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임신중지는 엄중 처벌?...브이로그가 쏘아 올린 '낙태 범죄화' 논란
의료계 "태아 독자 생존 가능한 시점"
여성계는 처벌 위주 접근에 "반대"
"의료 접근성 고민해야 하는 사례"
이른바 '36주 낙태 브이로그(일상 영상)'의 진위가 경찰 수사로 확인된 가운데, 태아가 독자적으로 생존 가능한 임신 후기에 임신 중단이 이뤄짐에 따라 해당 여성과 수술을 집행한 의사를 엄중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선 처벌 관점에서만 접근할 게 아니라,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한 의료체계 개선을 서두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18일 보건복지부 및 경찰, 의료계 등에 따르면 경찰이 36주 낙태 브이로그 사건 수사에 착수하게 된 것은 이 사건의 임신 중절 수술이 일반적으로 임신 초기에 행해지는 방식과 달리, 출산 후 아기를 사망케 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보건복지부는 12일 브이로그를 유튜브에 올린 20대 여성 A씨와 수술을 집도한 의사 B씨를 살인 혐의로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의료계 "살인이나 다름없어...엄중 처벌"
이후 의료계에서는 A씨의 임신 주수에 주목해 임신 중지 행위를 엄중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 잇달아 나왔다. 의료윤리연구회는 13일 성명서를 통해 "의학적으로 '임신 36주' 태아는 당장 태어나도 독자 생존에 별 문제가 없을 시기"라면서 "독립적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이름 모를 태아의 생명을 앗아간 행위는 분명 의학적 범주에서는 '살인'이라고 규정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장도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천인공노할 일"이라며 "사법처리 단계에서 엄벌을 탄원하겠다"고 강조했다.
A씨의 태아가 사망하게 된 구체적 경위는 수사 중이나, 의사 B씨는 최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수술 당시 산모로부터 아이를 꺼냈을 때 이미 사산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처럼 임신 후기에 이뤄지는 임신 중절 수술의 경우, 임신부의 건강을 위협하지 않는 동시에 태아만 사산하게 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쉽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심상덕 진오비 산부인과 원장은 "36주면 자연분만이든 제왕절개든 특별한 의학적 조치가 없어도 태어난 아기가 충분히 생존이 가능하다"면서 "이 때문에 임신 후기로 갈수록 태아의 사산을 유도하는 것이 임신부에게는 더 위험하다"고 설명했다.
"안전한 임신 중지 접근권부터 고민해야"
한편 여성계는 이 사건을 처벌 중심 관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29개 단체가 모인 '모두의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안전한 임신 중지 네트워크)는 13일 공동성명서를 내고 "지금 우리 사회가 보다 중요하게 질문해야 할 것은 살인죄의 성립 여부가 아니라, 왜 낙태죄 폐지 이후에도 이전과 다름없이 이처럼 늦은 시기에 임신 중지가 진행됐는지, 임신 36주 차가 돼서야 임신 중지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이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번 사례와 같은 후기 임신 중지는 낙태죄가 존재하거나 처벌 기준을 아무리 엄격하게 해도 일어나는 일로, 해당 여성과 병원을 처벌한다고 해서 다시 벌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김정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이번 사건은 임신 중지와 관련한 의료 서비스와 정보 접근성을 향상하기 위한 정책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임신 주수에 근거해 중기나 후기에 이뤄지는 임신 중지 행위를 처벌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음성적이고 안전하지 않은 수술이 이뤄져 여성의 건강권이 더 위협 받을 수 있다는 점도 거론됐다. 안전한 임신 중지 네트워크는 "보건의료 접근성이 낮고 사회경제적 여건이 취약한 경우에는 초기에 임신 중지를 하지 못하고 시기만 지연되는 상황을 더 많이 겪게 된다"면서 "의료기관의 거부, 과도한 비용 청구, 제3자의 개입, 폭력적 상황 등 다양한 요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고 지적했다. 이어 "부득이하게 후기 임신 중지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기에 임신 중 어느 시기에라도 당사자가 필요한 정보와 상담, 의료 기관 및 지원 체계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여성계는 보건복지부가 하루빨리 안전한 임신 중지를 위한 의료체계와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 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대표는 "낙태죄 비범죄화 이후 관련 법률 개정안을 마련해야 하는 국회와 보건복지부의 역할은 구분돼야 한다"면서 "보건복지부는 임신 중지가 필요한 여성들이 정확한 의료 정보를 기반으로 빠른 시기에 병원을 찾아가고 건강보험도 적용받을 수 있는 방안과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야 이번 사건처럼 임신 후기까지 임신 중지를 하지 못하는 사례를 방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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