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 허상… 전쟁 후 일본의 '일그러진 내면' [전쟁과 문학]

이정현 평론가 2024. 8. 17.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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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31편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
종전 후 두 작가의 서로 다른 후유증
디자이 오사무 허무주의에 빠져
미시마 유키오 허상에 매달려
자신의 생 스스로 마감한 두 작가
전후 일본의 내면 상징하는 사건
우리가 가져야 할 역사적 관점

다자이 오사무와 미시마 유키오. 일본을 대표하는 두 작가는 모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다자이 오사무는 전후戰後 일본의 역사를 외면하고 '허무주의'에 빠졌고, 그런 그를 정면으로 꼬집은 미시마 유키오는 허상에 매달렸다. 모두 전후 일본의 일그러진 내면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우린 냉엄한 역사 앞에서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까.

전쟁은 많은 후유증을 남긴다. 일본도 그랬다. [사진=뉴시스]

"부끄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저로서는 인간의 삶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일본 전후문학을 상징하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1909~1948년)의 소설 「인간 실격(1948년)」의 유명한 첫 문장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이 소설을 문예지에 3회에 걸쳐 발표했는데 1부가 게재된 후 자신의 정부情婦와 함께 자살했다. 2부와 3부는 그의 유작이 됐다. 소설의 주인공 '요조'는 세상 사람들의 가식과 위선에 극도로 혐오감을 지닌 청년이다.

요조는 '익살'이라는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대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상처를 받는다. 군국주의에 억눌린 1940년대 일본 사회에서 요조와 같은 개인주의자들은 설 곳이 없었다. 요조는 다자이 오사무의 비극적인 삶과 허무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 동북부 쓰시마 가문의 부유한 집안에서 열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중의원까지 지낸 아버지는 늘 바빴고, 어머니가 10명이 넘는 아이들을 모두 키울 수 없었기에 다자이는 유모의 손에 자랐다.

다자이는 학창시절 줄곧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명석한 아들이 법학이나 정치학을 공부하길 원했지만 프랑스 문학을 동경한 다자이는 도쿄대 불문학과에 진학했다. 다자이는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쌓은 집안을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그는 대학시절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사상 공부 모임을 주도할 정도로 적극적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사상을 실천으로 옮기는 지식인은 되지 못했다. 동생의 소식을 듣고 분노한 첫째 형이 모든 금전적인 지원을 끊겠다고 선언하자 다자이는 마르크스주의 모임을 접었다.

자신의 나약함을 자각하고 실의에 빠진 다자이는 소설 쓰기에 몰두했다. 개인주의 색채가 짙은 다자이의 소설은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으나 일본 최고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은 받지 못했다. 심사위원들은 그의 소설 전반에 깔린 허무와 절망을 문제 삼았다. 다자이는 심사위원들에게 이를 갈면서도 한편으로는 상을 받아서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기를 갈망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전쟁에 앞장섰던 자들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떠들어대는 현실을 보면서 다자이는 더욱 세상을 혐오했다. 아쿠타가와상 수상 실패, 전후 일본 기득권들의 뻔뻔함을 겪으면서 다자이는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탕진'하기 시작했다.

타락한 세상에 맞서 타락한 방식으로 저항한다는 다자이의 방식은 점차 도를 넘어섰다. 급기야 주변인들이 결핵 치료를 핑계로 다자이를 한달 넘게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정신병원에서 한달을 보낸 후 다자이는 "나는 인간으로서 가치를 상실했다"고 말할 정도로 깊은 충격을 받았다. 이 경험은 「인간 실격」에도 묘사됐다. 1938년, 다자이는 고교 교사인 이시하라 미치코와 결혼했으나 두 사람의 행복은 길지 않았다.

