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살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끝낼 수 없다”…돌파구 찾는 K전기차‧배터리
(시사저널=조문희 기자)
"전기차는 일종의 종교와 비슷해요. 전기차를 찾는 사람은 계속 찾는데, 외면하는 사람은 끝까지 외면하거든요. 전기차 화재 빈도가 내연기관차보다 낮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믿는 사람은 안 믿어요. 전기차에 대한 공포감을 없애면 시장이 더 커질 텐데, 신기술이다 보니 신뢰를 키우는 게 쉽진 않을 거예요."
1년 전 한국 전기차 산업의 미래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완성차 업체 관계자가 한 말이다. 이 관계자는 "지금은 사정이 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전기차 수요가 둔화한 상황에서 인천 청라 아파트 지하주차장 전기차 화재 사고를 계기로 국내시장에서 공포감까지 확산하면서다. 업계에선 '전기차 살 사람은 이미 다 샀다'는 자조까지 번지고 있다.
그러나 전기차 산업을 포기할 순 없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인식이다. 한국은 양극재부터 배터리셀, 전기차로 이어지는 생태계를 완벽히 구축한 몇 안 되는 나라다. 한국이 세계적인 전기차 전환 움직임의 최대 수혜국으로 꼽히는 배경이다. 전기차 관련 산업체들은 이번 기회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을 극복하겠다는 목표를 되새기고 있다.
중고 전기차 매물 급증, '계약 취소'도 잇따라
인천 청라 사고 이후 전기차 업체가 직격탄을 맞았다는 데엔 이견이 없다. 차종 선호도가 즉각적으로 반영되는 중고차 시장이 대표적이다. 중고차 판매 플랫폼 케이카에 따르면, 8월1일 청라 사고 전후로 전기차를 매물로 내놓은 이가 184% 증가했다. 7월 마지막 주 케이카에 중고 전기차 매물이 100건 접수됐다면, 청라 사고 이후 8월 첫째 주에는 접수 건수가 284대로 늘어났다는 뜻이다. 케이카 측은 "구체적인 물량을 공개할 순 없다"면서도 "사고 이후 매물이 크게 늘어난 것은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온라인에서는 '계약 취소' 후기가 잇따르고 있다. 올 하반기 국내에선 현대차 캐스퍼 일렉트릭과 아이오닉, 기아 EV3, 볼보 EX30, GM 이쿼녹스, 폴스타 폴스타4 등이 사전 계약을 받고 줄줄이 출고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지금 사면 바보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반응과 함께 사전 계약을 취소했다는 인증이 이어졌다. 사전 계약은 정식 계약보다 취소하기가 쉬운 만큼, 실제 취소 사례가 상당할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대응도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울시는 9월까지 공동주택 관리규약 준칙을 개정해 90% 이하로 충전을 제한한 전기차만 지하주차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권고하기로 했다. 90%까지만 충전된다는 인증서를 받은 차량이 아니면 앞으로 서울 시내 지하주차장 진입이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다.
익명을 요구한 완성차 업체 관계자는 "일반 소비자에게 전기차 배터리에 진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조치가 아니냐"며 "충전을 제한한 만큼 주행거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무슨 근거로 지자체가 충전율에 개입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반발했다.
배터리 공개·파격 이벤트…확 달라진 전기차
업계에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란 반응이 대다수다. 이번 사고를 발판 삼아 전기차 시장의 성숙을 꾀한다는 구상이다. 현대차가 대표적이다. 현대차는 '신뢰도 회복'에 방점을 찍고 청라 사고 후속 대책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 현대차는 8월10일 업계 최초로 배터리 제조사 전면 공개에 나섰다. 관계자는 "전기차가 미래 먹거리인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제대로 인식을 정비해 캐즘을 돌파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완성차 업체들도 이 같은 분위기에 동참하고 있다. 8월13일 기준 현대차를 포함해 기아·KG모빌리티 등 국내 완성차 업체 3곳과 벤츠·BMW·폴스타·볼보 등 수입차 업체 4곳이 배터리 제조사 정보 공개에 동참했다. 그간 완성차 업체들은 배터리 협력업체는 영업기밀에 해당한다며 비공개 방침을 고수해 왔으나,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태도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각종 프로모션도 이어지고 있다. 현대차는 이달부터 1년간 전기차 출고 고객에게 해외 호텔 숙박권을 제공하는 이벤트를 진행한다. 수입차 업체도 파격적인 할인 판매에 돌입했다. 아우디·BMW 등은 과거 할인한 적이 없던 일부 전기차종을 이달 10~30%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 할인 가격은 최대 2000만원에 달한다. 이들 업체는 "이전부터 구상했던 프로모션"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업계에선 파격적 이벤트 도입에는 '전기차 포비아'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회는 이때"…中 대항마로 나선 K배터리
배터리 업계도 마찬가지다. 이미 중국에 점유율 선두 자리를 내준 한국 배터리 업계는 생산라인 다각화와 함께 기술 고도화를 추진하며 캐즘 극복에 힘쓰고 있다.
당초 국내 배터리 업계는 NCM(니켈·코발트·망간) 선두 주자로서, 이 분야에서만큼은 중국 업체의 기술력보다 월등히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니켈과 코발트 성분은 많이 쓰일수록 배터리 용량을 늘릴 수 있지만 에너지 밀도가 높아 화재 위험성도 높이는 물질로 통한다. 이에 업계에선 최근 LFP(리튬·인산·철) 시장 진출에도 박차를 가했다. LFP 배터리는 주행거리는 짧은 대신 화재 위험은 낮다는 게 업계의 인식이다. 국내 배터리 업계는 중국보다 늦게 개발을 시작했지만 압도적 기술력을 바탕으로 성능을 높여, LFP 시장 점유율까지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이미 LFP 시장에서도 국내 배터리 업체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LG에너지솔루션은 르노와 LFP 배터리 공급 계약을 체결해 내년부터 양산하기로 했다. 삼성SDI와 SK온도 2026년 LFP 배터리 양산을 목표로 고객사와 협의를 진행 중이다. 한 관계자는 "미·중 무역 갈등으로 중국 배터리의 시장 진출이 어려워진 데다 안전성을 이유로 LFP 배터리가 부각되는 상황"이라며 "한국 배터리가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점유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도 전기차 불안감 해소를 위한 대책 마련에 적극 나섰다. 전기차 화재 관련 컨트롤타워를 맡게 된 국무조정실은 8월13일 △전기차 특별 무상점검 △배터리 제조사 정보 자발적 공개 권고 △스프링클러 등 소방시설 점검 등을 골자로 하는 긴급 대책을 내놓았다. 정부는 전기차 산업 경쟁력과 과제의 실현 가능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오는 9월 종합 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