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산-오사카-뉴욕… 걸작 병풍의 파란만장한 내력
사회적 지위가 높은 지배층이나 유한계층이 세와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들만이 지녔던 소유품을 드러내고 과시하는 시각 문화적 습성은 역사를 초월해 나타난다.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층도 다르지 않았다.
그림은 유력하고 적실한 문화적 차별화의 수단이었다. 고려·조선 시대부터 구한말까지 명문세족이나 고관대작들은 잘나가는 집안임을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상징적 이미지들을 활용했는데, 그중 하나가 병풍이었다. 중국에서 입수한 명품 그림이나 희귀한 골동품들을 집안에 늘어놓고 과시하거나, 이런 골동품들을 그린 그림들을 제사나 행사 때 내걸거나 집주인 방(사랑채) 등에 진열해놓고 외빈들에게 자랑했다.
지난 5월1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개막해 13만명 넘는 관객을 모으며 지난 4일 막을 내린 기획전 ‘한국근현대자수: 태양을 잡으려는 새들’은 병풍 희귀작을 하나 내놓았다. ‘준이종정도’ 자수병풍이었다. 독특한 내용과 형식에 전래 경위를 둘러싼 파란만장한 이야기로 관심을 모았다.
조선왕실 사당인 종묘에 제사 지낼 때 제사 용기의 모델이 된 중국 고대 상·주 시대 청동제기 40개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다. ‘준’ ‘정’ ‘작’ 등의 이름이 붙은 고대 제기들 모양새를 남청색 안료를 칠한 병풍 바탕에 금색 명주실로 수놓았는데, 독특한 소재와 고급 재료, 최고의 수예 기법이 사용돼 눈길을 끈다. 섬세하고 치밀하게 겹겹이 색실을 엮은 제기들의 도면처럼 정교한 묘사 얼개는 재료 조달과 장인 동원 등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왕실의 예술품이란 점을 일러준다.
바느질과 실의 예술인 자수는 흔히 규방 여성들이 특유의 미의식을 담아낸 공예 장르로 여기는 선입관이 강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여성적인 규방 예술과는 뚜렷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유교 질서의 상징으로 왕실이나 사대부 제례상 뒤쪽이나 사랑방을 장식했던 기물로 보이는데, 기법의 정교한 수준에서 당대 최고 장인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전시를 기획한 박혜성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기존 전통자수와 달리 흔치 않은 도상과 돋보이는 고급 기법을 사용했지만 표현이 과하지 않고 절제됐으며 당대 사회와 가정의 유교적 질서를 상징하는 권위적 성격이 뚜렷한 게 특징이다. 우리 옛 자수가 여성들의 규방 공예에 한정되지 않았고 남성들의 유교적 지배 질서에 대한 시각적 상징물로도 쓰였음을 일러주는 소중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궁중에서 사대부 집으로 갔다가 이후 일본과 미국을 넘나든 전래 내력도 흥미진진하다. 제작 경위나 작가 등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다만 궁중 최고의 장인들이 만들어 한 관료의 가족에 하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원래 규장각 대제학을 지낸 관료 민승세가 1820년대 지은 충청도 직산의 큰 저택에 보관했던 것으로, 제례 때 배경 병풍 용도로 쓴 것으로 보인다. 1947년 저택과 병풍을 이어받은 후손 민익현은 유명 문인 한무숙(1918~1993)의 여동생 한묘숙(1928~2017)과 결혼했다가 1965년 이혼하게 되는데, 그때부터 병풍의 유전이 시작된다. 병풍이 한묘숙의 소유품이 되고 한묘숙의 여동생인 소설가 한말숙(1931~)이 언니 부탁으로 1974년 주한일본대사관 외교관에게 팔면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됐다.
17년이 흐른 1991년, 평생을 조선통신사 연구에 바친 동포 역사학자 신기수(1931~2002)가 작품을 사들였다. 신기수는 말년에 오사카 사카이시 박물관에 소장품 상당수를 기증하면서 이 병풍도 기탁했는데, 2010년 국립대구박물관의 ‘조선왕실자수병풍’전에 출품되면서 국내 미술사학계에도 처음 알려졌다. 당시 관련 논문이 발표되면서 독특한 도상과 기법이 주목받았다.
국립현대미술관 쪽은 이번 자수전을 준비하면서 이 작품도 대여하기로 하고 사카이시 박물관과 교섭했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다. 알고 보니 신기수의 일본인 부인과 딸이 2021년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병풍을 기증한 뒤였다. 이에 박혜성 연구사가 뉴욕에 찾아가 교섭한 끝에 작품을 빌려와 출품하게 됐다. 메트로폴리탄 쪽은 이 작품을 기증받기 위해 각별한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진다. 중국 고대 제사용 그릇과 잔들이 매개체가 되어 19세기 조선의 자수 그림에까지 이어져 내려온 동아시아 미술교류 역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희귀 작품이기 때문이다. 메트로폴리탄 쪽은 병풍을 조사해 19세기 후반 유포된 중국 청나라 목판본 고증학 서적 ‘금석색’에 나오는 청동제기의 이미지와 텍스트를 묘사한 것이란 분석도 내놓았다.
삼국시대 복식이나 고구려 벽화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 이 땅의 자수 역사는 1500년 넘는 오랜 전통을 지녔다. 이제 뉴욕에서 안식처를 찾게 된 준이종정도 병풍은 이런 전통을 반영하면서도 나라와 민족, 미술과 공예의 경계를 넘어서는 교류의 산 역사를 지닌 몇 안 되는 사례란 점에서 귀하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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