다자이는 심각한 알코올 의존증을 앓았고, 계속 불륜 행각을 벌였다. 「사양(1947년)」으로 베스트셀러 작가에 오른 다자이는 다음 해 「인간 실격」을 발표한 후 정부 도미에와 함께 자살했다. 그의 죽음은 전후 일본의 가치관 전복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지금까지 자주 거론된다.

당시 다자이 오사무의 행태와 죽음을 보면서 치를 떨던 한 작가가 있었다. 그는 미시마 유키오다. 미시마 유키오는 다자이의 방탕한 생활을 두고 '나약한 정신'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다자이를 향해 "냉수 목욕이나 맨손 체조 같은 규칙적인 운동만으로 충분히 치유될 질병을 이기지 못한 자에 불과하다"고 일갈했다.

미시마 유키오도 다자이 오사무와 마찬가지로 조상 대대로 부와 권력을 누리던 집안의 후손이었다. 미시마는 어릴 때부터 왜소하고 병약했다. 전쟁 막바지에 미시마는 징병 통지서를 받았으나 오진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그후 미시마는 도쿄대 법학부에 입학해 관료로서 도약할 기회를 잡았다. 그러나 법학보다 문학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고등문관시험에 통과했으나 1949년 발표한 소설 「가면의 고백」이 성공하자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소설 「금각사(1956년)」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미시마는 노벨문학상 후보로 자주 거론됐다. 작가로서는 성공했으나 미시마 유키오는 심한 결핍감과 열등감을 안고 있었다. 병역 면제, 성적 정체성, 나약한 신체 탓이었다.

선배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방탕한 생활과 개인성을 강조한 소설을 읽으면서 미시마는 기이한 불쾌감을 느꼈다. 아마도 자신의 치부를 타인이 들춰내는 것과 비슷한 심리를 느꼈을 것이다. 미시마는 그것을 부정하면서 육체를 단련했다.

미시마는 천황을 섬기는 무사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 그리고 사비를 털어 천황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우익 대학생들과 실업자들을 모아 '방패회'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 해군 제복을 입고, 군국주의를 신봉하는 일본 장교들이 일으킨 2·26 사건을 조명한 영화도 제작했다. 일본 사람들은 노벨문학상 후보로 오르내리는 천재작가의 시대착오적이고 우스꽝스러운 기행에 조롱과 야유를 퍼부었다.

미시마 유키오의 행보는 소심한 청년이 천황을 신봉하는 우익 집회에 참가해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 오에 겐자부로의 우익 풍자소설 「세븐틴」의 주인공과 흡사했다. 당시 일본 사회는 베트남전 반전 시위와 오키나와 반납 문제로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일본 대학생들은 반전과 평화를 외치면서 연일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1969년, 미시마는 도쿄대 강당에서 900여명의 학생들과 벌인 난상토론에서 천황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발언을 거듭했다.

이듬해 미시마는 '방패회' 멤버들을 이끌고 일본 자위대 본관에 난입해 자위대 총감을 결박하고, 자위대의 궐기를 주장하면서 공개적으로 할복했다. 천재로 칭송받았던 작가의 충격적인 죽음이었다.

일본이 패전한 직후의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사람들은 1948년과 1970년에 벌어진 두 사람의 자살을 완전히 상반된 죽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자살은 그리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의 자살은 전후 일본을 상징하는 강렬한 이미지다.

다자이 오사무는 전후의 현실에 회의를 품으며 스스로 망가지는 타락으로 대응했다. 반면 미시마 유키오는 전후의 혼란 속에서 시대착오적인 군국주의와 천황주의를 신봉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다.

두 사람의 죽음은 자신의 나약한 내면을 감추려 한 극단적인 선택이라는 점에서 비슷했다. 다자이는 과거(역사)를 외면하고 개인의 삶에만 몰두했다. 그를 비판하던 미시마는 이미 몰락한 허상에 자신을 이입해 자긍심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토록 다르면서도 비슷했던 두 사람의 죽음은 전후 일본의 일그러진 내면을 상징하는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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