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도 야스쿠니엔 안 가, 왜냐면”…가미카제 대원이 여동생에게 남긴 말 [한중일 톺아보기]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이날 야스쿠니(靖国)신사에 공물을 봉납했습니다. 기시다 총리는 취임이래 야스쿠니를 직접 참배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이번까지 총 9차례 공물을 봉납했습니다.
현직 각료 등의 참배도 이어졌습니다. 현직 각료중 다카이치 사나에, 신도 요시타카 등 예상됐던 인물들과 함께 올해는 특히 기하라 미노루 방위상이 눈에 띄었습니다. 현직 방위상이 야스쿠니를 참배한 것은 3년 만에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하라 방위상은 참배 후 기자들에게 “생명을 희생한 분들을 애도하고 존숭(尊崇)의 마음을 표현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들 각료들 이외에 자민당의 젊은피 이자 차기 총재 후보군으로도 꼽히고 있는 고이즈미 신지로 전 환경상, 고바야시 다카유키 전 경제안보담당상 등도 참배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한국 외교부는 이날 성명을 통해 기시다 총리의 야스쿠니 공물 봉납과 각료들의 참배에 대해 “깊은 실망과 유감”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특히 기하라 방위상의 참배에 대해 “일본의 방위·안보 책임자 기하라 대신의 참배라는 시대착오적 행위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외교부는 주한 일본 대사관 총괄 공사를 초치해 엄중항의했다고 밝혔습니다.
야스쿠니를 둘러싼 논란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건 14명의 A급 전범입니다. A급 전범은 1946년 열린 도쿄재판에서 침략 전쟁의 계획, 실행을 포함해 가장 심각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이들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일본의 40대 총리 도조 히데키 입니다. 지난 1978년 그를 포함한 이들 14명의 위패가 스리슬쩍 야스쿠니에 합사됐습니다.
이후로도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참배는 계속 있었지만, 2000년대 이전 가장 크게 논란이 됐던 때는 1985년 이었습니다. 당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가 개인 자격이 아닌 총리 공식직함으로 정식 참배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한국, 중국 등 주변국들의 강한 반발을 샀고, 일본내에서도 비판 여론이 일었습니다. 이후 일본 총리의 공식 참배는 중지되는 듯 했지만, 2001년 고이즈미 총리때 다시 시작되면서 한동안 파문이 일었습니다.
일본여론조사회가 지난 6∼7월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65%의 응답자가 현직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에 찬성한다고 답했습니다. 9년전 대비 10%포인트 증가한 수치로, 일본 사회가 과거보다 우경화 됐다는 주장을 뒷받침 해주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A급 전범 합사에 대한 주변국들의 반발이 강하자 한때 이들을 분사하자는 논의가 나온적도 있지만, 이 같은 논의 역시 최근 몇 년새 눈에 띄게 흐릿해진 모양새 입니다.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참배를 찬성하는 일본 여론은 한국 등의 반대를 내정간섭 또는 반일행위로 간주 합니다. 산케이 신문은 15일 사설에서 “야스쿠니 참배는 전몰자와의 약속”이라며 “기시다 총리와 각료, 총재 선거 입후보에 뜻을 둔 정치가들은 종전일과 춘추계 예대제 등에 참배해주면 좋겠다”고 제언했습니다.
이들의 최후는 전쟁 기간 가장 경악스럽고 비참한 대목들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야스쿠니에서 이들은 ‘신’으로 되살아 나리라고 강요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에는 출격직전 심경을 밝힌 메모로 유명한 우에하라 료지(上原良司)라는 학도병 출신 특공대원이 있었습니다.
15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매년 논란이 되는 일본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참배와 관련해 그에 대한 특집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일제는 전쟁 초기엔 대학 등 고등교육기관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징집에서 제외했지만 전황이 악화되자 구분짓지 않았습니다. 1943년 우에하라는 특별 조종 견습생으로 육군 비행 학교에 배속돼 조종 훈련을 받기 시작합니다.
입대후 생활은 개인의 자유가 아닌 국가와 조직의 질서가 항상 우선시 됐습니다. 상관으로부터 부당한 상명하복, 신체적 위해, 정신적 괴롭힘이 횡행하기도 했습니다. 우에하라가 신조로 삼았던 자유와는 거리가 먼 환경이었죠.
