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비사⑥] 김일성 '심장 수술'…프랑스가 두 차례 집도
北, 스위스 의료진 접촉했지만 무산
주제네바 북한대표부가 관련 임무 수행
외교부는 매년 30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일반에게 공개합니다. 공개된 전문에는 치열하고 긴박한 외교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전문을 한 장씩 넘겨 읽다 보면 당시의 상황이 생생히 펼쳐집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이어 붙이면 영화가 되듯이 말이죠. <더팩트>는 외교부가 공개한 '그날의 이야기'를 매주 재구성해 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외교비사(外交秘史)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감춰져 있었을까요? <편집자 주>
[더팩트ㅣ김정수 기자] 1991년 3월 '김일성 건강 위독설'이 제기되자 노태우 정부는 외교부를 활용해 진상 파악에 나섰다. 외교부는 재외공관을 중심으로 정보망을 구축, 각종 첩보를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스위스 의료진이 김일성 수술을 위해 방북하려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에 노태우 정부는 '김일성의 건강에 실제로 문제가 있다'는 확신을 가졌고, 풍문에 불과해 보이는 사소한 정보라도 진의를 파악해 보라고 지시했다. 각종 보고가 올라간 끝에 김일성이 프랑스 의료진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심장 수술을 받은 사실이 전해졌다.
1991년 3월 18일 외교부 장관은 각국 재외공관에 '스위스 의료진이 김일성 수술을 위해 방북하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언론 보도를 송부했다.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김일성이 심장 쪽에 문제가 생겨 스위스 측과 접촉했다는 내용의 보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가장 먼저 내막을 파악한 재외공관은 주제네바 대사관이었다. 대사관 측은 외교부 장관에게 "제네바 주립병원 심장외과팀이 김일성을 수술하기 위해 3월 15일 평양에 가고자 했지만, 당국의 저지로 출국하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주제네바 대사관이 입수한 정보를 종합하면, 북한은 3월 14일경 제네바 주립병원 측에 김일성 수술을 요청했다. 의료진은 이를 승낙, 북한으로 떠날 채비를 마쳤지만 스위스 당국에 가로막혔다. 현지 법령에 따르면 공공의료기관에 고용된 자는 타인을 치료할 목적으로 외국에 갈 수 없었다. 또한 공공 치료가 아닌 사적 치료는 병원 내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만 행해져야 했다. 실제로 의료진들은 주무관청으로부터 "방북한다면 법적 제재를 취할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고 한다.
북한은 이같은 사실이 곳곳에 알려지자 양국 간 기술협력을 위한 것이었다고 둘러댔다. 당시 주제네바 북한대표부의 한창언 부대표는 김일성 건강 위독설은 근거 없는 소문이라며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스위스 의료진의 방북은 북한 의사들과의 기술협력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북한 측은 이후 스위스 법무국장과의 면담에서 "김일성을 치료하는 건 스위스만이 아니다"라며 유감을 표했다고 한다. 우리 정부는 북한 측 발언을 통해 김일성의 건강에 실제로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각국 재외공관에서는 김일성 건강과 관련된 정보들을 수시로 보고하기 시작했다. 주소련 대사관은 김일성이 매년 동독, 불란서(프랑스), 루마니아 등에서 의사를 초빙해 정기 진찰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소련 의료진이 1987년 방북해 김일성의 건강 상태를 체크했다고 설명했다. 주일본 대사관은 동경(도쿄)대학교, 게이오대학교 출신 의사 2~3명이 3월 중순경 김일성의 피부암을 치료하기 위해 방북했다고 전했다. 3월 중순은 앞서 스위스 의료진이 방북을 준비하던 때로 정부에서는 해당 첩보의 신빙성이 높다고 봤다.
외교부 장관은 이를 비롯해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계 의료팀이 4월 초 방북 예정이라는 언론 보도를 각국 재외공관에 보내며 사실 관계 파악을 지시했다. 당시 조총련은 북한을 자유롭게 왕래했던 단체로 노태우 정부가 일본과의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체결에 실패하자 대북 정보 수집 창구로 활용하려던 곳이었다. 그만큼 조총련계 의료팀의 방북 가능성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사안이었던 셈이다.
