했는데 1건을 제외하고 모두 대학병원이 주도하는 임상이었다.

최전선에 있는 대학교수가 연구에 손을 놓고 의학 분야에 경험을 쌓지 못하면 결국 동네병원까지 여파가 미쳐 환자가 더 나은 치료를 받기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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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별 상반기 임상시험 승인 현황/그래픽=윤선정


수도권 대학병원의 40대 신경과 교수 A씨는 올해 연구 논문을 한 편도 쓰지 못했다. 지난해는 SCI급 국제학술지에 4편의 논문을 출판했지만 올해는 도저히 쓸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A씨는 "보통 퇴근 후 집에서 논문을 썼는데 전공의의 빈자리를 메우려 외래 진료, 입원, 중환자 관리를 도맡다 보니 녹초가 돼 쓰러지는 게 일상"이라며 "올해 논문을 하나도 못 쓰겠다는 교수가 여럿 된다"고 토로했다.

의정 갈등 장기화로 대학병원 교수의 업무 부담이 커지면서 진료, 교육에 이어 연구에도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전공의 이탈 이후 대학병원의 '연구 공백'이 현실화하면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K-의료'도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18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임상시험 승인 건수는 총 499건으로 최근 5년 가운데 가장 낮은 것으로 집계됐다. 임상시험 승인 건수는 2020년 526건에서 2021년 620건으로 증가했다가 2022년 573건, 2023년 556건, 올해는 499건을 기록했다.

올해 식약처 승인을 받고 환자모집을 완료한 임상시험은 총 21건이다. 이 중 대학병원이 주도하는 임상은 3건에 그친다. 이마저도 2건은 환자 수가 적은 임상 1상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는 총 33건의 임상시험이 환자 모집을 완료했는데 1건을 제외하고 모두 대학병원이 주도하는 임상이었다. 90% 이상이 여러 대학병원이 참여하는 대규모 임상 2상·3상이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의과대학 교수가 연구동으로 들어가고 있다./사진=[서울=뉴시스] 정병혁 기자


의료계는 임상시험의 양적·질적 하락의 주된 원인으로 의정 갈등을 지목한다. 전공의 사직 이후 진료·당직 등 업무가 몰리면서 의대 교수들이 임상시험 등 연구에 쏟을 시간이 부족해졌다는 것이다. 교수를 도와 환자 관리와 데이터를 수집·분석할 전공의가 사라진 것도 연구 진행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꼽힌다.

특히, 서울아산병원·서울대병원처럼 '세계 최고 병원' 평가에서 상위권에 든 병원은 타격이 더 심각하다. 전공의 비율이 높았던데다 인건비 절감 등을 이유로 비상경영체계를 일찍, 강도 높게 적용했기 때문이다. 해외 학회 참석이 제한되고 학술 활동비 지원이 축소되며 전처럼 연구를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보건의료노조에 따르면 국립대·사립대병원 등 수련병원 중 비상경영체계를 선포한 병원은 4곳 중 3곳(75%)에 달한다.

지금처럼 '연구 공백' 상황이 지속될 경우 우려되는 문제는 크게 3가지다. 첫째, 환자에게 최선의 치료를 제공하기 어려울 수 있다. 새로운 의학 지식과 기술, 장비는 대학병원→관련 학회→1, 2차 병원 순으로 확산한다. 최전선에 있는 대학교수가 연구에 손을 놓고 의학 분야에 경험을 쌓지 못하면 결국 동네병원까지 여파가 미쳐 환자가 더 나은 치료를 받기 힘들어진다.

둘째, 임상시험이 축소될 가능성도 있다. 국가임상시험지원재단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지난해 미국, 중국, 스페인에 이어 세계 4번째로 제약사 주도 임상시험을 많이 하는 나라다. 풍부한 경험과 성과로 이제는 글로벌 제약사가 먼저 한국 병원에 임상시험을 의뢰할 정도가 됐다. 하지만, '시간이 돈'인 임상시험에서 환자 모집·관리에 장기간 차질이 빚어질 경우 '협업 파트너'로서 한국의 매력은 떨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끝으로 의료계에서는 수십 년간 어렵게 쌓아 올린 'K-의료'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팽배하다. A교수는 "빠르게 변화하는 의료현장에서는 1년의 공백도 무시 못 할 격차를 만든다"며 "당장은 문제가 없더라도 결국 한국 의료의 위상은 추락하고 환자는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박정렬 기자 parkj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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