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라토도 카르보나라도 없는 이탈리아 여행기 [박찬일의 ‘칼과 책’]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외 옮김
민음사 펴냄
괴테에다 이탈리아가 붙었으니 인기가 높을 수밖에 없다. 시중의 몇 권을 보니 수십 쇄를 찍었다. 우리 집에 괴테 작품으로는 〈파우스트〉와 이 책이 있는데 둘 다 앞쪽만 갈색으로 색이 바랬고, 페이지 끝이 말려 올라가 귀가 생겼다. 시도는 여러 번, 끝까지 못 갔다는 증거다. 〈성문종합영어〉와 비슷하다. ‘명사’ 편은 빠삭했던 내 또래의 수많은 친구들처럼. 아, 〈수학의 정석〉도 ‘집합’ 편은 아주 잘 기억할 거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폰(von) 붙으면 귀족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에선 흔히 ‘di’나 ‘de’가 붙으면 귀족이라는 것과 같다. ‘의’라거나 ‘~로부터’라고 하는 뜻. 씨족의 분명한 근거가 있으니 뼈 있는 가문이다. 우리들의 상당수가 성씨가 없었던 개똥이 아범의 후손이라는 걸 생각하면 저 ‘폰’의 강력함이 이해가 된다. 괴테는 금수저였고, 그렇게 교육 잘 받고 자라 벼슬이나 하면 될 것을 팔자가 그렇지 못했다. 글이라는 연옥 속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위대한 괴테의 탄생이다.
하여튼 괴테 생가에 가면 상수도 뽑아 올리는 펌프인지 밸브가 부엌에 있다. 물동이 이고 다니던 1700년대에 물이 부엌에 펑펑 들어왔다는 건 보통 부자가 아니란 얘기다. 에두아르드 푹스의 〈풍속의 역사〉 같은 책에서 일찍이 우리가 읽었지만, 유럽의 상하수도 사정은 저 무렵에는 엉망이어서 도로에 요강으로 대소변과 구정물을 버리던 때다. 괴테는 종종 이 책에서 깨끗한 도시 풍경에 매료되곤 하는데 대개 이런 식이다. “빗자루로 쓰레기를 잘 치워서 귀족들이 기다란 옷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다녀도 문제없이 길이 깨끗하다….”
하여튼 괴테는 상수도도 나오고, 대부분의 평민들이 단칸방에서 달랑 냄비 한 개로 끓여먹고 살던 시대에 바우하우스 못지않은 부엌 가구까지 갖추고 살던 부잣집 아드님이었다. 게다가 이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 유명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전 유럽에 대박을 친 상태였다.
〈이탈리아 기행〉이 한국에서 그토록 많이 팔렸지만 앞쪽만 새카맣게 된 결정적 이유가 있다. 실망스럽게도 음식 얘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아닐까. 이탈리아 여행기인데 젤라토도 카르보나라도 나오지 않는다니. 그의 기행 시기인 18세기 후반은 이탈리아가 포크를 쓰고 파스타를 먹던 때였다. 여전히 많은 유럽 나라에서 손과 숟가락으로 식사하던 때에 부자 도시가 즐비한 이탈리아는 우아하게 칼과 포크, 숟가락을 쓰는 사람들이 흔했다. 미식이 상당했을 텐데 묘사가 전무하다시피 하다.
1786년, 괴테는 마차로 독일을 출발하여 알프스를 넘는다. 인스브루크를 지나 볼차노에 접어든다. 볼차노는 알프스다. 아직도 내게 “이탈리아 여행 가는데 어디 가서 뭐 먹어? 식당 몇 개 콕콕 집어줘” 하는 친구들이 있다. 나도 모른다. 내가 이탈리아에 있던 시기는 오래전이다. 안정환이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이탈리아를 무너뜨리는 헤더골을 넣던 그 무렵, 나는 이탈리아 생활을 끝냈다. 하지만 “이탈리아 어디가 좋아?” 하면 꼭 대답해준다. 로마·피렌체·나폴리·밀라노·베네치아 같은 메이저 여행 도시를 가기 싫거나 이미 가봤다면? 그럼 다음으로 꼽는 곳이 볼차노다.