김일성 건강 위독설은 후계 문제와 연결돼 보고되기도 했다. 1991년 4월 28일 주북경대표부(주중국 대사관)는 "주중 미국대사관 측에 따르면 불가리아 주재 북한 대사 김평일이 곧 귀국할 것이란 정보가 있다고 한다"고 밝혔다. 김평일은 김일성과 두 번째 아내 김성애 사이에 태어난 인물로, 김일성의 전처 김정숙의 아들 김정일과 후계 구도에 언급되던 이다.
주북경대표부는 "김평일의 귀국은 김일성의 건강 악화 및 후계 문제와 관련해 부친 가까이에 있으라는 모친의 권유에 따른 것 같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주독일 대사관에서도 '믿을 만한 중국 측 소식통'을 인용, 김일성이 건강상 이유로 곧 김정일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할 것이란 이야기가 있다고 보고했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김일성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확신한 듯 보이는데, 이는 주소련 대사관의 보고가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앞서 주소련 대사관은 현지 관계자를 통해 예브게니 차조프가 북한을 방문, 김일성을 진료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고 보고했다.
예브게니 차조프는 소련 보사부(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하고 레오니트 브레주네프 공산당 서기장의 주치의를 지낸 심장 전문의다. 그는 소련 및 공산권 고위 지도자의 건강을 관리하는 제4총국장 자리를 23년간 지킨 자로서, 소련 체제 지속의 한 축을 담당한 거물급 인물이었다. 주소련 대사관은 그가 김일성을 진료한 이후 "심장질환, 동맥 경화, 폐질환을 갖고 있으며 노령으로 인해 증세들이 악화하고 있다"며 "약 반년 이래로 급격히 증세가 악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고 한다.
갖가지 정보와 추측이 난무했던 김일성 위독설은 1991년 7월 6일 언론 보도를 통해 그 전말이 드러났다. 당시 국내 언론은 프랑스 리옹대학교 심장외과 비슈롱 박사가 주제네바 북한대표부 요청으로 지난 3월 말 방북, 김일성의 심장에 '심장 박동 보조기'를 삽입했다고 보도했다. 3월은 앞서 스위스 의료진이 방북에 실패한 때로 북한은 프랑스 의료진과 접촉하는 방법을 강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의 심장을 수술했다던 비슈롱 박사는 "심장 수술을 받았던 사람은 4명이었다"며 "그 중 한 사람이 김일성인지는 모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북한 측에서 보안을 이유로 수술팀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행했던 전략이거나, 비슈롱 박사가 비밀 유지 조항에 따라 구체적인 내용을 말하길 꺼린 것으로 추측된다.
김일성은 이전에도 해당 대학 의료진으로부터 치료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해 7월 10일 국내 언론은 프랑스 리옹대학교 부속 심장병원의 샨샤르 교수가 지난해 9월 방북, 또 다른 심장 수술을 했다고 밝혔다. 당시 샨샤르 교수는 김일성 심장 주변에 있는 양성 종양을 제거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정확한 병명 등 그 밖의 사안은 직무와 관련된 비밀이라 밝히기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대신 샨샤르 교수는 "주제네바 북한대표부가 관련 자료를 가지고 있으니 문의해 보는 게 좋을 것"이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앞서 심장 박동 보조기 삽입 수술처럼 김일성을 치료할 해외 의료진 접촉은 주제네바 북한대표부에서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건강 문제에 대한 외교 전문은 이를 끝으로 더 이상 생산되지 않았다. 보도에 대한 진상 파악 등 추가 지시가 없었던 점을 미뤄보면 해당 보도는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이처럼 1990년 9월과 1991년 3월 심장 수술을 통해 생명 연장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지만, 그로부터 약 3년 뒤인 1994년 7월 7일 결국 사망하게 된다.
js8814@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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