일본군부는 병사들에게 ‘수양반성록’ 이라는 걸 쓰게했습니다. 당시 일본군 비행 견습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생활하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는 자료로, 우에하라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1944년 6월 29일] “자유는 군대에서도 인간성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부지불식간에 자유를 추구한다. 자유를 박멸하는 건 불가능하다”...(중략).
“잠깐 이라도 감시하는 눈이 없으면 나는 멋대로 한다. 군대식으로 말하자면 이건 빵점이겠지만, 인간으로서는 자유주의가 충만하다는 증거다. 사상적으로 진보하고 있다고 해야한다.”
조종사로 육성되는 과정에서 그의 자유가 억압되는데 대한 고민과 분노가 드러나는 구절도 나옵니다.
[1944년 6월 27일] “그대여, 인격자가 돼라. 교육대에 인격자가 적은것은 유감이다. 인격자가 되면 말을 적게 해도 교육이 이뤄질 것이다.”
이것은 그의 수양반성록을 읽는 상관이자 교관에게 대놓고 “너는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위계질서가 분명한 군대, 특히 당시 일본군 조직에서 이는 매우 이례적 행동으로 보입니다.
일제 패망후 살아남은 그의 동료는 우에하라에 대해 “그런 말을 썼다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도 그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비록 몸은 일본군에 속해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성숙한 자유주의자 였던 겁니다.
어느날 지휘관은 이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특공작전 지원자는 일보 앞으로”라고 다그쳤습니다. 추후 우에하라는 주변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울음을 삼키며 앞으로 나설수 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공 투입 1달 전, 우에하라는 마지막으로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과 시간을 갖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 도중 홀연 여동생인 도시에에게 이렇게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이 전쟁은 질 거다.”
일본이 반드시 이길 것이고 가미카제가 불 것이라는 군부의 선전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도시에는 당황해 했습니다. 밖에서 누가 들을까 조마조마해 하는 여동생에게 그는 연이어 말했습니다. “나는 죽어도 야스쿠니에는 가지 않을거야. 천국에 갈테니까.”
1945년 5월 11일, 우에하라는 가고시마 기지에서 폭탄을 싣고 오키나와로 출격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20대 약관의 자유주의자는 그렇게 헛되이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들의 유해는 당연히 유족들에게 돌아오지 못했지만, 야스쿠니는 “조국에 순국한 존귀한 신령”이라며 이들의 위패와 명부를 합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에하라는 분명 마지막 순간까지 야스쿠니에 가는 것을 강하게 거부했습니다.
[출격 전야에 쓰다] “이런 작전을 행하는 나라가 전쟁에서 이기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조직이 오래 지속될리 없습니다. 전체주의 국가는 일시적으로 번성할지 몰라도, 결국 패배할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중략)
“권위주의 국가는 토대가 부서진 건축물 처럼 차례차례 멸망해 가고 있습니다. 추축국은 패배하고 자유를 존중하는 국가는 살아남을 것입니다.”
“내일은 자유주의자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의 뒷모습은 쓸쓸하겠지만 마음은 만족감으로 가득합니다. 자기신념을 지키는것, 이것은 조국으로서는 두려워할 만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대단히 기쁜 일입니다.”
15일 기시다 총리는 도쿄 부도칸에서 열린 전몰자 추도식 기념사에서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며 “이 결연한 맹세를 세대를 넘어 계승, 관철해나가겠다”고 말했습니다. 또 “전후 일본은 일관되게 평화 국가로서 행보를 이어왔다”며 “역사의 교훈을 깊이 가슴에 새기며 세계 평화와 번영에 힘써왔다”고 덧붙였습니다.
일제는 79년전 패망했습니다. 하지만 당시를 겪었던 이들의 상처는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야스쿠니에서 군국주의는 미화되고 가미카제 특공대원들은 국가를 위해 장렬히 전사한 “영웅”으로 포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에하라의 유언과 유족들의 증언에서, 그는 가족과의 평온한 삶을 꿈꾸고 끊임없이 자유를 희구했지만 광기어린 군국주의에 희생된 평범한 청년의 모습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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