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대표는 직업을 잘못 택한 것 아닌지 [노원명 에세이]
‘국민통합의 정신을 기리는 광복절 경축식이 되어야 합니다’(8월11일 한지아 수석대변인) ‘광복절 경축식은 국민통합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8월14일 곽규택 수석대변인) ‘‘친일 선동’으로 국민 속이고 국정을 흔드는 민주당의 행태야말로 ‘매국’입니다’(8월14일 곽규택 수석대변인) ‘광복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소모적 정쟁 중단하고, 통합과 화합으로 나아갑시다’(8월15일 한지아 수석대변인) ‘초유의 광복절 경축식 보이콧, 더 이상의 국민통합 저해행위 중단 바랍니다’(8월16일 김혜란 대변인) 등이다.
5개 논평 중 4개가 ‘통합’ 주문이고 제목과 내용이 다 거기서 거기다. 14일 곽규택 수석대변인 명의 두 번째 논평만이 “광복절을 하루 앞둔 오늘까지 민주당은 해묵은 ‘친일 선동’으로 국민의 눈과 귀를 속이고, 아님 말고 식의 무책임한 정치공세로 지지층 결집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국정 흔들기에만 몰두하는 민주당의 행태가 진정한 ‘매국’입니다”라며 수위를 높였다. 그날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윤석열 정권은 사실상 정신적 내선일체 단계에 접어든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친일 매국 정권”이라고 비난한 것에 흥분한 듯 보인다.
정당이 공식 논평만으로 주의·주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진짜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 논평은 최소 행위일 뿐이다. 지난 광복절 논란에서 국민의힘이 한 것은 논평을 낸 것이 전부이자 최대치였다. 그것도 광복절 불참에 대한 유감 표명이 대부분, 독립기념관장 임명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한동훈 대표는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이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인사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 있다”고 한마디, 또 광복절 정부 행사에 불참한 야당에 유감 표명을 한마디 했다.
한동훈 대표는 말을 아끼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늘 딱 부러지게 말하고 상대를 논리로 굴복시키는 것을 즐긴다. 법무부 장관을 할 때는 야당 의원에 한마디도 지지 않았고 지난 대표 경선 때는 ‘한마디도 안 지려는’ 그 버릇 때문에 손해를 보기도 했다. 그런 그도 말을 아끼는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감옥에 보낸 국정농단 수사, 당사자를 구속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법원에서 완전 무죄가 나온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거래 의혹 사건과 삼성 합병 사건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사법거래 의혹과 삼성 사건은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겠다. 그 논리라면 1심 판결도 나오지 않은 이재명 의혹에 대해서도 말을 아껴야 할 것인데 한 대표는 그에 대해서는 아주 많은 말을 해 왔다. 한 대표는 자기에게 불리하면 말을 아끼고 그렇지 않은 모든 주제에 대해서는 명민함을 과시하는 스타일이다. 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다.
그런 한 대표와 그가 이끄는 국민의힘이 독립기념관장 문제에 대해 입을 닫은 것은 그 문제가 중요하지 않거나, 혹은 이롭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의힘 논평은 광복절 논란을 ‘철 지난 이념논쟁’으로 간주하고 ‘민생이 더 중요하다’는 관점을 취하고 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빵은 이념보다 중요했다. 이념을 빵 앞에 놓으려는 모든 시도는 불행과 재난을 몰고 왔다. 그러나 ‘빵이 이념보다 중요하다’는 생각 자체가 하나의 이념이다. 그리고 그 이념이 늘 올바른 방식으로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빵을 앞세워 대중을 현혹하고 나라를 도탄에 빠지게 만든 지도자는 동서고금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한 사회가 공허한 이념논쟁에 소모되지 않게 하는 백신은 ‘빵’이 아니라 ‘건강한 이념’이다. 빵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되어야 한다는 원칙 말이다. 정치는 그 원칙을 놓고 다투는 경쟁이다. 빵 그 자체를 만드는 것은 경제이지 정치가 아니다.
독립기념관장이란 자리는 그리 대단하지 않지만 지금 논란은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가령 광복회와 야당, 그리고 국민의힘 일부 의원들의 주장처럼 김형석 관장이 사퇴한다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자리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극성스러운 민족주의에 우리 사회의 ‘표준’을 넘기는 의미가 있다. 김형석 관장 개인이 표준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를 선임한 과정과 논의를 무효로 해버리면 표준은 넘어가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치는 표준을 쟁취하는 게임이다. 한국의 보수주의를 떠받치는 기둥중 하나는 한미 동맹을 기본축으로 한 서구진영과의 연대, 세계주의가 한국의 번영을 가져왔다는 믿음이다. 보수진영이 이승만과 박정희의 유업을 김구보다 선순위에 놓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한국의 보수주의자가 신자유주의자일 필요는 없다. 뉴딜주의자라도 무방하고 페미니스트라 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성공 모델을 부정하고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나라’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지금 야당과 광복회는 그런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있다. 그들이 김형석 관장을 비토하는 것은 한국 보수주의에 대한 울분의 표현이자 거세 기도다.
사실을 말하자면 국민의힘과 그 전신이었던 보수당은 하나같이 이 싸움을 회피했다. 정치라는 것은 이념싸움이 본질이고 자기들이 거기에 무능할 뿐인데 그때마다 ‘철 지난 이념 싸움’ 운운하며 눈을 깔아버린다. 그런 그들이 민생이라고 잘 보듬을 까닭이 없다. 세상에 이념에 기반하지 않은 경제가 어디 있나. 뭘 해도 지리멸렬, 늘 배는 산으로 갔다. ‘보수는 유능하다’는 얘기는 20세기에나 통했던 주장이다.
말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다를 줄 알았다. ‘태극기 보수주의’를 추수하리라 기대한 것은 아니다. 보수(補修)하지 않는 보수는 반드시 무너진다. 보수에 청신함을 불어넣고 확장성 없는 가두집회가 아니라 말과 논리로 상대 주장을 무력화하는 전투력을 한동훈에 기대했다. 독립기념관장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이승만과 김구를 소환할 이유도 없고 건국절 논란에 휩싸일 필요도 없다. 왜 상대 주장이 말이 안되고 위험한지를 침 튀겨 반박하면 되는 것이다. ‘범법자 독립운동가 후손보다 김형석이 낫다’고 말하면 된다. ‘독립기념관장에 꼭 국수 민족주의자가 앉아야 하는가’고 반문하면 된다.
한동훈은 싸우지 않았다. 그가 이념과 가치문제로 싸운 주제가 무엇인지 떠오르는 게 없다. 왜 그럴까. 한 대표는 이재명 문제를 놓고는 잘 싸운다. 그 때마다 법치를 말하고 관심도 많은 듯하다. 그가 보수와 이념을 주제로 싸우지 않는 것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 짐작한다. 그러면 정치를 뭣하러 하나. 정치는 이념인데. 민생이 중요하다? ‘빵’을 잘 만들 이념을 만드는 것이 정치인데 한 대표는 혹시 직업을 잘못 택한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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