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8일!] 5차례 죽을 고비 넘긴 정치거목… 평화의 빛 지다

김유림 기자 2024. 8. 18. 07:1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역사 속 오늘] 김대중 전 대통령 사망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향년 85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사진은 영화 '길위에 김대중' 스틸컷. /사진=명필름 제공
2009년 8월18일.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을 역임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향년 85세.

민주화 투쟁과 통일운동에 평생을 바친 김 전 대통령은 4차례 대선 출마와 6선 국회의원 등 현실정치인의 길을 걸으면서 해방 후 첫 수평적 정권교체와 남북정상회담, 노벨평화상 수상 등을 이뤄낸 정치적 거물이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오전 1시35분쯤 심정지 증상을 보여 의료진이 긴급 투입, 심폐소생술을 진행했으나 생을 마감했다. 사인은 '폐렴으로 인한 다발성장기부전'이었다.

'아시아의 만델라'로 불리는 김 전 대통령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30세 때 정치에 도전, 3차례 연거푸 낙선했으나 좌절하지 않았던 그는 1961년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김 전 대통령은 40대 기수론을 제창하며 단숨에 야당의 대권후보로 떠올랐다. 부정선거 시비 끝에 박정희 후보에게 밀린 그는 의문의 교통사고와 도쿄 납치사건으로 연이어 죽음의 고비를 맞았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구사일생으로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다시 돌아온 그는 6월 항쟁을 치르며 2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지만 실패했고 이어 3번째 대권 도전은 김영삼 후보에 밀려 좌절됐다.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지만 다시 돌아온 김 전 대통령은 마지막 도전 끝에 이회창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후보를 누르고 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 실현


김 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한마디로 고난과 역경을 견뎌낸 인동초의 삶이었다. 사진은 영화 '길위에 김대중' 스틸컷. /사진=명필름 제공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반세기만에 처음으로 선거를 통해 여야간 정권교체가 이뤄졌다는 데서 큰 의미를 가진다. 15대 대선은 여당인 한나라당에서 이회창, 제1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서 김대중, 제2야당인 국민신당에서 이인제 후보가 경쟁한 3자 구도였다.

김 후보가 승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김종필·박태준과의 연합과 TV정책토론이었다. 역대 대선에서 집권세력과 보수 언론매체로부터 용공과 과격성 음해로 타격을 입어온 김 후보가 여러 차례에 걸친 TV토론을 통해 자신의 진면목을 국민에게 보여준 것이 승리의 요인이었다. 1997년 12월18일 김 후보는 득표수 1032만6275표(40.3%)로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우리 역사 최초로 여야 간의 평화적이며 수평적인 정권교체가 이뤄진 셈이다. 또 민주주의 국가 완성이라는 김 대통령의 오랜 꿈이 실현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39만표 차이로 승리한 김 대통령은 당선이 확정된 순간 첫 소감에서 "50년 헌정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이룬 저력으로 국민 모두의 힘을 모아 경제위기 국난을 극복해 나가는 데 온 힘을 다하겠다"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새정부의 청사진으로 제시했다.

대선에서 승리한 김 대통령은 '당선자' 자격으로 IMF 국난극복에 발벗고 나섰다.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김 대통령은 준비된 역량을 총동원하고 금 모으기 운동 등 국민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 6·25 이후 최대 경제위기를 조기에 극복했다. 사진은 영화 '길위에 김대중' 스틸컷. /사진=명필름 제공
1997년 IMF 외환위기는 우리나라 경제뿐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거의 전 분야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일대사건이었다.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김 대통령은 IMF(국제통화기금)의 요구를 전면수용하고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금융·기업·공공·노동 부문 등에서 4대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정부는 총 200조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조성해 부실화된 은행에 투입했고 일부 은행과 종합금융사를 퇴출시켰다.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로 대표되던 5대 시중은행은 합병이나 해외 매각의 길을 걸었다. 기업들도 부채비율을 낮추고 직원을 해고하는 등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감행했다. 상당수 기업이 채권은행들의 관리 하에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갔고 자산 매각, 구조조정 등을 추진했다.

4대 그룹 중 하나였던 대우그룹도 해체돼 채권은행들이 관리했다. 공기업 개혁으로 포스코, 한국전력, 한국통신(KT) 등이 민영화됐고 노동부문에서는 정리해고가 허용됐다.

1998년 12월 IMF 긴급 보관 금융에 18억달러를 상환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은 금융 위기로부터 서서히 빠져나갔다. 2000년 12월4일 김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의 모든 차관을 상환했다"며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공식 발표했다.

외환 위기로 39억달러까지 떨어졌던 대한민국의 외환보유액은 이듬해인 1998년 말 520억달러로 증가했고 2001년 말에는 1028억달러로 1000억달러선을 돌파했다. 2001년 8월23일에는 IMF 구제금융 195억달러를 조기 상환해 IMF 관리체제에서 졸업했다.


'역사상 처음' 남북 첫 정상회담… 햇볕정책과 노벨평화상 수상


김 대통령은 남북화해 및 교류 확대 등 남북관계 발전과 한반도 긴장 완화에 물꼬를 텄다. 사진은 영화 '다시 김대중 함께합시다' 스틸컷. /사진=블루필름웍스 제공
김 대통령은 평생 남북통일 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았고 남북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직접 발벗고 나섰다. 특히 대통령 취임 직후 대북 포용정책인 이른바 '햇볕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그 결과 분단 55년 만인 2000년 6월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났고 역사적인 6·15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에 해방 이후 처음으로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해 12월 김 대통령은 한국인 최초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다. 아시아의 민주화와 인권을 신장시키고 남북화해정책을 펼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김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남북문제를 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참여정부시절 대북 송금 특검으로 측근인 박지원 민주당 의원이 구속되고 자신의 성과가 폄훼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도 햇볕정책을 설파하며 남북문제 해결에 적극 나섰다. 그는 아태평화재단(전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을 확대발전시킨 김대중평화센터를 통해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와의 면담과 서신 교환, 중국 지도부 면담 등을 추진하며 남북 화해 협력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한국 현대사의 거목, 영원히 기억되길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향년 8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사진은 지난 2014년 8월18일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 서거5주기 추모행사 참석자들이 김 전 대통령의 육성 영상을 지켜보는 모습. /사진=뉴스1
당선 직후 김 대통령은 권위주의적 지도자에 익숙한 국민에게 친근한 대통령이라는 인상을 심기 위해 애썼다. 1998년 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가진 첫 정례보고에서 각하라는 호칭을 쓰지 말라고 당부했다. 또 동사무소와 파출소 등 일선 행정조직 사무실에 걸려있는 대통령 사진도 걸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는 1년에 두차례 정도 TV를 통해 국민과의 대화에 나섰다. 이전 정권에서는 연두 기자회견을 제외하고는 국민이 대통령의 생각을 직접 듣는 일이 없었다. 따라서 대통령과 국민이 만나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와 살해 위협, 투옥과 망명 등 파란만장한 정치생활을 거치며 한국 현대사의 거목으로 우뚝 선 '정치인 김대중'의 발자취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김유림 기자 cocory0989@mt.co.kr

Copyright © 머니S & moneys.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