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36주 낙태’ 비극의 책임은 국회와 정부에 있다 [배정원의 핫한 시대]
여성 권리와 생명윤리 고려한 임신중지법 제정 시급
(시사저널=배정원 세종대 겸임교수 (보건학 박사))
지난 6월,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우리나라의 한 젊은 여성이 임신 36주의 낙태수술 경험을 유튜브 영상으로 만들어 올린 것이다. 36주면 아기가 엄마의 배 속에서 나온다 해도 약간의 보살핌만 있으면 살 수 있는 임신 후기이기 때문에,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살인이라 할 만한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 사건은 생명윤리 문제와 함께 현재 우리나라의 이도저도 아닌 '임신중지법'에 대해 심각하게 경종을 울렸다. 보건복지부는 경찰에 그 여성과 수술을 한 의사를 살인죄로 신고하면서 수사를 의뢰했다.
2019년 헌법재판소에서는 낙태법을 헌법불일치로 판결하고 그에 적절한 입법과 정책을 마련할 것을 국회와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5년이 되어가는 2024년 현재 정부와 국회가 이와 관련해 한 일은 거의 없다. 낙태법이 폐지된 지 4년이 지났어도 임신중지를 한 당사자와 의사가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달라진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정치인들, 논쟁의 소지 탓에 문제 회피해
앞서 소개한 유튜브 영상은 경찰 수사 결과 사실임이 밝혀졌다. 해당 여성과 임신중지수술을 해준 병원 및 의사를 찾아낸 것이다. 헌법재판소에서 낙태법에 대해 헌법불일치 판정을 내린 후라 임신중지를 위법으로 처벌할 수는 없으니 그 태아가 세상에 나왔을 당시 살아있었느냐 아니냐가 범죄 여부를 판가름할 것이라고 한다.
임신중지가 허락된 다른 나라에서도 대체로 22주나 24주를 수술 가능 기한으로 정해 놓는데, 우리나라는 현재 이에 대한 어떤 가이드라인도 없다. 낙태법 위헌 판정이 난 후에도 아무런 손을 대지 않은 '모자보건법'(모자보건법은 이름도 바꿔야 한다)에 의하면 24주 이후의 임신중지는 불법이다. 그러나 헌재의 결정 후 모자보건법도 강제력은 없다.
이번 사건이 터지자 보건복지부가 그렇게 재빠르게 임신중지 당사자 여성과 수술한 의사를 살인죄로 수사해 달라고 조치를 취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그렇게 빠르게 뭔가를 할 수 있으면서 이제까지는 왜 손을 놓고 있었을까. 지금 이런 비극적 사건을 앞에 두고 가장 크게 책임을 통감하고 깊이 반성해야 할 곳은 다름 아닌 국회와 보건복지부다.
그동안 많은 여성이 임신중지를 위해 언제, 어느 병원을 가야 하는지,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지자체나 국가의 도움 없이 개인적으로 찾아 헤매야 했다. 또 세계 여러 나라가 이미 사용하고 있고 안전성이 입증된 임신중지약(유럽의 경우 임신중지약 사용률이 90%가 넘는다) 도입조차, 한 제약회사가 수입허가를 해달라고 수년간 자료를 제출하며 식약처의 문을 두드렸음에도 높은 벽에 가로막혀 결국 수입을 포기하도록 한 것도 정부였다.
정치 쟁점화에만 정신이 팔린 국회도 한심하지만, 정부가 국민의 절반인 여성의 건강권을 무시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한국 사회에 뿌리 박힌 듯 여전히 남아있는 가부장적 사회구조에서 여성의 재생산권과 신체자율성이 온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권리보다 전통적인 가치관이 더 우선시되는 것이다. 이는 낙태법에서 법의 처벌 대상은 임신과 임신중지의 결정에 관여했을 남성의 역할을 배제하고 묵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임신은 여전히 여성의 일인 것이다.
또 여성의 권리가 정치적인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고 있어서다. 정부와 국회의 주요 권력자들은 대개 중년 이상 남성들이며, 그들은 여성의 경험과 요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임신중지에 대한 실제 당사자들인 여성들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여성의 경험과 필요에 대한 요구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주변화되는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한국 사회에는 성과 재생산 건강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를 꺼리는 분위기가 여전히 있다. 이런 태도가 관련 정책을 마련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에 더해 낙태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여전히 강해서, 여성들이 필요한 도움을 요청하거나 정보를 얻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보수적인 종교단체의 정치적인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임신중지에 대한 논의에서 태아의 '생명 존중'은 언제나 힘이 세다. 물론 이를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그러나 아기를 임신하고 낳고 길러야 하는 당사자로서 여성의 삶과 그 존재에 대한 '생명 존중'이 얼마만한 무게로 논의되고 있는가도 중요한 쟁점이어야 한다. 이렇게 임신중지에 대한 사회적인 합의 도출이 어려운 상황 속에 정치인들은 논쟁의 소지가 있는 이 문제를 회피하고 싶어 한다. 더 심각한 건 이렇듯 법적인 공백기가 길어지면 안전하지 않은 낙태수술로 이어지게 되고, 명확한 법적 기준 없이는 의료진 역시 적절한 도움을 제공하기 어렵게 된다.
임신과 낙태에 남성 책임도 함께 강조해야
여러 나라의 예를 보아도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이 심한 나라일수록 여성들은 임신중지에 적합한 시기를 놓치고, 위험한 임신중지 수술이나 영아 유기가 많아지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실제로 2021년 9월 임신중지를 전면 금지한 미국의 텍사스주에서는 2022년 생후 1년 이내 영아사망률(출생 1000명당 사망자 수)이 전년 대비 12.9%나 급증했다고 한다. 같은 기간 다른 주의 영아사망률은 1.8%대 증가에 그쳤다는 보고가 있다.
임신중지를 금지하면 여성의 건강뿐 아니라 아이도 위험해진다.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임신중지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어 적합한 시기를 놓쳐 임신 후기가 되어서야 위험도가 높은 수술을 받는다. 또 임신중지약을 구할 수 없어 온라인 직구로 가짜 약을 구입해 먹고, 임신이 진행되는 것을 몰랐다가 예상치 않은 곳에서 출산하고 유기하는 일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
이제 더 미뤄선 안 된다. 지금 대안을 만들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런 비극적인 선택과 결정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면서도 생명 윤리를 고려한 균형 잡힌 임신중지법 제정이 시급하다. 또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연령에 맞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이고 포괄적인 성교육 커리큘럼을 개발하고 실행해야 한다. 이는 원치 않는 임신을 예방하고, 성과 재생산 건강에 대한 인식을 갖게 한다. 다양한 피임 방법에 대한 정보 제공과 함께, 경제적 부담 없이 피임할 수 있도록 지원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임신과 낙태에서 남성의 책임도 함께 강조하는 교육과 정책 역시 필요하다.
임신중지와 관련해 안전성과 접근성이 높은 의료, 상담, 경제적 지원을 포함한 통합적 정부 지원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며, 이러한 서비스 효과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평가하는 시스템도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우리 한국 사회는 임신중지 문제에 대해 좀 더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성의 권리와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면서, 동시에 생명 윤리와 사회적 책임을 균형 있게 다루는 정책과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법적 문제가 아닌, 우리 사회의 성 평등과 인권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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