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기술력 뛰어난데…엔비디아 같은 기업 나오지 못하는 까닭

고명훈 시사저널e 기자 2024. 8. 1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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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中·日 등 팹리스 키우기에 사활…한국 기업만 설 자리 잃어가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 절실…정부 지원 집중 필요”

(시사저널=고명훈 시사저널e 기자)

인공지능(AI) 산업의 성장으로 시스템 반도체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상황에서 팹리스(Fabless·반도체 설계)는 향후 글로벌 반도체 주도권을 거머쥘 핵심 경쟁력으로 지목된다. 국내 반도체 설계기술 기업들은 자동차용 반도체, 인공지능 등에서 뛰어난 기술력을 선보이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메모리 반도체 강국인 한국의 팹리스 기업들은 성장동력 확보에 한계를 느끼며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의 호황에 기대며 팹리스 분야 지원에 손을 놓은 정부 탓이 크다. 판교에 구축하기로 한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는 아직 부지조차 제대로 확보되지 못했다. 팹리스를 전담 지원할 정부 컨트롤타워도 없다. 팹리스 키우기에 사활을 건 미국, 중국, 유럽, 일본 등 경쟁국과 달리 한국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반도체 업계는 팹리스 성장에 중요한 에코 시스템 구축과 정부 지원의 효율적인 집행을 위해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에 속도를 내달라고 호소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9월6일(현지시간) 자카르타 텔콤 본사에서 열린 한·아세안 AI청년 페스타에 앞서 AI 반도체 팹리스 스타트업의 청년기업가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국내에도 우량 스타트업 적지 않아

팹리스는 말 그대로 공장(팹) 없는 반도체 회사를 뜻한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 기업으로 지목되는 엔비디아, 인텔, 퀄컴, AMD 등도 모두 팹리스다. 삼성전자에도 칩을 설계하는 시스템LSI사업부가 있다. 대규모 자본이 드는 생산라인이 필요 없기 때문에 스타트업도 기술만 있다면 충분히 시장에 도전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한국에도 좋은 설계기술을 보유한 팹리스가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 기술 우수성을 인정받으며 이름을 알리는 기업들이다. AI 반도체 스타트업 삼총사로 불리는 리벨리온, 사피온, 퓨리오사AI는 서버 및 고성능컴퓨팅(HPC) 영역에서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를 대신해 AI 추론 분야에 특화된 신경계처리장치(NPU)를 개발했다. 3사 모두 올해 신규 칩 양산에 돌입한다.

리벨리온은 올 초 5나노 공정 기반의 2세대 NPU 칩 '아톰'을 양산한 데 이어 내년 상반기를 목표로 4나노 공정으로 제작되는 '리벨(3세대)' 출시도 앞두고 있다. 앞서 리벨리온은 AI 반도체 성능 테스트 대회인 엠엘퍼프(MLPerf)에서 아톰이 퀄컴·엔비디아의 동급 반도체보다 1.4~3배가량 앞선다는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올해 세계적 권위의 반도체 학회인 '세계고체회로학회(ISSCC)'에서 국내 AI 반도체 스타트업 최초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사피온은 올 상반기 데이터센터용 2세대 칩 'X330'를 출시해 고객사에 공급하고 있다. 사피온 또한 해당 칩이 엔비디아의 AI용 GPU 'L40S' 대비 연산 성능은 약 2배, 전력효율은 1.3배 우수하다는 내부 테스트 결과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차세대 칩 'X430'은 2026년 출시 예정이다.

퓨리오사AI도 최근 2세대 '레니게이드' 시제품 공급을 개시했다. 국내 대기업을 대상으로 평가를 거친 이후 글로벌 클라우드사업자(CSP) 및 데이터센터 업체도 공략할 계획이다. 이 회사에 따르면 레니게이드의 칩 성능은 엔비디아 L40S 칩과 유사하지만, 전력 소모에선 2배 이상 효율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3사가 현재 인정받고 있는 기업 가치는 각각 8000억원, 5000억원, 6800억원 수준이다. 이 중 리벨리온과 사피온은 합병을 통해 연내 통합법인을 출범한 이후 차차 상장 수순을 밟을 예정이며, 퓨리오사AI 또한 내년 하반기를 목표로 증시 상장을 준비 중이다.

온디바이스 AI 시장을 공략 중인 딥엑스는 지난 5월 1200억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하며 기업 가치를 크게 올렸다. 올 초 열린 세계 최대 전자제품박람회 'CES 2024'에서 설계 우수성을 인정받아 혁신상을 3개 받는 쾌거를 달성했다. 대만 컴퓨텍스 타이베이에서도 혁신상을 수상했다. 내년엔 거대언어모델(LLM)을 지원하는 온디바이스 AI 전용 칩도 출시할 계획이다.