많은 한국인이 스위스와 프랑스의 알프스를 좋아한다. 음식도 맛없고, 숙소도 비싸며 추운 그 도시에 가서 바가지를 쓴다. 좋다면 오케이다. 하지만 알프스를 보러 가는데 굳이 스위스, 프랑스에 가서 바가지를 쓸 필요가 없다. 볼차노도 알프스이기 때문이다. 알프스는 유럽의 여러 나라를 아우르는 산맥이다. 지리산이 전라도·경상도를 다 끼고 있고, 어디로 올라가든 다 매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탈리아 알프스에 가라면 사람들은 이런다. “이태리에도 알프스가 있어?” 있어요, 있다고요. 괴테도 갔다고요. 볼차노와 트렌토로 내려온 괴테의 경로를 따라가 보면 이탈리아 메이저 관광도시에서 경험하지 못할 다채로움이 있다.
괴테가 한탄한 볼차노의 영양부족
그 무렵, 빈부격차가 심했던 이탈리아 북부 사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괴테는 볼차노를 지나며 현지인들이 “용모가 곤궁함을 암시해주었고 아이들이 가련… (중략) 병약한 이유가 터키산 옥수수와 메밀을 즐겨 먹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누런 옥수수와 검은 메밀을 빻은 뒤 죽을 만들어 먹는다….” 더구나 일년 내내 고기도 먹지 못한다고 그는 한탄한다. 괴테는 그들의 영양부족을 간파했는데, 오랫동안 이 지역과 베로나, 그 밖 산악지역의 이탈리아인들은 옥수수로 연명했다. 옥수수는 별미로 친다. 특히 괴테가 옥수수 먹는 사람들을 목격한 지역에서 여전히 옥수수를 많이 먹는다. 그들이 먹는 옥수수죽이 바로 폴렌타(polenta)다. 밀라노의 명물 음식 중에 치즈를 넣은 폴렌타가 있다. 별미라면 얼마든지 좋은 것이다. 괴테는 북부의 주요 도시들, 그러니까 베로나와 비첸차, 베네치아를 방문한다.
비첸차는 한국인들이 거의 가지 않는 도시이지만 괴테 시대에는 중요한 도시였던 것 같다. 내가 이 도시에 들른 것은 1999년 가을이었다. 시칠리아 식당에서 수련하던 나는 몹시 아팠다. 원인을 모르는 병이었다. 체중이 십수 킬로그램이나 빠졌다. 공황에 빠져서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한국행 비행기도 바로 구하지 못했다. 매일 자해 충동에 시달릴 때 비첸차에 구원자가 있었다. 요리학교 동기인 계세언 형이었다. 나보다 한 살 많았지만, 언제나 큰형처럼 든든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어찌어찌 연락했다. 나 좀 살려달라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시칠리아-밀라노를 거쳐 그가 일하는 시골 식당에 도착하니 깊은 밤이었다. 불 꺼진 식당 앞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세언이 형, 세언이 형!”
그는 나를 위해 숨겨둔 리조토를 가지고 왔다. “쌀밥이 그리웠지? 이걸 먹고 우선 잠을 자둬.” 식당의 일꾼들이 자는 1인용 침대가 그의 숙소였는데, 기꺼이 그 방을 내주고 그는 어느 헛간으로 갔다. 호탕한 식당 주인은 다음 날 내게 환대를 베풀었다. 지역의 특미라고, 폴렌타를 주었다. 옥수수죽 폴렌타가 꽤 맛있다는 건 그때 알았다. 물론 괴테 시절 폴렌타에는 파르미지아노 치즈도, 육수도 넣지 않고 맹물에 소금만 뿌린 것이었을 테지만.
계세언 형은 지금도 서울 성북구에서 혼자 요리하고 손님 맞는 식당을 한다. 온갖 엉터리 이탈리아식이 판치는 시대에도 그는 ‘진짜’ 이탈리아식 파스타만 만든다. 그래서 손님이 많은 것 같지 않다. 식당 이름이 ‘아 삐에디(A Piedi)’인데, ‘걸어서’라는 뜻이다. 그의 요리 철학과 딱 들어맞는다. 내가 살아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그 형 덕이다. 한 숟갈의 리조토와 폴렌타와 함께.
(다음 화에 계속)
박찬일 (셰프)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