자율주행, 첨단 운전자 보조시스템(ADAS) 기술 발전으로 차량용 반도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기업들도 있다. 텔레칩스는 자동차 인포테인먼트용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설계를 주력으로 하는 국내 1위 차량용 반도체 팹리스로, 일본과 동남아시아를 넘어 최근 유럽 시장까지 진출하며 해외 매출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동운아나텍은 스마트폰용 자동초점(AF) 센서 칩 등을 비롯해 자동차 전장에 적용되는 햅틱(HAPTIC), 라이다(LIDAR), ADAS 제어 칩 등을 주요 사업으로 하고 있다. 이 회사의 지난해 연간 기준 매출은 1115억원으로, 이 중 해외 매출 비중은 70.4%에 달한다. 전년(61.9%) 대비 9.5%포인트 늘어난 수치다.

3월18일(현지시간) 미국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연례 개발자회의 GTC 2024가 열린 미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 SAP 센터에서 젠슨 황 CEO가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쟁국 앞서 가는데 한국은 지원 부처 제각각

이렇게 높은 기술력에도 국내 기업들은 매출 기준으로 10위권에도 들지 못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지난해 매출 기준 글로벌 팹리스 점유율 순위에서 엔비디아가 33%(76조원)로 1위를 차지했다. 퀄컴이 42조5000억원(18%)으로 2위, 브로드컴(17%), AMD(14%) 등이 그 뒤를 이었다. 10위권 안에 드는 곳은 모두 미국과 대만이 차지했으며, 국내 기업은 없다.

국내 반도체 팹리스 기업들은 정부 지원이 메모리와 파운드리에 상대적으로 쏠려 있어 기초체력을 키우기 어렵다고 호소한다. 중국, 미국, 유럽 등 경쟁국과 비교해 반도체 에코 시스템과 장기간 개발을 지속할 수 있는 재정적 지원 체계가 부족한 실정이다.

팹리스 성장을 위해선 설계자산(IP), 전자설계자동화(EDA), 디자인하우스, 후공정(OSAT)으로 이어지는 생태계 구축이 필수다.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미국, 일본, 유럽 등의 정부에선 반도체 기업 투자액의 50%가량을 팹리스 생태계에 투입하고 있다. 대만의 경우 저성능 반도체를 설계하는 중소 반도체 기업을 대상으로도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해 생태계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반도체 자립에 사활을 건 중국의 경우 AI 반도체를 중심으로 자국 팹리스에 사무실, 전기료 등을 지원하고, 시스템 반도체 대기업이 자국 팹리스를 사용할 경우 세제 혜택 등을 지원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통해 10년 전 수백 개 수준이었던 중국 내 팹리스 기업 수는 최근 3000여 개까지 늘어났다.

물론 한국 정부도 시스템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겠다면서 금융 지원 등 방안들을 내놓고 있다. 다만 반도체 지원책 자체가 한 곳에 집중되지 못하고 분산돼 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제3판교 테크노밸리에 구축하기로 한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 사업마저 지지부진하다. 해당 사업의 경우 현재 국토부와 경기도 승인을 받았지만, 성남시가 부지 배분을 확정 짓지 못한 채 여전히 논의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올 초 경기주택도시공사(GH)는 사업비 1조7000억원을 투입해 사업부지 약 7만㎡(약 2.2만 평)에 달하는 제3판교를 시스템 반도체, 팹리스 클러스터로 조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GH는 내년 말 착공해 2029년 기업 입주가 가능하도록 사업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반도체 업계는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가 조성되면 팹리스 중심의 산업단지를 구축해 IP, 디자인하우스, OSAT 등 팹리스 생태계와 함께 제도적 기반하에 집약적 육성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했다.

김경수 한국팹리스산업협회장은 지난달 국회에서 열린 정책토론회에서 "제3판교에 추진 중인 시스템 반도체 클러스터가 성남시로 넘어와 현재 확보된 부지가 1만~1만5000평 수준인데, 최소 4만~5만 평 정도의 더 큰 부지를 할당해 줘야 한다"며 "팹리스 생태계 기업들과 인력 양성, 연구기관 등이 하나의 지역에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클러스터를 만들고자 하는 게 꿈이다. 얘기가 나온 지는 5년이 훌쩍 넘은 것 같은데 아직도 실질적으로 진행되는 부분이 없다"고 지적했다.

"지원책 집중 위한 컨트롤타워 필요"

정부가 팹리스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특화 조직을 새롭게 조성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부 부처 내 시스템 반도체 부문에서 팹리스 산업 전담부서를 파운드리와 별도로 두고, 독립적인 산업으로 격상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팹리스협회도 현재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등 세 개 부처 산하 법인으로 분산돼 있다. 할당된 연구개발(R&D) 투자금은 많지만, 정작 어느 부처 하나 지원을 집중하기 어려워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박재홍 보스반도체 대표 또한 "현재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은 부처 간에 파편화돼 있다. 기술력은 있지만 업력이 짧은 신규 스타트업에 상당히 불리한 구조"라며 "팹리스 업체들은 국내 IP와 EDA 업계가 취약하다 보니 해외 자원을 사용할 수밖에 없어 반도체 하나를 개발하려면 수백억원의 개발비가 든다. 중국은 현지 팹리스 기업이 자국 팹(공장)을 사용하면 정부가 개발비의 상당 부분을 지원하는데 한국은 지원금 규모가 미세 공정 사용 과제 개발비를 감당하기에도 턱없이 모자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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